밤의 몽상가들 알마 인코그니타
뤼도빅 에스캉드 지음, 김남주 옮김 / 알마 / 202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자 화자 ‘나’의 이름이 뤼도빅 에스캉드. 1972년 9월 4일생. 작품에서 뤼도빅의 연인으로 나오는 막신이 뤼도빅에게 위키피디아에 이름을 올리라고 종용한다. 파리 외곽도시 되유라바드에서 직장 갈리마르 출판사까지 한 시간이나 PER을 타고 매일 길고 긴 시간을 출퇴근하기도 싫고, 이제는 친구처럼 지내는 전처와 합동 육아하고 있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도 어려워 파리 시내에 아파트를 얻어야 하는데, 프랑스의 복잡하고 번거로운 주택 임대 과정에 필요한 자신의 신분을 확실히 밝히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9월 4일. 1870년 나폴레옹 3세가 황제 자리에서 쫓겨난 날.


  이야기가 삼각지로 흐르기는 하지만 좀 보태자. 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는 마흔 살 되던 해인 1848년, 2월혁명의 결과로 국민투표를 통해 취임한 프랑스의 초대 대통령이다. 그러나 공화정에 불만을 품은 나폴레옹 3세는 1851년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나폴레옹 1세에 이어 프랑스의 제2 제정시대를 열었다. (나폴레옹 삼촌-조카 사이에 샤를 10세가 있었는데 어째서 제2 제정이냐고? 부르봉 왕가의 샤를 10세는 황제가 아니라 왕이었거든.) 집권 초기에 다양한 치적을 쌓던 나폴레옹 3세는 후기로 들어 경제불황을 맞고, 멕시코와 전쟁을 벌여 이득도 얻지 못한 채 쓸데없이 군사력만 약화시켰다. 이때 새로이 강자로 떠오른 프러시아에 세기의 여우이자 철혈재상으로 알려진 비스마르크가 등장해 프랑스 사람들의 염장을 슬슬 지르기 시작했다. 이에 발끈한 나폴레옹 3세가 겁도 없이 선전포고를 선언하고 전쟁을 일으켰지만 이미 그럴 줄 알고 충분히 군비를 확장한 잘 훈련된 프러시아 군대가 프랑스를 도륙을 내버리고, 결정적 전투였던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까지 포로로 잡아 제2 제국의 문을 닫게 했으니, 바로 이날이 1870년 9월 4일이었다.


  (왜 이렇게 장황하게 떠들었느냐 하면, 프랑스 소설을 읽으려면 도무지 피할 수 없는 에밀 졸라의 위대한 루공-마카르 총서가, 나폴레옹 3세의 친위 쿠데타에서 시작해 (루공가의 행운) 스당 전투에서의 패배 (패주)로 마감을 하기 때문이다(아직 마지막 작품 <파스칼 박사>가 번역 출판되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다. <패주>의 주인공 장 마카르가 마지막 작품의 주인공 파스칼 루공의 조카니까 뭐 별 무리는 없겠다). 그러니 루공-마카르 총서는 1850년부터 70년 무렵까지 프랑스의 도시와 농촌, 유산자와 무산자, 예술가와 혁명가, 부르주아와 매춘부, 맨발의 고아 소녀, 실업자와 노동자에 투기꾼까지 망라한 “시대의 질주”를 파노라마처럼 엮었기 때문이다. 골라 찾아 읽으시라고 하지 않겠지만 우연히 눈에 띄면 머뭇거리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하여간 그리하여 뤼도빅이 연인 막신에게 위키피디아 제작을 위해 자신의 약력을 알려준 것이 이러하다.

  “뤼도빅 에스캉드는 1972년 9월 4일 마르세유에서 태어났다. 소르본 대학에서 미술사를 공부한 후 공연 예술에 전념했다. 쿠르 플로랑에서 배우 과정을 이수하고 ‘테아트르 15’에 입단했다. 1998년 7월 아비뇽 페스티벌에서 쥘리앙 바스티아니의 <유리 속의 악마> 공연에 참여했다. 1999년 테네시 윌리엄스의 극작품에 헌정된 에세이인 첫 책 <프롬프터>를 출간해 호평을 받았다. 아를에 있는 악트쉬드 출판사에서 2000년부터 편집일을 했다. 파리로 와서 갈리마르 출판사에서 콜렉션 팀장으로 일하며 직업적 경력을 이어가고 있다. 구소련의 공연 예술 창작을 장려하는 NGO인 ‘국경없는 무대’를 2005년부터 지원하고 있다.” (p.13~14)

  이 내용이 진짜 위키피디아나 책의 앞날개에 나온 저자 소개보다 훨씬 자세하다. 작품 속에 ‘뱅상’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하는 친구는 공쿠르상을 받은 작가 실뱅 태송Sylvain Tesson과 함께 파리의 옥상탐험에 기둥뿌리 썩는 줄 몰랐다는 것만 추가한다. 파리의 옥상탐험? 아메리카와 유럽의 주로 피부색 허연 사람들이 종종 우리나라 고층건물에 올라가 체포된 일이 알려지기도 한다. 바로 그거. 대신 옥상탐험은 주로 밤에 이루어지며, 파리의 주거지 건물들은 높이가 서로 비슷하고, 예를 들어 화재 같은 사고가 날 경우 이 건물에서 저 건물로 대피할 수 있도록 사다리나 철제로 만든 약식 계단 같은 것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한 번 옥상에 올라가면 지붕을 따라 한 구역 전체를 돌아다니거나 산책하거나, 지붕위의 바이올린을 켜거나, 가부좌를 켠 채 도를 닦거나, 건물을 지은 18세기부터 지금까지 이 섹터에서 살던 예술가, 소설가, 시인을 상기하며 그들의 작품을 낭송하는 꼴값을 떨 수도 있다. 심지어 탐험하는 시기가 겨울이라면 휴대용 난로와 약간의 땔감을 가지고 올라 약소한 캠프파이어를 즐기며 샴페인, 아니, 프랑스니까 샹파뉴를 즐기다가 흥이 오르기는 했는데 불이 꺼져간다면 양말부터 시작해 바지, 셔츠, 속옷까지 불태우며 몸을 녹일 수도 있는 거겠지. 정말 이런 장면이 책에 나온다니까.

  작중 등장인물이자 주인공 뤼도비크의 절친 뱅상, 실제 이름 실뱅 태송은 에스캉드와 함께 알고 지내는 의사이자 작가 크리스토프 뤼팽, 한 시절 암벽등반 세계챔피언 다니엘 뒤 락 등과 함께 다년간 암벽등반을 해, 주로 기어오르고 기껏 올라갔던 곳에서 줄타고 내려오는 일을 프로페셔널하게 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파리 시내에서 주거용 건물까지도.


  근데 문제는 이 건물이 주거용이라는 거. BNP 방크 나쇼날 드 빠리 같은 은행 건물, 프랑스 텔레비지옹 같은 국영방송국 건물에 기어올라도 문제가 될 터인데, 주거용 건물, 즉 아파트에, 한밤중에 창밖에서 수상한 인물이, 밤이니까 검은색으로 보이면서 저게 사람인지 악령인지 잠결엔 도무지 분간하지 못하는 형상이 미세한 소리를 내며 슥, 스쳐 지나가는 걸, 셔츠에 넥타이를 맨 슈트 차림이 아니라, 사랑하는 반려자와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가벼운 샤워만 한 채 벌거벗은 채 자고 있다가, 무려 5층 창밖에 매달린 검은 형제를 보았을 때, 도대체 무슨 생각이 들겠는지 한 번 생각해보시라. 유럽 사람들은 우리와 좀 달라서 집, 방 안은 완전히 사적인 공간, 전쟁 중이라 적군의 공습이 없다면 굳이 커튼도 꼼꼼하게 치지도 않는데, 희미한 조명이 있는 창문 밖에서는 컴컴한 방 안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음에도 이건 공포 자체 아니겠나? 5층에 동동 떠 있는 검은 형상.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왔는 지 누가 알아! 심장 약한 사람은 그대로 심정지 상태로 접어들 수 있지 않겠어?

  당연히 뤼도비크와 뱅상의 야밤의 옥상탐험은 주민들에 의하여 몇 번 목격되고, 세상에 비밀이 어디 었어, 벽을 기어오르는 인간이 누구인지도 알려져, 당장 경찰에 신고해 범죄예방을 위한 기동대가 새벽 시간에 뤼도비크의 집 현관을 두드리는 일도 벌어진다. 그러나 뤼도비크는 자신과 뱅상이 누리는 한밤의 유희를 한사코 막으려 하는 파리 시민과 주민 공동체와 경찰력을 마땅하지 않게 생각할 뿐, 자신들의 행위가 다른 이들에게 불편과 위험을 초래하는지는 전혀 감안하지 않는다. 심지어 앞에서 말했듯이 바람부는 한 겨울 밤에 옥상 위에서 캠프파이어를 즐기며 랭보의 시를 읊었으면서, 불을 지피는 행위가 화재로 이어지고 그럴 경우 건물소유주와 세입자 모두에게 돌이킬 수 없는 불행과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것도 별로 관심이 없다. 자신들이 어련히 알아서 불의 뒤처리를 했을까봐 난리를 친다고 지청구를 해댈 뿐. 이들의 행위를 견딜 수 없어서 드디어 누군가 아래와 같은 메시지를 갖고 뤼도비크의 집을 방문한다.

  “그래서, 일주일 전에 선생님이 이 건물을 기어올라가는 것을 목격한 우리가 경찰에 연락했다는 것을 선생님께 알려드려야겠다고 생각했죠. 제 말을 오해하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에스캉드 씨. 공동주택소유주협회의 이익을 위해서 그러는 겁니다. 여기에 개인적인 감정은 전혀 없습니다. 좋은 하루 되기를 바랍니다.”

  공동주택소유주협회 사람의 말이 뤼도비크는 놀랍지 않다.

  “달콤한 어조, 매뉴얼에 있는 용어, 교활한 의심, 요컨대 돈의 세계를 특징짓는 모든 속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뤼도비크 에스캉드와 뱅상은 책이 끝날 때까지 자신들의 야밤 건물 오르기와 옥상탐험이 공중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고 인식하지 못한다. 단 한 번도. 오히려 새벽이 오기까지 파리의 건물 옥상에서 바라보는 동화의 한 장면 같은 아름다움, 온갖 장애물을 벗어 던지고 본연의 활기찬 맥박을 되찾은 도시의 모습을 음미할 줄 모르는 우둔함을 한탄할 뿐.

  뭐 어떻게 하겠어? 그냥 그렇게 살아야지. 새벽 두 시에 5층 창문에서 방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형체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온 악령처럼. 그렇게 살아라.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레이스 2025-03-24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상상하면 안되는데 벌써 상상이 되요 ㅎㅎ

Falstaff 2025-03-25 05:43   좋아요 1 | URL
ㅎㅎㅎ 진짜로 이런 경우 당하면 황당할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