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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러드
힐러리 맨틀 지음, 이경아 옮김 / 민음사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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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 놀음. 도서관 개가실 거닐기. 세상에서 가장 여유로운 자세로 800번 서가 사이를 훑는다. 간혹 걸음을 멈추고 책등을 바라보며 쓱, 한 번 미소 짓기. 저 책 정말 재미있는데 어째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거 같군. 예상외로 이런 책 많아. 언제 날 잡아 몇 권 소개해봐야겠네. 어슬렁어슬렁. 이러다가 갑자기 눈에 띄는 이름 하나. 이런 게 한 번 눈에 들어오면 그것 그냥 둔 채 다른 서가로 옮아가기 쉽지 않다. 이번에도 그랬다. 발정한 잉글랜드 국왕 헨리8세의 바람기를 채우기 위하여 단행한 종교개혁을 그린 <울프 홀>과 앤 불린 최후의 날까지 토머스 크롬웰의 활약을 중심으로 한 <시체들을 끌어내라>로 부커 상을 두 번이나 받은 힐러리 맨틀의 다른 작품 <플러드>. 그래서 읽었다.
플러드. 로버트 플러드. Robertus de Fluctibus (1574~1637). 피 묻은 늑대 또는 붉은 늑대가 문장인 웨일스 혈통의 귀족 자재. 의사이자, 학자인 동시에 연금술사, 신비주의자, 점성가, 수학자, 우주론자로 당대의 현자 요하네스 케플러와 학문적으로 맞짱을 뜬 적도 있는 장미십자회 회원. 그러나 플러드를 만나기 위하여 힐러리 맨틀은 독자를 16세기 또는 17세기로 초대하지 않는다. 작품의 무대는 1956년, 삼면이 황무지로 둘러싸인 잉글랜드의 가상의 마을 페더호턴. 북쪽으로 유일하게 맨체스터, 위건, 리버풀 행 도로와 철도가 놓인 이곳에 백여 년 전에 면직물 방직공장이 세 곳 들어선 이후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아일랜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이룬 마을. 따라서 마을엔 아일랜드 이민자를 위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당과 수녀원 그리고 수녀원 부속 학교도 들어섰다. 인구의 다수가 로마 가톨릭 쪽이다. 소수의 잉글랜드인들은 영국 국교 교회가 아닌 개신교 감리교 교회에 다닌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당의 늙은 주임 신부 앵윈. 처음엔 잠이 오지 않아 위스키 한두 잔씩 홀짝거리던 것이 이제는 위스키를 장복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한 시절엔 순종, 청빈, 순결의 의무를 수행하며 신앙을 향한 열정을 불살랐지만, 나이 들고, 이 빠지고, 무릎 쑤시는 시절을 맞아 세월의 잽을 한두 대씩 얻어 터지더니 제일 먼저 열정이 식어버리고 이어서 과연 신이 존재하기는 할까? 악마적인 의심에 시달렸으며, 급기야 이제는 더 이상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그러면서도 이 저주받은 외진 황무지 성당의 주임 신부의 직을 유지하는 것은 그렇다고 신부의 직을 물리칠 수는 없으니까. 이제까지는 교단이 앵윈 신부를 필요로 했다면, 지금부터는 앵윈 신부가 교단이 필요해 좀 더 깔고 앉아 있겠다는 데 그게 뭐? 이날 이때까지 신부 짓을 했으니 얼마 남지 않은 세월동안 나를 좀 먹여 살려도 크게 문제되지 않잖아? 이런 심사였겠지. 그렇다고 앵윈 신부가 가톨릭까지 저버린 건 아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데 신앙은 그대로? 그럼 그게 뭐? 뭐긴 뭔가, 미신이지. 미신만 남은 거.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지금부터 발언은 진심으로 가톨릭 또는 개신교를 믿는 분은 마음이 상하실 수 있을 터이지만, 솔직하게 쓸 생각이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승인한 313년의 밀라노 칙령 이후에, 기독교가 전 로마 지역에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이, 질투의 하느님을 위하여 그간 수십 세기 동안 그리스의 뒤를 이어 로만 정신을 유지해온 저 올림푸스 신들의 신전을 박살내는 거였다. 두번째가 당시 황제나 귀족들보다 정치성향이 뛰어난 기독교 수장들의 권력투쟁이었고. 내 의견 아니다. 전부 <로마제국 흥망사>에 나온다. 불만 있으면 나 말고 에드워드 기번에게 항의하시라. 물론 당신 죽은 다음에 천국 가는 길에 일부러 연옥에 들러 그를 만날 기회가 생기면 그렇다는 거다.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 나는 아무리 성서를 뒤져봐도 연옥이라는 단어를 발견하지 못했는데 단테는 어디서 연옥을 주워 와서 오랜 세월 그렇게 재미를 봤을까? 그럴 리가 있느냐고? 성서 다시 한번 읽어 보시라. 연옥이란 말이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 에이, 나는 읽어봤다니까. 또 읽기는 싫고.
하여간 그건 그거고, 정작 이 책을 읽고 내 뇌를 잠식했던 건, 기독교, 특히 로마 가톨릭에 무수하게 등장하는 성인과 성녀들. 그 사람들은 뭐야? 이 책에서 나오는 성인, 성녀 몇 명만 보자. 그냥 눈에 띄는 몇 명만.
성 던스탄. 대장간에서 일을 하고 있다가 악마가 찾아와 유혹을 하려 들자 벌겋게 달아오른 집게로 악마의 코를 콱 낚아챘다.
성녀 아폴로니아. 로마인들이 아폴로니아의 이를 뽑는 고문을 견뎌 후에 치과 의사들의 수호성인이 되는 영광을 얻었다.
성 그레고리우스. 교황관을 쓰고 있다니 대교황이란 칭호를 받은 그레고리우스 1세를 말하는 거 같은데, 교사들의 수호성인이다. 어디서 주워듣기를(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비록 후대의 숱한 사제들이 말을 듣지 않았지만 신부들한테 처음으로 순결을 요구했다지?
성 아우구스티누스. 화살이 꽂힌 심장을 들고 있다는데 그러면 혹시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아니라 미남으로도 이름이 높은 성 세바스티아누스 아닌가? 젊은 시절엔 생 양아치 짓만 하고 다니면서 부모 속 깨나 썩이던 아우구스티누스가 맞다면 알제리의 히포 레기우스에서 성직자 생활을 해 많은 아일랜드 인들은 하마Hippo 아우구스티누스인 줄 알걸?
작은 사자를 데리고 있다는 성 히에로니무스. 돌로 자기 앙가슴을 두드리면서 학자, 서적상, 순례자의 성인이 된 교부 가운데 1인. 이글거리는 눈으로 은둔자의 무릎을 다 드러낸 채 사막에서 도를 닦는 이로, 앵윈 신부가 제일 좋아하는 성인이란다.
그리고 벌집을 든 암브로시우스. 별명이 성 벌집인.
자신의 잘린 가슴을 접시에 담아 들고 있는 성녀 아가타는 종 만드는 사람의 수호성인.
역시 자신의 가죽을 벗기는 데 사용한 칼을 움켜쥐고 있는 성 바로톨로메오와 휴대용 풍금을 들고 있는 성녀 체칠리아. 장미 화환 아래에서 앞을 노려보고 있는 작은 꽃小花 테레사.
그리고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저 불초한 무식쟁이의 의견임을 감안하시고 내가 생각하는 걸 들어보시라. 이건 기독교가 자기 손으로 없앤 그리스 로마의 여러 신多神을 벤치마킹해 스스로 만든 거 아닌가 싶다. 중세 시대의 일반 대중에게 성서와 성서에 나오는 한정된 진리만 가지고는 암만해도 마땅하지 않아 직접적인 삶의 의지가 되는 성인, 성녀들을 자체 제작 또는 과장해 상징, 우상 기타 등등을 만들어주었던 거 아닌가, 한다는 말씀. 치과의사, 종 만드는 사람의 수호성인은 웃기고, 교사, 나그네, 대장장이의 수호성인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도 몇 번 마주친 거 같지 않으신가? 그래서 줄리언 반스가 말했다니까. “나라를 제대로 운영하기 위하여는 역사를 오해할 필요가 있다.”고. 한 술 더 떠, 종교를 제대로 유지하기 위해서 더 풍부한 스토리를 만들 필요가 있는 법이다. 스토리를 만드는 건 소설. 즉 바티칸에서 소설을 썼다는 얘기지, 저 먼 시절에. 기독교라고 뭐 다를 거 같았어?
이 성당을 점검하기 위하여 통통한 체격에 딱딱한 성격으로 테 없는 안경을 쓴 현대적인 고위 성직자인 주교가 찾아온다. 그는 1950년대가 아닌 다가올 다음 십년은 통합과 화합의 십년이라 규정하고, 통화합을 위해 보편 교회의 정신에 입각해 라틴어 말고 현대 현지어로 미사를 집전하라고 지시한다. 이런 세상에, 이렇게 끔찍한 일이. 어찌 미사를 라틴어가 아닌 언어로 진행할 수 있을까? 미사가 별 거야? 하느님한테 올리는 제사. 그러면 하느님의 언어인 라틴어로 해야 하느님이 더 쉽게 알아들으실 거 아니냐는 거다. 이렇게 망측한 일이.
그런데 주교는 여기서 한 숟가락을 더 보태, 성 토마스 아퀴나스 성당이 가지고 있는 모든 성상을, 코가 깨진 성모 마리아 상은 코를 정상으로 회복시킨다는 전제로, 소화 테레사와 함께 둘만 남기고 나머지는 전부 철거하라고 지시한다. 무슨 수호성인. 무슨 수호성인. 이게 미신이 아니고 무엇이냐는 취지다. 죽은 후 지옥의 유황불에 던져질 내가 보기엔, 그러면 성체를 모시는 일도? 밀떡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붉은 포도주 한 잔 들어올리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의 잔이니, 너희는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
주교의 말을 듣고 삐딱한 우리의 앵윈 신부. 신부가 자기 말을 제대로 들을 거 같지 않으니까 주교가 덧붙인다. 이제 늙어버린 자네한테 조수가 필요할 거 같군. 즉 자기 고자질꾼을 부제로 보내겠다는 거다. 아, 이런 제기랄.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을. 그러나 늦었다.
며칠 후, 복종의 의무가 있는 앵윈 신부는 주교의 명령을 따르기 위하여 성당 마당 귀퉁이를 넓게 파고 그 속에 성상들을 파묻는다. 그리고 그날 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캄캄한 밤에, 늦은 시간에 사제관을 방문하려면 부엌으로 향하는 옆문을 두드려야 함에도 무례하게 현관을 쾅쾅 두드리는 작자가 나타났으니, 그의 목 둘레에 빳빳하고 흰 로만 칼라를 달고 있다. 누가 봐도 주교가 보낸 새끼 신부, 즉 부제가 드디어 도착한 거였다. 온몸에서 빗물을 뚝뚝 떨어뜨리는 검은 옷의 신부, 그의 이름이 플러드, 알파벳으로 FLUDD이어서, 온몸에서 줄줄 흐르는flood 빗물하고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나? 이이가 17세기의 신비론자이자 연금술사, 점성가, 오컬트 주의자인 그 플러드 맞아?
흠. 그건 알려드릴 수 없지. 한 가지 힌트만 드리자면, 이 플러드는 직접 미사를 집전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악마는 아니라는 말씀? 아, 몰라, 몰라. 그러면 미사를 집전한다니까 사기꾼? 아 모른다니까! 말 나온 김에 한 마디만 보태자면, 저 먼 시절 그레고리우스 1세의 말을 확실하게 거역한 종자라서 순결하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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