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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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천쓰홍의 작품은 이것을 읽으려 했다. 근데 누군가 먼저 희망도서 신청을 하는 바람에 지난 해 대신 읽은 책이 <귀신들의 땅>. 이 작품 <귀신…>에서 주인공 톈홍은 베를린에서 독일 남자 T와 동성결혼 상태로 지내다가 불운의 손톱에 채여 T와 격투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하고 오랜 복역을 마친 후 다시 타이페이로 돌아온다. 타이페이에 남은 5녀 2남 형제 자매들의 신난한 삶을 만나는 지긋지긋한 삶의 이야기.

  천쓰홍 자신이 타이완 시골에서 아홉째 자식으로 태어난 퀴어 소설가, 영화배우, 역자의 명함을 가진 인물로 <귀신들의 땅>의 주인공 톈홍과 마찬가지로 베를린에서 동성 결혼 상태로 지내고 있다. 만날 베를린만 무대로 하기가 좀 그래서 <67번째 천산갑>에선 장소를 프랑스 파리로 옮겼다. 475페이지까지 읽어야 이름을 알 수 있는 ‘그’ 천다웨이와 ‘그녀’ 라이핀옌이 주인공인데, 이렇게 그와 그녀라고 써 놓으니까 둘이 뜨겁게 연애했을 거 같지? 아니다. 라이핀옌이 완전히 이성애자인 것과 반대로 천다웨이는 완전히 동성애자라서, 둘은 어린시절 아역배우였는데, 함께 매트리스 광고를 찍다가 자연스럽게 잠을 자는 장면을 찍기도 했을지언정 이후 세월이 더 흘러 몸도 익을 만큼 익고, 알 거 다 알고, 할 거 다 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둘이 만나면 기꺼이 같은 침대에 올라, 여전히, 여전히 푹 잔다. 잠만 잔다.

  원래 그렇단다. 여성 이성애자들은 남자 동성애자 친구를 게이미(Gay蜜)라 부른단다. 게이 뒤에 꿀 밀蜜자를 붙였으니 나쁜 뜻일 리 없다. 실제로 이들의 관계는 일반적인 남녀 사이보다 훨씬 더 친밀하고 서로의 마음을 잘 소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천다웨이는 성 소수자로 타이완에서 버티지 못하고 파리로 거주를 옮겨 몇십 년째 8제곱미터 즉 2.4평 정도 고시텔 수준의 숙소에서 버티고 있다. 당연히 그동안 연애도 했고, 이들 가운데 아프리칸 프랑스인인 J와 너무도 깊은 사랑을 해 아직도 헤어짐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상태이다.


  올해 여름에 파리에는 비가 오지도 않았다. J도 없었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J는 천다웨이와 관계없는 사고를 당해 구급차를 타고 가는 중에 죽었다. 천다웨이는 천성이 우울모드다. 어린 시절부터 이런 정서는 고착되어 있었고, 당연히 성격 형성에 부모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거구의 미남형인 아버지는 시간 날 때마다 어머니가 아닌 다른 여자와 온갖 곳을 돌아다니며 엽색행각을 펼쳤고, 어머니는 한 번도 빠짐없이 여자가 바뀌기만 하면 단골 사설탐정을 고용해 그들의 현장을 급습하고는 했으며, 거의 언제나 어린 천다웨이가 직접 훌렁 벗은 아버지와 다른 아줌마의 나신을 볼 수 있게 따듯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러니 집안꼴이 제대로 될 턱이 있나? 이런 저런 일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아버지는 마음을 딱 잡고 천산갑 농장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천산갑의 비늘은 매우 비싼 한약재로 사용하며, 제대로 키우기만 하면 동남아시아 화교권은 물론이고 중국에도 밀수출 할 수 있으며, 본토로의 밀수가 제대로 선만 잡았다 하면 맑은 하늘에서 돈벼락이 떨어지는 건 시간문제라고 큰소리 뻥뻥 치고 다녔다. 세상에 어리석기는. 그렇게 쉬운 돈벌이라면 여태까지 다른 사람이 그거 내버려 두었겠느냐고. 아니나 다를까, 천산갑들은 아버지 보기를 처승차사처럼 여겼다. 집안 식구 가운데 어린 천다웨이 딱 한 명만 졸졸 따랐다니 애초부터 망쪼였던 거다. (천산갑과 나병 매개동물인 아르마딜로는 다른 종이다. 헛갈리지 마시기를.)

  여주인공 라이핀옌한테는 치마바람 하나는 지역에서 알아주는 엄마가 있었다. 아빠는 일찍 죽어주어 소원풀이를 하는가 싶었지만 남자들은 라이핀옌의 엄마와 새 살림을 차리기 주저했고, 그저 잠깐 동안의 엔조이만 추구할 뿐이었다. 엄마 역시 남자의 사랑 또는 손길이 없으면 곤란을 겪는 종류의 사람이라서 어려서부터 눈에 확 뜨일 정도로 예쁜이로 소문이 난 외동딸을 일찌감치 아역 스타로 만들어, 아이가 번 돈을 자기의 향유를 위하여 즐겁게 쓰기로 작정을 한 이였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천다웨이와 함께 매트리스 광고를 찍게 되고, 어린 아이들이 천진하게 숙면을 취하는 모습이 타이페이 전국에 바람을 불어 매트리스 시장점유율이 하늘을 찌르자, 이들 어린 커플은 CF 2탄, 3탄…을 거쳐 n탄까지 찍어야 했다. 이 사이 아이들도 나이를 먹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중등학교에 입학하니까 천다웨이는 그렇다 쳐도, 라이핀옌은 이미 거덜이 난 몸 상태라고 동급생 또래 사이에 망측하고 억울한 소문이 퍼져버렸다. 엄마? 나 몰라라. 넌 그런 거 신경쓰지 말고 열공, 열공 또 열공에 몸매관리만 열라 하거라. 좋은 대학 나온 예쁜 아이돌이라야 비싸신 몸이 되는 거란다.

  진짜로 라이핀옌은 열공과 PT를 멈추지 않아 좋은 대학에 진학했고, 프레시맨이 되자마자 의과대학생들과 바이크를 타고 산에 올라 야회를 즐기러 가던 중, 잘생긴 부잣집 아드님이지만 체력적으로는 별볼일없는 장이판이란 개썅 양아치 같은 새끼와 함께 바이크를 타고 달리다가, 으슥한 산길로 잔뜩 들어가더니, 그날 처음으로 폭행을 동반한 강간을 당했고, 그게 라이핀옌의 첫경험이었는데, 한 번에 덜컥, 임신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라이핀옌한테 긴급하게 다가온 문제는 임신중단. 하지만 첫만남에 강간을 하고, 서로의 생식기가 연결된 상태로 여성의 얼굴이 드러나게 사진 촬영을 했으며, 앞으로 자신이 관계를 요구할 때마다 사진을 협박 도구로 사용할 예정인 장이판이란 허섭쓰레기가 임신중단 수술을 위하여 함께 병원에 가는 건 애초에 바랄 수 없어 전전긍긍했을 때, 라이핀옌은 자연스럽게 막일을 하고 있던 천다웨이를 호출한다. 그들은 천다웨이가 몰고 다니던 다 찌그러진 중고차를 타고 저 멀리 가오슝까지 가서 무사히 수술을 받는다. 중절 후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숙박업소에 들은 후에 라이핀옌이 자고 있는 밤중에 살짝 깬 천다웨이는 라이가 벗어놓은 피 묻은 속옷까지 손빨래해서 밤새 말려 놓기도. 이 일이 있고나서 라이핀옌이 몇십 년이 흘러 어떻게, 어떻게 천다웨이가 살고 있는 파리 숙소에 찾아간 40대 후반까지 옷장 속 저 깊은 곳에, 락스에 담가둔 것처럼 깨끗하게 얼룩이 지워지지는 않은 손빨래한 팬티를 보관하고 있었던 걸 천다웨이는 몰랐을 거다.


  천다웨이는 아직 배우다. 젊은 시절에 찍은 영화로 낭트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적도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 은막을 떠나 있었으며, 그간 계속 파리의 좁은 숙소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은 뭘 해서 먹고 사는 지도 정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하여간 궁핍하다. 8월의 파리. 틀림없이 언젠가는 비가 내릴 듯한 바람과 구름 그리고 공기의 움직임. 이걸 프랑스 사람들은 페트리쇼르Petrichor라고 한단다. 바람이 몰고 오는 비 냄새. 그리고 진짜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좁디 좁은 침대 위에는 J대신 그녀, 라이핀옌이 누워서 자고 있다. 침대, 테이블, 의자, 커튼 뒤의 화장실로 이루어진 작은 방. 천다웨이가 젊은 시절에 찍은 대표작. 이젠 화면에도 비가 줄줄 흘러내리는 필름 영화. 그것을 4K 영상으로 복원해 낭트 영화제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프로그램으로 상영할 계획을 천다웨이는 몰랐던 거다. 이를 위하여 타이페이의 전 매니저가 자기 인력풀을 총동원해 그를 찾아내고,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작고 보잘것없는 방에 불쑥 나타났다. 천다웨이는 다시 낭트에 가서 레드 카펫을 밟고, 감사의 인사를 하고, 화려한 파티에 참석할 마음이 도무지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필름에 분명하게 박혀 있는 짐승들, 어린 시절의 천산갑들이 갑자기 너무도 그리워져 영화제 참석을 승낙했고, 매니저는 곧바로 명품 수트와 에나멜 구두를 보내왔다.

  그리고 며칠 후, 라이핀옌이 도착했다.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하고 입 무거운 남자친구, ‘게이미’이자 은인이기도 한 천다웨이를 만나기 위하여. 그동안 라이핀옌은 몇 명의 남자를 만났고, 첫번째 남자가 자신을 강간하고 임신시키고, 이후에도 계속 아무 조치 없이 함부로 자기의 몸을 취해 한 번 더 임신중단을 경험하게 만들었던 장이판이었고, 두번째가 큰 부자집의 아들로 뉴욕에서 변호사 개업을 꿈꾼다고 허풍을 떨지만 결국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 한 다음 눈물을 흘리며 떠난 법대생이었으며, 울라불라, 제일 마지막이 야심만만한 청년 정치가이었다가 지금은 1년 365일 선거에 목을 매는 성공한 정치인인 장하이타오이다. 장하이타오는 정치가답게 뭐 하나 까다로운 건 없지만, 시어머니짜리가 세상에서 오직 자기 아들만 아는 완벽한 개 호로 시어머니라서, 딸 셋을 낳고 이후 몇 번의 태중 성별 검사를 거쳐 줄줄이 임신중단 수술을 한 다음에 결국 아들 하나를 낳게 했다. 이 책에서도 성소수자가 아닌 성다수자 남성은 예외없이 개썅노무새끼들이며, 개썅노무새끼들의 어미들도 개썅년의 종자이다. 진짜 읽어볼 분은 감안하시라. 한 인간이 어떨 때는 좋았다가, 어떨 때는 확 변해버리는 그냥 보통의 사람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게다가, 천다웨이와 라이핀옌. 참 잘 운다. 처음부터 끝까지. 특히 천다웨이는 배우는 배우인데 말주변이 없다. 그러다보니 말 할 수도 없다. 전화한 사람은 자기 말만 하다가 나중엔 열폭하기도 한다. 대신 정말 잘 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깟 파리의 페트리쇼르가 문제가 아니다. 시간 나면 운다. 산보하다 울고, 밥 먹다 울고, 창 밖 바라보다 울고, 자는 여자 얼굴 바라보며 울고, 울어도 철철 울고, 라이핀옌도 샤워와 수도꼭지 콸콸 틀어놓고 목을 메어 울고 운다. 처음부터 끝까지 착한 우리편은 내내 운다. 둘이 흘리는 눈물을 다 모으면, 강은 아니더라도 집 앞 냇물처럼 졸졸 흐를 정도는 되리라.

  즉, 질척거린다는 뜻이다. 질척거려도 너무 질척거린다. 두 손으로 책을 쥐고 비틀면 책 속에서 짠 소금물이 뚝뚝 떨어질 거 같아서, 나는 당신한테 추천하지 못하겠다.

  라이핀옌. 이이는 틈만 나면 천다웨이의 팔뚝, 팔꿈치의 굳은살 박인 곳을 쓰다듬는다. 왜 천쓰홍은 이 부분을 강조했을까? 팔꿈치 굳은살. 그곳의 촉감이 남성만 가지고 있는 고환 주머니, 즉 가장 예민한 피부조직 가운데 하나인 부랄 껍데기 만질 때의 감촉과 매우 비슷해서 그렇단다. 오래 만지지 말라. 특히 온도에 민감해 오래 쥐고 있으면 열이 올라 중력 방향으로 축 늘어질 위험이 있으니. 힘껏 쥐지도 말라. 쥠을 당하는 인간은 아파 죽는다. 혹시 몰라. 꼭 만져보고 싶은 인간도 있는 지. 뭐 있겠지, 사람 사는 일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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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5-02-06 06: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소금 ㅋㅋㅋㅋㅋㅋ 징짜 징글징글 운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전 이 작가 책운 더 안 읽으려고요.

Falstaff 2025-02-06 07:18   좋아요 0 | URL
ㅎㅎㅎ 쇤네도 이게 마지막 천쓰홍입니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