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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질 이야기 ㅣ 빛소굴 세계문학전집 1
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이영아 옮김 / 빛소굴 / 2024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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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아이가 청소년 시절을 관통하여 성인이 되기 직전까지 그린 연작단편집. 모두 아홉 편으로 쓰였는데 핏제럴드가 더 오래 살아 이야기들을 다 합해 장편소설로 다시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잠깐 생각해보기도 했다. 하긴, 그냥 이대로 두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틀림없이 핏제럴드가 내 취향인 듯한데, <위대한 개츠비>는 우리말 문장하고 맞지 않는지 어찌 제 맛을 알지 못해 다른 번역으로 다시 읽어보겠다고 작심하고 해와 달만 보내고 있으며, <밤은 부드러워라>도 틀림없이 내 취향이라는 것만 확인했을 뿐 목불인견의 우리말 문장이 공포스러워 이것 역시 다시 읽어봐야겠다, 마음만 먹고 있는 중이다. 그러니까 나한테 핏제럴드는 하여간 뭔가 꼬여 있는 작가인 것이 틀림없다. 누군가의 지도편달 없이 함부로 책을 읽은 것에 기대 말해보자면, 핏제럴드는 미국문학의 고전이라기보다 한 상징 또는 우상이라 말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이 또래 작가라면, 같은 나이의 존 더스 페서스와 세 살 아래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꼽을 수 있어서 흔히 “잃어버린 세대”의 맨 앞줄에 세우고 있는데 어찌 그렇게 작풍들이 다를까 싶다. 이 가운데 제일 개인적이고, 젊음 속에서 갈등하며, 발산하다가 좌절하기도 하는 이가 핏제럴드,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더스 페서스와 헤밍웨이는 고전이 될지라도 핏제럴드는 그깟 고전 대신 하나의 우상으로, 상징으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일지도 모르겠다.
제목만 읽고 향신료로 쓰는 한해살이 풀 - 바질이구나, 핏제럴드가 음식이나 먹는 이야기를 쓴 모양이지? 아마 에세이겠다, 처음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세계문학전집 시리즈의 1번 타이틀을 달고 출간했다니, 그러면 읽어봐야 하는 거다 싶어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해서 읽었다. 흠. 좋은 걸! 핏제럴드의 장편은 위에 쓴 이유 때문에 감격하는 데 실패했고, 그 영향 때문이었는지 단편집도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오호, 마음에 든다. 책을 읽는 데는 독자인 내가 왕이다. 내 마음에 들면 최고고 아니면 꽝인 거다. 근데 바질이 한해살이 풀 이름이 아니었다. 단편소설 아홉 편의 주인공 이름이 바질 듀크 리, 이 아이의 성장기를 쓴 바질 이야기였다.
바질이 반바지를 입고 다니던 열한 살 시절의 일화를 그린 첫 작품 <그런 파티>. 핏제럴드가 애초에 바질을 주인공으로 해 연작을 쓰려 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맨 첫 작품에서 되바라지기 시작한 바질이 여자 아이들의 이마나 뺨에 키스를 할 수 있는 게임을 한 번 경험하고, 에그머니 이거 참 바람직한 게임이네 싶어서 바로 다음날 다시 파티를 열고자 하는 작고 작은 에피소드인데, 당시 매체가 열 살, 열한 살 어린이의 키스게임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퇴짜를 놓았고, 핏제럴드는 이름을 바질에서 ‘테런스 팁턴’으로 바꾸어 다시 제안했지만 결국 팔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책의 첫 작품도 주인공이 바질이 아니라 테런스로 표기되었으며, 독자는 이게 온전히 바질 듀크 리의 연작 성장소설이라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다음 작품으로 넘어간다.
책을 읽으면서 약간 혼란스러운 것은, 남자 아이들이 겪는 사춘기는 거의 완벽하게 이해가 되지만, 이들이 사랑과 성에 눈을 뜨는 시기에 그 대상이 되는 사춘기의 여자 아이들의 심리적 변화와 태도는 여전히 그리고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는 거. 여성 독자의 경우에는 내 반대 입장일 수도 있겠다. 정말 사춘기 남자애들이 이럴까? 맞다, 정말 그렇다. 핏제럴드 본인은 허약 체질에 체구도 작아 스포츠는 구경하는 데만 몰두한 대신 작품 속 주인공 바질을 자기의 평생 로망인 작은 체구의 뛰어난 축구스타로 만들어 놓고, 엉뚱하게 장래 희망이 예일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역사상 최연소 장관을 거쳐 최연소 대통령을 할 것이다, 실크햇과 망토를 휘날리면서 뉴욕 금융가의 금고를 터는 신사 괴도 루팡을 선망하기도 하며, 눈만 한 번 찡긋하면 동네 예쁜이들이 줄을 서서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키스를 빈다는 등의 허무맹랑한 공상도 한다. 이건 유년 시절부터 여자 아이들과 비교해 빈도가 높은 혼자 놀이에 익숙할 때부터 내려오는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내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다. 내가 오은영도 아니면서.
그러나 틴에이지에 접어들면, 이런 공상이 말 그대로 공상일 뿐, 현실은 아무리 돌팔매질해봐야 언제나 요지부동이어서, 예일대학은커녕 삼각지 대학도 언감생심이며, 동네 예쁜이는커녕 같은 아파트 옆 동에 사는 보람이, 슬기, 다정이조차 내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면서 슬슬 인생을 배우는 거다. 인생 배우는 게 뭐 있어? 깨지면서 크는 거지. 어디서 칭찬 한 마디 들으면 아무한테나 조금 살을 더 보태 침을 튀면서 마치 세상이 자기 것이 될 것처럼 으스대고, 자기 나름대로 좀 알기 쉽게 설명하고자 할 뿐임에도 듣는 사람 귀엔 세상 둘도 없이 아니꼽게 들리리라는 건 생각도 못하는 게 바로 으스대는 건데, 그게 얼마나 꼴불견인지 당연히 몰라, 자기 스스로 왕따의 길을 걷기도 하는 거, 그게 인생이지 인생이 별 거야? 그래, 그렇게 크는 거다. 아, 어쩌면 나하고도 그리 많이 비슷한지. 읽으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스콧 핏제럴드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부르주아, 아니면 적어도 사는 데 어려움이 거의 없는 중산층 이상이다. 이 책의 바질도 그리 큰 부자는 아니지만 죽은 아버지가 물려준(핏제럴드의 경우 엄마가 외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재산을 운용하여 얻는 수익으로 열다섯 살이 되자 (핏제럴드와 같은)고향 세인트폴을 떠나 뉴욕 근방의 명문사립학교인 세인트레지스 스쿨(작가는 뉴먼스쿨)로 유학하고, 뮤지컬인 것처럼 보이는 공연을 관람하며 인생을 즐긴다. 다른 작품에서도 소비생활 하나는 끝내주게 만끽하며 여유로운 생활을 향유한다. 독후감을 읽는 분은 내가 계급에 대해 과하게 예민하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글쎄 그게 눈에 보이는 걸 어쩌랴. 이 책에서도 자산 운용에 문제가 생겨 엄마가 큰 손실을 입게 되어 예일대학 말고 주립대 가면 안 되겠느냐 하는 문제가 대두될 때 바질이 기어이 예일을 가고 싶어서, 내가 보기에는 심각하게 진지하지는 않은 수준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나름대로 애를 썼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조금 우습. 그렇게 일을 하고, 마음에 드는 아가씨와 데이트를 하기 위하여,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아가씨한테 대타를 보내기 위해 두 주일 동안 일한 임금을 대가로 쓴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거지. 하긴 아직 사춘기 소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보는데, 이렇게 대가리 커져서 어떻게 사업을 하다가 백만장자가 되면 기어이 미스터 갯츠비 꼴이 난다는 거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바질은 11세, 13세, 15세, 16세, 17세. 초등학생이었다가 꿈에도 그리던 예일대학 프레시맨까지의 성장소설이니 위에 쓴 것처럼 엄격하게 읽지 말기.
읽는 내내 키득거리고, 고개를 끄덕거렸으면서 한편으로는 짠했다. 십대 사춘기 시절의 중구난방과 야단법석, 그리고 좌충우돌. 수많은 실수와 잘못과 작은 거짓말과 기타 등등. 앞으로 20년이 가고, 30년이 가고, 40년 그리고 더 오래, 아마도 기억이 남아 있을 때까지 어쩌면, 어쩌면 사는 내내 가슴 속에 깊이 남아 불쑥 떠오를 때마다 쥐어짜는 아쉬움, 후회, 안타까움으로 먹먹하게 만들 자잘한 것들의 기억을 가는 먹줄로 새겨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절의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던 진흙탕을 떠올릴 때마다 지금도 가슴이 쿵 무너진다. 나는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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