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의 노래 - 2023 부커상 수상작
폴 린치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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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7년 아일랜드 리머릭 카운티의 해안 및 절벽 구조대원 아버지와 성인 문맹퇴치 교사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폴 린치 Paul Lynch는 유럽의 명문학교인 더블린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입학해 영어와 철학을 전공하다가 중도에 때려치우고 만다. 이후 지금은 폐간된 선데이 트리뷴에 들어가 부편집장과 수석영화평론을 하다가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모두 다섯 작품을 발표했는데 2023년에 부커상을 받은 <예언자의 노래>가 가장 유명하다.


  폴 린치는 시리아 내전과 내전에 따른 난민문제, 곤경에 처한 난민에 대한 서방세계의 무관심에서 작품의 힌트를 받아 <예언자의 노래>를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아직 직장에 다녔다면, 이 책은 아마도 우리나라 시장에 나오자마자, 2024년 11월 23일이나 24일 정도에 다 읽고 독후감까지 썼을 것이다. 대신 나는 11월 18일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다른 책들과 함께 12월 중순에 받아 읽었다. 그렇다, 날짜가 중요하다. 전 같으면 읽었을 시기인 11월 24일과 진짜로 책을 읽은 오늘 12월 중순 사이에 우리나라에는 20대 대통령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이 책 <예언자의 노래> 속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은 극우 정당인 국민동맹당이 권력을 장악하고 비상대권법을 발효해 아일랜드의 헌법을 정지시켜 버린다. 책에서 말한 ‘비상대권법’이 12월 3일 밤에 잠깐 발효되었다가 곧바로 사라진 우리나라의 비상계엄과 같거나 매우 유사한 법령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니 12월 3일 이후에 이 책을 읽은 우리나라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품의 주인공 아일리시 스택에 감정을 몰입할 수 있었고 비상대권법을 근거로 공안당국이 저지르는 폭력에 더욱 진저리를 쳤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이 비상대권법을 발효한 시기는 영국이 브렉시트를 선언한 다음이니까 2020년 이후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아일랜드의 통화는 유로화고, 영국령 북아일랜드는 파운드화를 사용하니 이 의견이 옳을 것이다. 21세기 들어 아일랜드는 기록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세제 개편을 단행하고 세계최고 수준의 지원을 약속해 숱한 다국적기업이 아일랜드에 공장도 짓고, 사무실도 내고, 심지어 위장전입까지 서슴지 않아 2020년대의 아일랜드는 유럽에서도 속으로 알찬, 알부자 나라 가운데 하나로 편입되었다. 2022년 기준 1인당 GDP가 9만7천여 달러로 세계 2위에 올랐다. 이 마당에 아일랜드에서, 집권당이 아무리 우익 보수 골통을 넘어 히틀러의 사생아라고 하더라도 정말 비상대권법을 발효해서, 이에 반대하는 숱한 사람을 체포, 구금, 그리고 유사이래 보지 못한 첨단 고문에 이은 살해, 학살을 자행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할 것이다. 근데 그걸 누가 알아? 2024년에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이 떨어질 줄 누가 알았느냐고? 난 그날 밤 술 취해 자고 있다가 마누라가 흔들어 깨워 계엄 터졌다는 소식을 듣고, 아무리 귀를 쫑긋해도 폭탄 터지는 소리가 나지 않기도 하고, 나 혼자 죽으면 억울하지만 전쟁 터져서 함께 죽으면 그나마 덜 억울하다, 잠이나 자자, 계속 잤다는 거 아니냐 말이지. 김정은이 쳐들어오는 거 말고는 비상계엄을 때릴 이유가 없잖여? 안 그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일랜드에서 비상대권법과 연이어 체포구금, 고문과 대량학살을 상정하는 건 조금 무리다. 비상대권법에 반대하는 반군들이 정부군과 비슷한 수준으로 무장해 정부군과 싸울 수 있는 환경이라면 애초에 비상대권이건 비상계엄이건 시도하지도 못하지 않았을까 하는 게 처음부터 의아했다.

  또 하나의 궁금점은, 의회민주제 하의 집권당인 국민동맹당이 왜 비상대권법을 통과시켰을까, 하는 점이었다. 작가는 여기에 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물론 이걸(비상대권법을 발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는 건 역사학의 범위겠지만, 독자도 이에 관해 작은 힌트 정도는 알아야 되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 그것도 틀리지 않을 듯하다. 그리하여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집권당에 의한 비상대권법이 처음부터 정당하지 않았다는 인식을 독자에게 주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하는 점. 혹시 알아? 누백년, 누천년간 아일랜드를 식민 지배했던 잉글랜드가 또다시 군사적 도발을 획책하고 있었는지. 대처 수상도 아르헨티나의 작은 섬 포클랜드 때문에 전쟁을 벌였던 적이 있으니까 얼마든지 가능한 시나리오다. 영국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라다. 신사의 나라? 웃기고 자빠졌네.


  하여간 작품 속에서 정부군은 나쁜 너네편이고 반군은 착한 우리편이다. 착하기는 하지만 내전 기간이니 정부군만큼 거칠다. 어쩔 수 없다. 생명이 왔다갔다 하는 판에 이 사정, 저 사정 다 봐줄 수는 없는 거니까. 이런 의미에서 비슷하게 거칠다는 뜻이다.

  주인공은 아일리시 스택 여사. 분자세포 생물학 박사로 연구소의 중요부분 임원으로 근무하다가 작품 중간쯤 가면 정부에서 점지한 낙하산에 의하여 해고당한다. 이이한테는 네 아이가 있다. 첫째가 열여섯 살이었다가 열일곱 살이 되는 아들 마크. 둘째가 딸 몰리. 셋째는 열두 살 사내아이 베일리. 막내는 늦둥이 아들로 이제 이가 나기 시작하는 벤. 남편 래리는 아일랜드 교원노조 부위원장이다. 학교 교사로 일하다가 이제 교원노조 전임으로 옮겨 교사 업무는 하지 않고 노조일에 전념하고 있다. 당연히 진보진영에 속해서 헌법에 명시된 국민의 기본권을 무시하는 비상대권법에 반대하여 며칠 후 교원을 비롯한 대중 행진 시위를 계획하고 있다. 그러니까 소위 비상대권법이 발효되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소설의 앞부분은 아일랜드 또는 유럽의 한 나라에서 극히 비정상적인 정치적 집단이 괴물 같은 비상법을 선포하고, 이에 따른 후속조치를 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읽힌다. 아직 그렇게 늦은 밤은 아닐 때, 남편 래리는 물론이고 아직 맏이 마크도 데이트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지 않은 시간에 현관을 두드리는 두 남자가 등장한다. 가르다 치안국(Garda Siochana: GNSB)의 깡마르고 팔팔한 젊은 형사 버크와 나이들고 뚱뚱한 스탬프. 이들이 남편이 집에 있느냐, 언제 들어오느냐를 묻고, 없다, 언제 들어올지 모른다는 답을 듣고는 명함 한 장을 건네면서 남편이 집에 들어오면 전화 부탁한다는 말을 전한 후 점잖게 돌아간다. 래리가 돌아와 이 말을 전했고, 마크도 돌아와, 모든 가족이 잠이 들었는데, 아무래도 불안한 래리는 조용히 혼자 일어나 옷을 입고 경찰서로 자진 출두해 스탬프 형사를 찾아간다. 이들은 구면. 래리는 더블린대학 축구팀 미드필더였고, 스탬프는 게일스대학 축구팀이었는데 이 해에 게일스가 더블린을 무참하게 깨버렸단다.

  스탬프는 말한다. 스택의 행동은 국가에 불화와 동요를 심는 것으로 이 일을 하는 사람은 국익에 반하는 단체의 요원이거나, 무슨 짓인지도 모르고 행동하는 사람일 터인데, 어느 경우든 결국은 국가의 적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라고. 당시의 양심을 잘 살펴보고 지금이 그런 경우가 아닌지 확인하기를 강력히 권고한다고. 이 정도면 세계 2위의 GDP를 자랑하는 부유한 나라의 형사 비슷하다. 그런데 여기 까지다.

  래리 스택은 집에 돌아왔고, 숱한 노조원의 연속적인 행방불명에도 불구하고 교원노조의 행진 시위를 추진하면서 점점 초췌해지고 황폐되어간다. 사방에서 옥죄고 들어오기 시작하는 눈길과 협박. 그럼에도 래리와 교원노조는 일정에 맞추어 정말로 행진 시위를 강행하고, 아일랜드 경찰과 정부군은 기마대, 그리고 최루탄을 쏘아가며 이들을 폭력진압한다. 이 과정에서 래리는 당국에 체포되고 이후 작품 속에서 종적이 사라진다. 주인공이자 아이들의 엄마인 아일리시 스택은 그래도 남편이 열악하기는 하지만 특정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것이라 마음을 다스리면서 자기가 당장 맡아야 할 큰 의무, 네 아이들을 탈 없이, 무사하게 간수하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게다가 치매가 어느 정도 진행된 것처럼 보이는 친정 아버지도 돌봐야 하고.

  이후 비상대권법 하의 아일랜드는 유럽이 아니라 라틴 아메리카, 그것도 1970년대 이전의 라틴 아메리카 독재자들 치하와 비슷한 분위기로 점점 악화된다. 이를 대서양 넘어 스택 가족보다 더 상세하게 관찰하고 있는 이가 있으니 ‘아냐’라는 이름의 아일리시 스택 여사의 동생. 동생은 캐나다에서 치매가 있는 늙은 아버지와 언니 가족을 아일랜드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기꺼이 거금을 쓰기로 결심한다. 즉, 앞에서 말한 시리아 내전 당시의 난민 문제를 거론하기에 이른다. 내전 측면에서는 시리아의 예를 따르고, 비상대권법으로 상징하는 독재는 라틴 아메리카의 예를 따른 작품이라고 봐야 하겠다.

  이 정도면 스토리가 어떻게 진행될 지는 다 짐작하실 수 있을 터.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열여섯 살인 맏아들 마크는 체제에 반대하는 래리 스택의 아들이라는 죄 때문으로 보이는데, 의학이나 법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영민한 고등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열일곱 살 먹는 생일 다음날 아일랜드 정부군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떨어졌고, 엄마는 이모의 도움으로 북아일랜드로 탈출하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 래리 스택의 아들로 그럴 수 없어서, 콱 반군에 가입해버린다. 그리고 역시 조금 시간이 지나 작품에서 사라지지만 죽은 것 같지는 않다. 당연히 마지막 장면은 가르쳐드릴 수 없다. 하긴 열린 결말이라 어떻게 끝나는 지는 독자가 상상하기 따름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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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1-24 0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독후감:
월요일. F. 스콧 피츠제럴드, 《바질 이야기》
화요일. 다와다 요코, 《헌등사》
목요일. 올가 토카르추크, 《기묘한 이야기들》
금요일. 레오 페루츠, <9시에서 9시 사이>

stella.K 2025-01-2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과 겹치는 부분이 있네요. 무슨 코미디도 아니고 정말이지 요즘처럼 나라꼴 잘 돌아간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때도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디까지 바닥을 봐야하나 싶은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뭔가의 통찰력을 얻게해 줄런지 암튼 관심이가네요.

Falstaff 2025-01-24 16:03   좋아요 0 | URL
아휴, 답글 썼다가 지웠습니다. 저는 정치적으로 합죽이가 되려고 합니다. ㅋㅋㅋ 합!!

stella.K 2025-01-24 16:15   좋아요 0 | URL
ㅎㅎ 아, 왜요? 이럴 때 하시는 거지 또 언제하겠습니까? 아쉬운데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