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홀 1 - 맨부커상,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 수상작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51
힐러리 맨틀 지음, 강아름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영국의 크롬웰, 하면 나는 청교도 혁명 시절에 패권을 쥔 올리버 크롬웰을 연상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왕을 겸했던 스튜어트 왕가 찰스 1세의 목을 뎅겅 잘라버리고 스스로 최고 권력자인 호국경의 자리에 앉았던 난세의 영웅. <울프홀>의 주인공은 이 올리버 크롬웰의 먼 친척이라고 하는데 말이 먼 친척이지 110년 이상 나이차가 나 올리버의 증조부나 고조부 뻘인 토머스 크롬웰 제1대 에식스 백작이다. 성이 같다고 직계 후손은 아니다. 위키피디아는 올리버가 토마스의 누나 캐서린 크롬웰의 외증손자라고 쓰여 있다. 근데 성이 같다고? 그렇다. 착한 누나 캐서린이 여러모로 좋은 남자인 모건 윌리엄스와 결혼해 리처드를 낳았는데, 리처드가 소년시절일 때 당시 잉글랜드를 휩쓸던 역병에 걸려 남편이 죽는 바람에 조카를 토마스 크롬웰이 거두어 키운다. 리처드는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깨닫는 총명한 소년이었다가 재기가 번득이는 청년으로 성장하며 외삼촌 토머스 크롬웰을 거의 최상급 수준으로 보필한다. 그러던 하루 리처드 윌리엄스가 외삼촌에게 다가와, 이왕 외삼촌이 자식처럼 키워주는데 이름을 윌리엄스에서 크롬웰로 바꾸겠다고 제의했고, 토머스 크롬웰이 이를 수락하여 리처드 크롬웰이라 불리기 시작한다. 애초 가정폭력을 최고의 취미생활로 여기던 대장장이 아버지 월터 크롬웰 선생한테 맞아 죽기 일보직전에 매형 모건 윌리엄스가 뒷돈을 대주어 대륙으로 도망한 토머스 크롬웰과 달리 올리버의 진짜 혈통인 윌리엄스 가문은 귀족 끄트머리 떨거지였다. 어떻게 알았냐고? 책 속에 다 나온다.


  대장장이 아버지 월터에게 심각한 수준으로 폭행을 당한 소년 크롬웰이 매형의 도움으로 대륙에 건너가 한 일은 프랑스 군대에 입대하는 것.

  잠깐. 이 작품은 소설이다. 토마스의 아버지 월터 크롬웰이 귀족이나 젠틀맨이 아니었던 건 맞지만 할아버지가 양모가공업을 하고 윔블던 지역 저택에 살며 규모는 확실하지 않으나 지주였던 걸로 보아 소설처럼 막 나가는 종자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위키피디아는 월터 크롬웰을 “성공한 상인”이라고 설명한다. 물론 16세기의 야만스러운 잉글랜드 사람 답게 죽을 죄만 아니라면 법을 위반하는 것을 꺼려하지는 않았지만. 반면에 소년 토머스는 책에 나오는 대로 어린 싸움꾼이었던 건 확실한 듯하다. 소년 크롬웰은 (책에서처럼 아버지한테 맞아 죽기 직전에 도망한 것이 아니라) 심하게 싸움을 했던지 하여간 처벌을 피하기 위해 영불해협을 건너 플랑드르에 도착, 프랑스군에 입대한다. 처음엔 전투병과에 복무하다가 보급병으로 옮겨 최초로 회계 장부의 세계로 접어들 계기를 잡는다.

  프랑스군에서 제대하고 이탈리아로 넘어간 크롬웰은 16세기에 만발한 르네상스 문화를 직접 몸으로 만끽하면서 인본주의에 대하여 개안하는 한편, 피렌체의 은행가 프레스코발디 가문에서 본격적으로 금융업과 함께 “인류가 생산한 가장 중요한 과학 가운데 하나인 복식부기”를 배운다. 작품 속에서 크롬웰은 이탈리아 시절에 회계 장부, 금융, 그리고 이에 못지않게 평생의 자산이 될 남다른 기억력을 키우는 법을 배웠다고 설명한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다양한 유럽의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계기. 언어는 세월이 가면서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부터 5백년 전의 유럽엔 각양각색의 언어가 있었고, 영국만 해도 웨일즈 사람이 하는 말을 잉글랜드 사람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으며,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스페인의 16세기 카스티아, 발렌시아, 바스크 등등의 언어 등을 대강이라도 이해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다. 하여간 작중 크롬웰은 지금의 영국, 스페인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프랑스, 신성로마제국 언어를 (내 수준에는) 통달하다시피 했으니 언어능력도 싸움실력 만큼 대단했던 모양이다.

  훗날 헨리8세의 최측근으로 왕의 첫번째 부인 아라곤의 캐서린과 혼인무효 소송을 만들어내고, 앤 불린을 왕비의 자리에 올렸으며, 의회에서 수장령을 승인받아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을 완수할 때까지 잉글랜드의 역사를 토머스 크롬웰의 시각으로 쓴 것이 이 책 <울프홀>이다.


  튜더 왕조의 헨리8세가 아직 클레멘스 교황이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은 상태에서 앤 불린과 결혼식을 올린 1533년의 잉글랜드는, 우리나라로 치면 조선 중종 말기였는데 조선과 달리 왕과 신하들의 행적을 꼼꼼하게 기록하지 않아 그랬는지 우리의 왕조실록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빈약한 자료만 있어 그만큼 허구로 채울 공간이 넉넉했을 수도 있다. 이건 내 생각이 아니라 이 작품을 쓴 힐러리 맨틀이 <울프홀>의 다음 작품인 <시체들을 끌어내라> 후기에서 직접 한 말이다. 그만큼 맨틀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상상력을 자유롭게, 물론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았겠지만, 펼치고 있고 그런 자유가 눈에 띄기도 한다. 독자는 상관하지 않는다. 재미있고 큰 줄거리가 사실과 합당하기만 하면.

  영국의 역사 가운데 헨리8세의 자유연애만큼 독자의 흥미를 끄는 것도 별로 없다. 이건 우리한테만 그런 것도 아니다. 세상 공통이다. 영국이 제공한 가장 유명한 재미거리 또는 스캔들이 바로 헨리8세의 캐서린과의 결혼무효소송, 동시에 임신 6개월 상태에서 치룬 앤 불린과의 결혼식, 그리고 “천일의 앤”, 맞지? “내 목이 가늘어서 힘들지 않을 거야.” 복면을 쓴 망나니를 보며 날리는 인생 마지막 멘트. 올드 팬들은 아마 거의 다 기억하실 걸?

  자신의 재혼을 위해 종교개혁을 해버리는 헨리8세. 왕 옆에 토머스 크롬웰이 없었다면 이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정신적으로 사람의 영혼을 지배하고, 경제적으로 청빈을 내세우면서도 막대한 소유권을 향유하고, 정치적으로 입법권과 파문권으로 협박하는 가톨릭이 청소년시절부터 르네상스 정신에 입각해 생활했던 크롬웰은 지극히 마땅하지 않았던 거였다. 여기에 이제 부패할 대로 부패한 성직자들의 축재와 성적 문란과 이에 따른 사생아 문제 같은 다양한 부작용 등등. 이제 가톨릭은 개혁을 당하지 않을 수 없는 단계까지 와 있던 상태였다. 넓지 않은 잉글랜드 여기저기에 난립한 수도원과 부속 토지. 아메리카 경영으로 금과 은을 수척의 배로 실어오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날이 가난해지는 잉글랜드 왕실. 크롬웰은 가뿐하게 철가면을 쓰고 대대적으로 수도원을 정리하여 귀속재산을 왕의 금고에 쓸어 담을 수 있었던 것. 지금은 당연하게 생각할 수 있겠으나 16세기 잉글랜드에서는 크롬웰 말고 이런 격한 변혁을 가능하게 할 인물은 없었다.

  3부작 가운데 1부 격인 <울프홀>은 종교개혁을 완수하고, (주로 교황청을 일컫는 바) 국외의 법령이 아니라 오직 잉글랜드의 법령에 따라 재판하며, 잉글랜드의 왕이 잉글랜드 종교의 수장이 된다는 수장령을 반포하면서, 끝까지 이 법에 반대하는 존 피셔와 토머스 모어를 참수하고 작품은 2부로 넘어간다.


  그러면, 제목 “울프홀”은 무엇일까? 성castle 또는 저택의 이름이다. 토마스 크롬웰이 평소 존경했던 토머스 모어의 참수형을 참관하고, 모어의 딸 매그에게 런던교에 전시된 아버지의 머리를 거두어 장사 지낼 수 있게 해주라는 (실제로 대단히 특별한 혜택인) 명령을 내린 후, 왕비 앤과 함께 전국 순시에 나선 헨리8세 무리에 뒤늦게 합류하기 위하여 향한 곳. 존 시모어 경의 저택이다.

  존 시모어 경은 아들-아들-딸-딸을 두었는데, 차례로 에드워드, 토머스, 제인, 리지(엘리자베스). 이 양반은 늙은이가 주책이 없어서 장남 에드워드의 아내와 수년에 걸쳐 불륜을 저지르다 아들한테 현장에서 발각된 이력이 있다. 에드워드는 열을 받아 자신의 두 아들이 진짜 자기 아들인지 아니면 동생인지 알 길이 없어 자기 호적에서 파내 사생아로 만든 다음 아내를 수도원으로 보냈던가, 친정으로 보냈던가 하여간 그랬다. 그럼에도 존 경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아들 근처에 어른거렸다가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몇 년 동안 쉬지 않고 장남 곁에서 참견을 하는 바람에 나중엔 구박을 조금 받기는 해도 아비 대접을 받으며 살고 있었다. 딸 제인은 궁에 들어가 앤 왕비의 시녀를 하고 있다가 휴직원을 내고 울프홀에 내려와 있는 상태. 궁에 있을 당시 크롬웰이 (자기 짝이 아닌) 참한 아가씨로 눈 여겨 보고 있었다가, 아니나 다를까 앤이 천일 만에 목이 날아간 다음에 헨리8세의 세번째 아내가 되어 아들이자 후임 왕인 에드워드6세를 낳고 산후합병증으로 열흘만에 세상을 등질 예정이다.

  그러니까 “울프홀”은 1부 <울프홀>을 위한 제목이라기보다 2부 <시체들을 끌어내라>를 예견하는 제목이라고 볼 수 있을 터. 앤 사후 헨리8세의 후계를 출산하는 제인의 집을 향해 가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가장 큰 곤란함은, 나는 종교에도, 영국 왕의 바람기에도 전혀 흥미가 없는 인종이기 때문이었다. 종교(바티칸)과 국가, 왕과 교황, 사제와 정치인을 둘러싼 진흙 속 개싸움을 보는 기분이랄까. 만일 영국인이었더라면 훨씬 더 흥미진진할 수 있었겠다. 큰 틀은 고등학교 시절 세계사 시간에 배운 것, 틈틈이 읽은 역사책에 나온 것들, 기타 등등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 된 내용만 가지고도 충분하다. 하물며 그것을 둘러싼 음모와 스릴, 공포, 서스펜스 그리고 하다못해 그럴 듯한 베드씬도 없는 책. 영국 왕의 바람기와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는 관심 없다.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뭐, 어쨌는데?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01-23 1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5-01-23 15: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5-01-27 10: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셰익스피어의 사극 읽으면서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

Falstaff 2025-01-27 11:20   좋아요 1 | URL
^^;; 전 셰익스피어 <헨리 8세>를 읽어보지 않아서... 뭐라 드릴 말씀이...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