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예쁜 종아리 문학과지성 시인선 575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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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열 달 만에 다시 황인숙을 읽었다. 사실 이 황인숙이 혹시 그 황인숙인가 싶었지만 그렇지 않겠지, 그렇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서가에서 뽑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뿔싸, 처음엔 잘 나가다가 중간부터, 아오, 다시 유기 들고양이 밥 주는 괭이 엄마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괭이 밥 주지 말라는 동네 늙은 남자, 난닝구만 입은 영감탱이한테 이 루저, 루저, 루저, 루저야! 이런 욕밖에 할 줄 모르는 대졸 루저 시인. 자치 시에서도 유기동물한테 밥 주지 말라잖아. 그럼 주지 말아야지 뭘 잘났다고 없는 살림에 비싼 고양이 사료 사다가 평균 생존기간이 3년에 불과한 ‘야생’ 영역동물을 먹여 살리느냐고. 58년 개띠 아줌마니까 지금 예순여섯? 신춘문예 당선 시의 제목부터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였으니 시인의 고양이 사랑이야 인정하겠지만 집에서 애완으로 키우며 집사노릇 하는 거야 뭐라 하지도 않고 오히려 권장할 만하겠지만 신경 예민한 사람한테는 발정나서 새벽부터 울부짖는 야생고양이 소리에 새벽잠 설치는 인간들도 많을 터, 밥 주는 종족과 새벽잠 없는 늙은이들의 갈등은 고양이 밥 주는 순간부터 이미 담보되었던 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줄창 시만 읽으면 되긴 되는데, 시를 읽을 때도 그놈의 고양이 타령을 연속으로 읽게 되니 그것도 맛이 안 나긴 한다. 독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앞으로 이 양반의 시를 읽지 않는 거 하나밖에 없는데, 그러기에는 또 고양이 안 나오는 작품 가운데 괜찮은 것이 섞여 있다는 말이지. 이 시집에서도 표제로 쓴 시를 한 번 읽어보자.



  내 삶의 예쁜 종아리



  오르막길이

  배가 더 나오고

  무릎관절에도 나쁘고

  발목이 더 굵어지고 종아리가 미워지면

  얼마나 더 싫을까

  나는 얼마나 더 힘들까


  내가 사는 동네에는 오르막길이 많네

  게다가 지름길은 꼭 오르막이지

  마치 내 삶처럼    (전문 p.5)



  시인은 여전히 남산 남동쪽 후암동 근방 언덕배기에 사는 모양이다. 그래 집에 가려면 오르막길을 허청허청 걸어야 하니 이게 나이 들어가면서 쉽지 않다. 이왕 오르니 위안을 해본다. 매일 이 길을 오르면 배도 들어가고, 걷는 게 무릎관절에 좋다고 하고, 발목도 가늘어지고 종아리도 통통해지겠지, 그럼 얼마나 좋을까? 하는 위안. 2연으로 옮겨 읽으면, 많고 많은 오르막 중에서 지름길을 꼭 오르막이다. ‘지름길’이 갖는 중의성. 더 힘들어야 몸을 쉴 수 있는 집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다. 이름하여? 중딩 때 배우셨지? 유클리드 물리학의 운동량 보존의 법칙. 더 고생해야 더 빨리 도착한다. 근데 뭐가? 당연히 너와 나의 삶이. 그래서 누구나 다 마찬가지인 마지막 행 “마치 내 삶처럼”은 차라리 쓰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마치 내가 뭐라도 아는 것처럼 한 마디 하고 싶어진다. 이런 기분이 아마추어의 큰 병이다. 그로 인해 간혹 화가 되기도 하는 병.

  일찍이 지난 번에 읽은 시집 《자명한 산책》에서 황인숙이 단호하게 휘두른 날선 칼이 떠오른다.



  빠개질 것 같은 머리에 대해 치사함에 대해

  웃겻고, 웃기고, 웃길 몰골에 대해

  차라리 강에 가서 말하라

  당신이 직접

  강에 가서 말하란 말이다


  강가에서는 우리

  눈도 마주치지 말자.  (자명한 산책, <강> 부분)



  하긴 뭐 두 시집 사이에 19년 세월이 있으니 어찌 사람이 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황인숙이 예순네 살에 낸 이번 시집에는 나이든 시인들의 시에서 자주 나타나는 자신의 주위의 사람들 이야기도 종종 나온다. 이중에 재미있는 시도 있다. 친구도 아니고, 친구의 아내도 아니다. 친구하고 이혼해 다른 남자와 사는 친구의 전처를 생각하는 시인.



  친구의 엑스와이프



  친구의 엑스와이프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것도 무척이나

  나한테나 잘해!

  친구는 입을 비죽거리겠지만

  너는 아무 때나 흔해터지게 볼 수 있고,

  네 엑스와이프는 이제

  만나기 힘들어졌지

  너 때문에!

  헤헤, 특유의 애교스러운 웃음소리 귀에 선한데

  잘 웃는데 어딘지 슬퍼 보인 얼굴 눈에 선한데

  친구 앞에선 이름도 꺼낼 수 없다

  나를 엑스친구 만들까봐서


  친구가 사랑했던 친구의 엑스와이프

  다른 사람 아내 된 지 좀 된

  친구의 엑스와이프   (전문 p.14)



  시를 다 읽은 순간 시 감상도 바로 끝나서 깔끔하긴 한데, 좀 그렇다. 그냥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가게 앞 파라솔에 맥주나 무알코올 음료를 올려놓고 그저 하는 이야기를 그대로 적어놓은 듯하다. 생활시가 대개 이러하다. 생활시로 독자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는 함민복처럼 금호동 언덕배기에 오랜만에 올라와 오수를 빨아들이는 똥차, 그 옆을 지나가는 막 목욕탕에서 나온 처녀같이 절묘한 비유가 없이는 대개 그렇다. 다음 페이지에 실린 생활시 <오늘 할 일>도 마찬가지다.



  바람, 파람, 휘파람

  변기 뚜껑 내리고 걸터앉아 멍때리다가

  문득 휘파람 불어본다

  내친김에 곡조를 붙여볼까

  잘 될까 몰라

  심호흡한 뒤 입술에 힘주고

  나오느니 웬

  봄처녀 제 오시네

  머리카락 엉켜서 바짝 마른

  욕실 바닥 내려다보며

  새 풀옷을 입으셨네

  휘와 바람이 따로 놀고

  숨 가쁘다

  휘파람, 파람, 바람

  청소부터 하자   (전문 p.15)



  좀 약하지? 애초에 화장실에 볼 일 보러 온 거 아니라 봄맞이 대청소라도 시작했을 지 모르겠다. 그래 처음부터 변기 뚜껑을 내리고 걸터앉았지. 근데 힘도 좀 딸리고 그래서 하기가 싫은 거다. 요샌 생각도 잘 되지 않아 어떻게 앉은 김에 멍때렸다. 며칠 전에 읽은 볼라뇨의 <부적>에 나오는 주인공 우루과이 시인 아욱실리오 라쿠투레가 번쩍 떠오르는 모습이다. 그래 휘파람도 불어보고, 곡조를 넣어 시인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노래 가운데 <봄처녀>를 선택했지만 그것도 노래라고 숨이 딸리는 거다. 시새푸새해져 바닥을 내려다보니 당신의 화장실하고 거의 틀림없이 바짝 마른 머리카락이 새 풀옷을 입을 것처럼 엉겨있다. 뭐 많이야 엉겨 있겠어? 그렇게 보인다는 것이지. 이렇게 시간을 보내고나서야 에잇 청소부터 하자, 하고 마음 먹는 그림. 사소하고 사소한.

  이제 육십이 넘어 새로 취직할 수 있는 가망은 푸시시 날아가버렸을 시인. 자칭 백수는 백수인데, 심한 백수라서 제목을 <빈사의 백수>로 달았다. “빈사의 백조”는 1905년 미하일 포긴이 만든 짧은 독무. 이 작품의 제목만 가져왔다. 근데 분위기는 시원하다.



  남산 위에 저 서울타워

  파르라니 빛나고나

  바람 많이 불어서

  산꼭대기 공기 맑을 테다


  아, 왜 이렇게 답답하지

  맑고 푸른 저 빛의 빨대를

  확 휘어 당겨

  빨아 들이켜고 싶고나


  오늘 밤 훠이훠이

  산에 올라가볼까

  그런다고 내 속이

  뻥 뜷릴까    (전문 p.16)



  광경은 시원하건만 시인, 백수의 가슴 속은 꽉 막혔다. 그래서 공기 맑을 것이 틀림없는 산 위에나 올라볼까, 생각하는 시인 또는 백수. 여기서도 아마추어 독자는 또 마지막 두 행에 시비를 건다. 꼭 “그런다고 내 속이 뻥 뚤릴까” 즉 “그래도 내 속은 꽉 막혀 있기만 하다.”라고 말하는 거 같다. 


  이 고양이 엄마는 고양이들이 욕을 얻어먹는 것도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검정 비닐봉투를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고양이가 싸질러놓은 분변을 치우기도 한다. 나나 당신한테 드럽지 고양이 엄마들은 조금도 더럽다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 한밤에 동네 한바퀴 돌면 검정 비닐봉투에 가득 차고, 그걸 버리는 것도 일인데, 날마다 종량제 봉투에 담아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장소에 버리기도 뭣하다. 시인을 자세히 보면 야밤에 CCTV도 켜놓고, 지금 작동중이라는 엄포성 프라스틱 경고문도 있지만 여전히 불법으로 쓰레기가 투척되어 있는 모습과 주민들의 이런 행위를 옹호하는 것 같다. 저 뒤에 가면 자기도 여기다 고양이 똥을 슬그머니 투척하고는 했으니까 당연하겠지. 잘 한다. 잘 하는 짓이다.



  그 동네 어느 심야



  고양이만 지나가도 저러더니

  택시만 지나가도 저러더니

  눈이 와도 저러는구나

  한국어로 영어로

  CCTV 작동 중이라고

  너는 가비지라고

  페널티라고

  종량제 봉투 하나 없이

  검정 봉투 노랑 봉투 찢어진 봉투

  수북수북 쌓인 제 발치 째려보면서

  전봇대 여인 낭랑한 목소리로 따박따박

  아랑곳없이 눈은 투척되고

  성능도 좋아, 여인을 지치지 않고 경고하고


  하늘이 터진 듯 눈 쏟아져 내렸다

  언젠가 눈은 그치겠지만

  그 동네 사람들은 그치지 않지

  주민 승!   (전문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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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5-01-09 05: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렇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신 거 맞아요? 엑스시인 될까봐서를 부제로 ㅋㅋ 저도 읽은 시집들인데 생활시가 그랬었나 기억이 안나요. 저에게는 어땠나 들춰보려고요. 역시 재미있게 잘 읽고 갑니다아

Falstaff 2025-01-09 06:44   좋아요 1 | URL
예. 좀 안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안 그러는 게 더 자연스러운 거 같아서요.
괭이 시만 아니면 이이의 시가 좋은데, 아휴, 어쨌든 자기 좋은 시만 쓰면 그게 장땡이지요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