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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89
이반 세르게예비치 투르게네프 지음, 이항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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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투르게네프는 러시아 중부 오룔 지방의 귀족 지주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부르주아다. 얼핏 귀족에다 지주라면 무조건 부르주아일 것이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러시아에서는 천만의 말씀이다. 하도 땅이 큰 나라라서 지주도 지주 나름이고, 땅도 땅 나름이다. 투르게네프 집안도 재산의 대부분이 아빠 집안에서 내려 받은 게 아니라 엄마가 당당한 여지주로 넓고 넓은 소작지를 적절하게 분배해 그나마 성실하고 양심적인 관리인들을 배치해 부를 유지하고 있었던 거다. 투르게네프도 작품 속에 러시아에서 지주 해먹기의 어려움을 여러 번 호소한 적이 있다.
투르게네프는 귀족 부르주아의 자제답게 모스크바대학, 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을 거쳐 베를린 대학에 유학한 후 서사시를 발표하는 등 문학활동을 하다가 내무성 공무원으로 들어가 2년 만에 때려치웠다. 전업작가 한다는 핑계로. 1852년에 당국에 심각하지는 않은 이유로 체포되어 61년까지 약 10년 간 고향에 연금당해 이 시절에 쓴 짧은 소설을 모은 것이 《어느 사냥꾼의 수기》다. 투르게네프 가운데 제일 낫다. 무식한 내가 읽기에 그렇다는 말씀.
연금생활, 얼핏 읽으면 나라에서 연금받아 생활하는 거 같은데, 이럴 때 한자어를 썼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軟禁 강도가 가벼운 감금생활이 끝나자마자 우리의 이반 투르게네프는 유감없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서유럽으로 튀어 나머지 생애 거의 대부분을 보내며, 작품활동도 활발하게 한다. 물론 파리, 베를린, 이 책의 주요 무대로 나오는 바덴바덴 같은 곳에서 아빠가 오룔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하고, 물론 연애도 하고, 유명인사도 사귀면서. 그러나 투르게네프의 머리 속엔 언제나 Green green grass of home, 자기가 무슨 톰 존스나 되는 듯이 고향의 푸른 잔디가 삼삼했으니 당연히 러시아의 자연 풍광과 기억이 많이 등장한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일제 강점기를 경험한 노인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질을 이야기할 때 제일 지긋지긋했던 것이 소위 엽전론이었다. 해방 후 지식이나 자본적 기초가 완벽하게 없던 시절, 하는 사업은 당연히 완벽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고, 그걸 일제가 충분한 지식과 자본으로 ‘훌륭하게’ 완성했던 기억에만 싸여, “하여튼 엽전이 하는 건 어쩔 수 없어.”나 “저러니 엽전, 엽전 하는 거야.” 같이 비아냥거리던 거, 나는 목격했다. 이 비슷한 걸 1990년대에도 써먹은 적이 있다. 기억하시려나? 당시 자민련 총재하던 김종필(편히 쉬시라)의 “충청도 핫바지론.” 투르게네프도 조국 러시아 역시 서둘러 서유럽의 과학, 사상, 철학, 체제, 양식, 건축, 생활 등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싶어 얼마나 속을 태우는지.
이 책의 제목은 팜파탈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리나 파블로브나 라트미로바와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리트비노프 사이의 연애에 중점을 두지 않고 러시아 사람 모두, 러시아 전부를 잠시 올랐다가 흩어지고 마는 “연기”라고 한 것에 주목했다. 투르게네프는 한 남자를 두 번이나 골로 가게 만드는 일종의 악녀 이리나 이야기에 맞먹거나 더 중요한 무게로 러시아의 서구화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모든 것이 급히 어딘가로 서둘러 가고 있지만, 모든 것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풍향이 바뀌면 모든 것은 반대쪽으로 몰려간다. 그리고 거기에서 똑같이 지칠 줄 모르는, 요란하고 불필요한 유희가 다시 시작된다. 최근 몇 년 동안 자기 눈앞에서 시끄럽고 떠들썩하게 일어났던 많은 일이 떠올랐다…… ‘연기다.’ 그는 속삭였다.” (p.259)
사랑 이야기만큼 다양하게 독자를 매료시키는 것이 또 있을까? 이중에서도 또 불륜만큼 궁긍증을 유발시키는 것도 없을 듯. 투르게네프는 바로 이 불륜을 바늘 끝으로 톡 찌르고 있다.
주인공 리트비노프 입장에서 이 불행한 사랑은 1862년 8월 10일, 독일의 유명 휴양 온천도시 바덴바덴에서 시작한다. 바덴바덴에 와서 온천과 도박을 즐길 수 있는 특출난 예술 애호가 X백작을 비롯한 소수의 러시아 명문 귀족 과 최신 유행을 좇는 부르주아, 장군들을 일컫는 “우리 사회의 정화精華”가 모인 ‘교제의 집’ 도박장이 첫 무대이다. 화려하기 짝이 없는 사회의 정화 다음 계급으로 밤바예프, 호인이지만 실속 없는 로스티슬라프, 구바료프, 보르실로프 등 그저 그런 지주 수준의 계급이 있어서 주머니 사정이 좀 괜찮은 리트비노프도 이 ‘약간 처지는’ 그룹에 속한다.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리트비노프는 상인 집안 출신의 성실한 퇴역관리의 아들이다. 기숙여학교를 나온 어머니는 선량하고 열광적이지만 성질도 있다는데, 남편보다 스무 살이나 적어 만족시키지 못한 리비도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성질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를 재교육시키기 시작했고, 그 결과 미하일은 관리생활을 때려 치우고 큰 영지를 거느리는 지주로 변신했다. 이 과정에서 원래 강하고 견디기 힘든 성격이 어느새 온순하게 바뀌었는데 암만해도 원래 이 영지가 어머니 소유였으며, 생존하기 위해 어머니 자신이 강골의 여지주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세월이 흘러 아들이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하자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마쳤다는 듯이 어머니는 폐결핵으로 세상을 접고 말았다. 리트비노프는 이 일을 계기로 대학을 중퇴하고 영지로 내려와 시골 생활을 하고 있었다.
10년 전인 1850년대초. 한 시절 눈부신 광휘를 날리던 대 귀족 오시닌 공작 가문이 급격하게 몰락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류리크의 후예로 순수한 러시아 혈통을 자랑했으나 이상하게 폭삭 무너져 벽지로 추방당했다가 훗날 복권 됐지만 공작 직위의 복권을 말하는 것이지 날린 재물까지 회복시켜준 것은 아니었다. 이때 리트비노프의 아버지가 이들에게 작은 도움을 주었으며, 마침 모스크바에서 학교를 다니던 아들 역시 수시로 공작 댁을 방문했는데 척하면 척이듯, 맏딸 이리나한테 한 눈에 반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천상의 외모를 지닌 아름다운 이리나. 하지만 하느님은 몽땅 다 주는 양반이 아니어서 이리나 파블로브나는 변덕스럽고 야심만만했으며 무모하고 오만해 자기 속을 주지 않는 아이였다. 오시닌 공작이 보기에도 이리나의 빼어난 외모가 자기 집안을 곤경에서 구해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니 당연히 거의 무제한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을 터. 이 아가씨의 눈에 한갓 시골 영지의 지주 아들이 눈에 차겠느냐고? 이리나는 두 달 동안 리트비노프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으로 괴롭히다가 마치 뇌우가 몰려오듯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그게 만일 사랑이라면 말이지만.
이미 스무 살을 넘긴 리트비노프는 당장 청혼을 한다. 반면에 이리나는 둘 다 너무 젊으니 남의 눈치도 볼 겸, 아직 청혼을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 속 없는 애인은 요청을 받아들인다. 공작 내외가 보기에 사위짜리가 돈은 좀 있는 집안 같아도 아무래도 가문이 좀 껄쩍지근하다. 지주가 뭐야, 지주가. 적어도 백작, 남작은 되어야지. 이때 황제가 오랜만에 모스크바를 방문하면서 귀족을 대상으로 대 무도회를 개최한다고 초청장을 보내왔다. 공작은 없는 살림에 이리나에게 좋은 무도복을 맞춰 입히고 대 무도회에 ‘귀족의 의무로’ 참여하는데 어라, 이리나는 리트비노프에게 무도회에 가지 말 것을 부탁한다. 말이 부탁이지 강요 비슷하다. 그래서 그렇게 했고, 이리나는 자기 스스로 미리 짐작했듯이 대 무도회의 가장 빛나는 별로 반짝였으며, 한 순간에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왕가, 귀족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어, 사흘만에 리트비노프를 퇴짜놓고 페테르부르크행 트로이카에 오른다.
그러나 1862년의 바덴바덴에서 리트비노프가 기다리고 있던 여인은 타티아나 페트로브나 셰스토바. 6촌 여동생이자 약혼녀다. 수다장이 고모 카피톨리나 마르코브나와 함께 드레스덴에서 살고 있으며 3일 전에 도착한 바덴바덴에서 리트비노프와 좋은 시간을 보내려 트렁크를 꾸리고 있는 중이다. 착하고 수줍으며 리트비노프의 러시아 영지에서 겨우 2백 베르스타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지주 집안의 외동딸이다. 겨우 2백 베르스타? 땅이 크면 그깟 220km 정도면 이웃이다, 이웃. 마차 타고 열라 가도 도중에 강도떼만 안 만나면 3일밖에 안 걸리니까.
8월 10일 앞서 이야기한 비슷한 계급의 남자들과 즐겁지만 유쾌하지 않은 잡담을 늘어 놓고 있던 리트비노프는 검은 베일이 달린 챙 넓은 모자를 쓴 키가 크고 날씬한 부인이 계단을 오르다가 흘낏 그를 발견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19세기에는 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앞에서 실컷 설레발을 쳐놓았으니 이 날씬한 부인이 누구인지 다들 눈치 채셨지? 맞다, 그 여자.
이리나가 가는 곳에는 그림자처럼 한 남자를 볼 수 있으니 퇴직 7등 문관에 불과한 신분의 포투긴. 이 양반이 중요한 조연인 것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러시아의 서구화, 러시아 엽전론 등을 거의 모두 포투긴의 입을 통해 발언하기 때문이다. 러시아를 열렬히 사랑하면서 열렬히 증오하는 서구주의자. 정부청사에서 20년간 근무했다가 이리나한테 꼴딱 반해 스스로 망가져버린 남자. 대강 감이 잡히시지?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고리 미하일로비치 리트비노프가 친구들과 헤어져 호텔 방에 들어오니 방의 창가에는 헬리오트로프 꽃다발이 짙은 향기를 뿜으며 놓여 있었다. 누가 보냈는지 궁금한 리트비노프가 사환을 불러 물어보니, 키 크고 좋은 옷에 베일을 쓴 부인이 보냈다고 한다. 아이쿠, 이제 사건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것. 딱 감이 잡히는 건, 이제 착하고 어여쁜 타티아나하고는 다 살았네,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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