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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구역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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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슨 화이트헤드의 2011년 작품. 내가 읽은 이이의 세 번째 책. <니클의 소년들>과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가 다른 소설이었듯이 <제1 구역>은 앞에 읽은 두 권과는 완전히 다른 작품이었다. 달라도 너무 달라서 과연 같은 작가가 쓴 작품이 맞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로. 이제 24년이 흐른 21세기에 퓰리처 상을 두 번 받은 유일한 소설가인 화이트헤드는 작품마다 다른 주제와 스타일을 시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지만 설마 “좀비” 소설을 쓸 줄은, 생각 못했다. 태생적으로 좀비 같은 비정상 괴물이 출몰하는 소설, 영화 기타 작품을 혐오하는 터, 동양의 강시는 귀엽기라도 했지만, 과연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책의 초반을 읽는 내내 의심스러웠다. 실제로 앞부분에서는 책을 덮기 바로 전까지 여러 번 가기도 했다. 이 책은 좀비 무리와 대항하는 디스토피아적 미래 소설이다.
그러나 결국 끝까지 다 읽었다. 얼굴을 찡그리는 경우도 있었지만 하여간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끝까지. 화이트헤드가 작품을 쓴 2011년에는 펜데믹 이전이다. 그라운드제로 이후 10년이고. 미국, 특히 뉴욕 맨해튼 토박이인 콜슨 화이트헤드의 경우 그라운드제로의 경험이 생생하게 박여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작가는 당시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 그리고 아무리 세계최대도시 뉴욕이라 할지라도 일방적으로 가하는 폭력 앞에서는 무방비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터. 이런 상념은 인간에 한 종의 바이러스를 만들어 냈고, 인간을 숙주로 해서 최초의 한 명을 워킹데드, 좀비로 만들어버렸으며, 그렇게 만들어진 최초의 좀비는 눈에 띄는 사람의 목이나, 팔뚝이나, 다리, 옆구리에서 야구공 하나만큼의 살점을 뜯어내 먹는 것으로 바이러스를 전염시키게 했다. 하지만 2024년에 책을 읽는 독자는 몇 년 이어진 펜데믹을 거치는 바람에 ‘바이러스’라는 단어 하나만 들어도 양쪽 이마에서 알루미늄 빛을 발하는 촉각이 솟아나와 새삼스럽게 소름이 끼치게 만들거나, ‘또 바이러스 이야기야?’ 조금은 지겨운 생각이 들게 만든다. 어쨌거나 작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독자의 개인적 경험까지 보태져, 독자가 작가보다 더 다양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아이러니가 만들어진다는 이야기이니, 이런 면에서는 흥미롭기까지 하다.
작품의 주인공은 삼인칭 대명사 ‘그’로 불리는 남자다. 어려서 로이드 삼촌을 좋아했다. 삼촌은 뉴욕 맨해튼 다운타운(남쪽) 라피엣 거리의 강화유리로 벽을 장식한 아파트 건물의 19층에 살았다. ‘그’는 삼촌을 좋아했다. 롤 모델일 정도로. 수시로 애인이 바뀌고, 애인들은 하나같이 자기가 ‘그’의 첫번째 숙모가 되기 희망했지만 절대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삼촌을 집을 최신식으로 꾸몄다. 벽 한 면을 다 가리는 초박형 TV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최신식 오디오/비디오 장치가 여덟 장소에 비밀리에 숨겨진 스피커를 통해 장르를 불문한 음악이 쏟아져 내려왔지만, ‘그’는 창문을 통해 내려다보이는 허드슨 강과 해변 그리고 다른 마천루를 바라보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나도 이렇게 살고 말리라.
‘그’는 전형적인 B학점 삶을 살았다. 전혀 돋보이지 않지만 잘 하는 축에 들고, (살면서 계속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냥 저냥 어떤 상태라도 적응해 중간 이상 정도로 생존하는 데 특화되었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는 터무니없는 자신감이 있는 청년. 나는 죽을 수도 없을 거야. 어떤 경우라도 살 방법이 눈에 뜨일 테니까 말이지. 정말 이런 유형의 인간이 있다. 특출나지 않기 때문에 미움도 받지 않고, 그렇다고 크게 칭찬받는 법도 없는데 끈질긴 사람. 화이트헤드가 좋아하는 인간형이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별다른 생각없이, 아버지의 권유도 있고 하니, 6년을 목표로 잡고 법학을 공부한다. 공부하면서 여기 저기 회사에 인턴으로 들어가 경험도 쌓고. 만일 바이러스가 아니었으면 준비중인 법률가 시험 역시 B 정도의 성적으로 무난히 통과해 변호사가 되어 넥타이를 맨 수트 차림으로 맨해튼의 사무 건물에서 B 학점 정도의 업무수행능력 평가를 받으며 지내고 있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살 줄 알았다. 시작은 비록 부모님 집 지하실을 개축한 자기 숙소이지만 B학점 정도의 능력있는 변호사를 하며 자산을 모으면 언젠가는 로이드 삼촌처럼 다운타운의 고층 아파트에서 살 날도 오리라.
졸업이 가까워졌을 때 친구 카일과 함께 작은 도박을 하며 즐기기 위해 애틀랜틱시티에 가서 실컷 놀고 돌아오던 날의 교통체증. 이때가 바이러스의 시작쯤이었을 것이다. 트래픽 잼에 걸려 밤늦게 집에 도착한 ‘그’는 부모를 깨우지 않기 위하여 살금살금 걸어 자기의 ‘휴게실방’으로 들어갔다. 지금쯤이면 부모는 2층 디지털비디오 플레이어 앞에서 반쯤 졸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해 잠시 시간을 더 보내다가 ‘그’는 결국 애틀랜틱시티에서 딴 돈을 자랑하고 싶어 계단을 올라간다. ‘그’는 여섯 살 때던가, 어려서 기척없이 부모의 방문을 연 적이 있었고, 그래서 부모의 침대 위 행위를 목격한 적이 있어서 이날도 굉장히 조심스러웠다. 방문을 조심스레 열자 예전에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그러했듯, 어머니가 누운 아버지 옆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으니, 아버지의 갈라진 복막 속에서 꺼낸 창자 한 조각을 홀린 듯이 열정적으로 갉아먹고 있었던 거였다. 아버지는 이미 죽었고, 어머니는 바이러스의 침공을 받아 속칭 ‘해골’ 또는 ‘망령’의 상태가 되어 있었던 것.
‘그’는 당장 집에서 도망나와 벌판, 시골지역으로 탈출해 목숨을 유지했다. 당연히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맞닥뜨렸지만 그때마다 B학점의 생존본능과 행운을 만나 환난을 피해갈 수 있었다. 이런 에피소드는 책에서 재미있게 묘사하지만 그걸 여기에 옮기면 나중에 읽을 독자의 재미를 떨어뜨릴 것 같다. 이 중에서도 마지막 거의 잡혀서 게걸스런 해골들의 저녁식사가 되든지 자신도 해골의 일원이 될 절체절명, 위기일발의 순간, 버펄로, 라고 부르는 임시군사정부의 군대에 의하여 구출되고, ‘그’는 생존자들이 만든 정착캠프 ‘행복한 땅’에 잠깐 머물다가 민간인 지원자들로 구성된 비전통적 부대인 수색대에 들어간다. 여기서 세 명으로 이루어진 오메가 팀에 합류했으니, 팀장 케이틀린, 팀원 게리와 ‘그’.
이들이 초기에 맡았던 임무 가운데 꽉 막힌 I-95번 도로를 순찰하라는 것이 있었다. 차량들은 다 정차 상태이고, 차 안에 든 사람처럼 보이는 것들은 시체 아니면 차량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해골, 좀비들이었다. 임무는 좀비가 있으면 머리통을 쏘아 죽이고, 차량을 도로 옆으로 치워 이동로를 확보하는 것. 비교적 간단한 임무였다. 하지만 교량이 나왔다. 교량에 갓길이 없어 작업이 한층 어려워진다. 그곳에 세워져 있는 유개 탑차. ‘그’를 포함한 팀원들은 (당시엔 지금 팀원들이 아니었다) 똑 같은 매뉴얼에 따라 탑차를 개방했고, 바로 그 순간 탑차 안에서 탈출하지 못했던 수십 명의 좀비들이 한꺼번에 쏟아졌으며 대원들이 그것들을 향해 총을 쏘아댔지만 역부족이라 교량 아래 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은 살 수 있다는 확실하게 무모한 생각에 사로잡혀 뛰어내리는 대신 승합차 꼭대기로 올라가 단신으로 좀비 수십 마리를 다 해치워버렸다.
나중에 팀원이, 하마터면 죽을 뻔했는데 왜 뛰어내리지 않느냐 물었고, ‘그’는 수영을 할 줄 모른다고 고백했다. 여기저기서 폭소를 터뜨리며 이 순간부터 ‘그’를 마크 스피츠로 부르는 것으로 결정해버렸다. 그래서 이 다음부터 주인공의 이름이 마크 스피츠가 된다. 마크 스피츠는, 나는 아직 그의 콧수염 난 모습을 기억하는데, 검은 9월단의 테러로 크게 흠집이 난 뮌헨 올림픽에 출전한 미국의 수영선수로 최초의 7관왕, 금메달 일곱개를 딴 영웅이다. ‘그’가 수영을 못하니, 수영 챔피언, 영웅의 이름을 별명으로 붙여준 것.
버펄로는 뉴욕 맨해튼에 콘크리트 벽을 설치하고 강철로 만든 조임쇠로 연결해 튼튼한 방벽을 마련했다. 이름하여 1구역. 버벌포의 해병대가 진입해 도심 광장에서 큰 소리로 해골들을 부르니, 해골 입장에서는 만찬 초대로 여겨 곳곳에 흩어져 있던 맨해튼의 거의 모든 해골이 광장에 집결했고, 군대는 수월하게 이들을 몰살해버렸다. 이제 도심에는 거의 해골이 없어진 상태. 이곳에 민간인 지원자들로 구성된 수색대가 들어와 열리지 않아 채 밖으로 나오지 못한 좀비들과 붙박이 망령들을 해치우는 임무를 맡는다. 좀비/해골은 익히 아실 것. 붙박이 망령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마네킹처럼 자신이 죽은 상태인지도 모르고 자신이 몰두하고 있던 작업을 여전히 계속하기 위하여 근처에 붙박이처럼 서성대고 있는 감염자들. 물론 이들도 이미 죽은 상태인 건 마찬가지다. 수색대는 좀비들을 해치우기도 하지만 주요 타격 대상이 이 붙박이 망령이다.
이제 마크 스피츠가 된 ‘그’는 훗날, 어느 시점부터 자기가 살고 싶어했던 맨해튼의 인적 없는 거리를 소총을 맨 채 서성이며 지금 자기가 소멸시키고 있는 해골과 붙박이 망령의 정체에 대해 생각한다. 8학년 시절 과학 실험시간의 파트너, 간이 마트 계산원, 대학 3학년 봄학기 시절의 여자친구, 그리고 삼촌. 은행원, 지하철 철도원, 극장 매표소 직원, 배추가게 아저씨.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마크 스피츠 옆에서 자연스러운 생활을 영위하던 그냥 보통의 사람들과 또 부르주아들과 약간의 범죄자들과, 노숙인도 있을 수 있고, 하여간 같은 시대를 산 너와 나 같은 인간이었던 존재들. 나는 작가의 이런 사색이 독자로 하여금 작가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박제된 은유’로부터의 해방을 요구하는 걸 아닐까 싶었다. 갑자기, 한 순간에 인간의 (뇌를 포함한)몸에 침투하여 이상 생명체로 탈바꿈하게 만드는, 바이러스라고 해도 좋고, 911테러 같은 난데없는 폭력이라 해도 괜찮으며, 보통의 생활인은 걱정해보지도 않았던 유동성 위기로 인한 파산일 수도 있지 않을까?
콜슨 화이트헤드. 같은 좀비 소설을 써도, 글 좋고 훌륭한 사변을 요리할 줄 아는 작가가 쓰면 역시 결과물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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