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미스터 포터 ㅣ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7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김희진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7월
평점 :
.
“그리고 그날, 해는 평소와 같은 자리, 하늘 높이 한가운데 떠 있었고, 평소처럼 가차 없이 환히, 그림자조차 창백해지도록, 그림자조차 쉴 곳을 찾도록 빛났다. 그날 해는 평소와 같은 자리, 하늘 높이 한가운데 떠 있었으나 포터 씨는 이에 주목하지 않았으니, 그는 해가 평소와 같은 자리, 하늘 높이 한가운데 떠 있는 데 너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책의 시작 부분을 읽었고, 다시 읽었으며, 한 번 더 읽었다. 그리고 반복되는 단어와 묘사, 이것이 독자가 작품을 받아들이는 가장 큰 선택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 반복은 작품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다. 역자 김희진이 우리말을 능숙하게 사용해 반복하는 단어와 구절에 리듬감을 주었는지, 원래 영어 본문이 그런지 모르지만 내가 읽기엔 이 리듬을 확보한 반복이 꽤나 색달랐고,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책 읽기가 끝날 때까지 기분 좋았다. 그러나 반복, 아까 한 이야기 다시 하고, 조금 전에 쓴 구절을 또다시 사용하면, 자연스럽게 문장은 만연하고, 혹시 멀미를 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다. 미리 이 점을 밝히고 시작하자.
미스터 포터는 1922년 1월 7일에 카리브해 앤티가 섬의 세인트존스, 세인트폴 구에서 너새니얼 포터와 엘프리다 로빈슨의 아들로 태어난 로더릭 너새니얼 포터이며, 최소한 스물한 명의 자식 가운데 너새니얼 포터가 인정한 열한 명의 아이들 중 막내이자 엘프리다 로빈슨이 낳은 유일한 아이이다. 살아생전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상당한 재산 전부를 다른 섬에 사는 먼 친척에게 남기고 1992년 6월 4일 일흔 살의 나이로 삶을 접었다. 70년 동안 (저메이카 킨케이드 식으로 쓰자면) 너무나 많은 고통이 포터 씨에게 따라붙었고, 너무나 많은 고통이 그를 소진했고, 너무나 많은 고통을 그는 남기고 갔다. 그가 남긴 고통 가운데 하나가 애니 빅토리아 리처드슨과의 사이에서 만들었지만 일곱 달 동안 웅크리고 있던 애니의 배 속의 아이 일레인 포터 리처드슨, 저메이카 킨케이드라는 이름을 갖기 전의 그녀였다.
너새니얼 포터 씨의 막내아들이라고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꼴난 디옥시리보핵산 말고는 아무것도 받아본 적 없는 로더릭 포터 씨, 화자 ‘나’ 일레인 포터 리처드슨의 아버지이며, 자기가 그러했듯이 ‘나’에게 꼴난 디옥시리보핵산 말고는 아무것도, 하다못해 흘깃 쳐다본 눈길을 빼면 한 순간도 주지 않은 ‘나’의 아버지. ‘나’가 어머니 애니 리처드슨의 배 속에서 일곱 달 째 잔뜩 웅크리고 있던 날, 포터 씨는 시리아에서 모로코를 거쳐 앤티가 섬에 정착해 택시 회사를 운영하고 있던 슐 씨의 차를 운전하던 운전수였는데, 3백년 간 체코슬로바키아로 불리던 곳의 수도 프라하에 살다가 이젠 더 이상 그곳 근처에서 살 수 없는 환경을 만나, 부다페스트와 빈, 베를린 그리고 상하이를 거쳐 앤티가 섬에 당도한 졸탄 바이쳉거 박사를 태워 그가 구입한 집까지 태워준 날. 염병을 할 날. 프라하에서 지내던 소년시절에는 살로몬이라 불리기도 했던 바이챙거 박사는 사실 정신과 전문의였으나, 카리브해의 작은 섬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필요한 경우는 거의 없어서 전문지식 없는 치과와, 어깨너머 들은 풍월 말고는 없는 외과와, 지레짐작으로 소화제와 진통제만 처방해주는 내과 등 섬의 모든 환자의 모든 병을 전담 치료해주는 의사로 남은 생을 소비했다. 그의 장례식에 섬 주민이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을 정도로 조상이 아프리카에서 온 앤티가 섬 주민을 그렇게 경멸하고 증오하면서.
그날, ‘나’를 배 안에 착상시키고 일곱 달이 지난 애니 빅토리아 리처드슨은 바이쳉거 박사를 태워주러 슐 씨의 택시를 운전하기 위하여 포터 씨가 집을 나선 직후, 70세까지 살 예정이고 그동안 내내 읽을 줄 몰랐고 쓰기를 배우지 않았던 로더릭 너새니얼 포터 씨의 침대 매트리스 속에 숨겨둔 포터 씨의 저축 전부를 들고 스스로 포터 씨로부터 버림받기로 결정을 했다. 일을 줄 몰랐으며 쓸 줄도 몰랐던 포터 씨는 결코 은행 계좌를 만들지 못해, 슐 씨의 택시를 운전하며 번 돈을 침대 매트리스 속에 모아 비록 새 차는 아닐지언정 미국에서 만든 깔끔한 포드 한 대를 구입해 자기 차로 택시 운전을 하는 꿈을 꾸고 있었던 거였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1990년 작품 <루시>를 보면, 글을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알았던 애니는 포터 씨를 떠나 ‘나’ 일레인을 낳고 목수와 처음으로 결혼해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다가 아들만 셋을 연달아 낳은 이후, 앤티가 섬에서 똑똑하고 공부 잘하기로 이름이 높은 ‘나’에 대한 관심을 뚝 끊어버리고 1966년, 열일곱 살의 ‘나’를 뉴욕의 부자집에 말로만 오페어, 사실상 상주 가정부로 보내 버린다. 하지만 그건 나중 일이고, 배 속에 자신의 아이를 담은 채 자신을 떠난 것에 분노하지 않았듯이, 매트리스 속의 현금까지 가져간 일에 대해서도 크게 분노하지 않은 포터 씨는 더운 지방 사람들이 간혹 못 믿을 정도로 너그러운 본을 떠, 그것을 깔끔하게 잊고 처음부터 다시, 차곡차곡 돈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결국 슐 씨로부터 택시 회사를 인수받아 1992년 6월 4일 숨이 넘어가고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묘혈에 물이 들이차 장례식 다음날 땅에 묻힐 때 상당한 재산을 남길 수 있었다. 많고 많은 자기 자식한테 한 푼도 남기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평생 사랑이 뭔지 몰랐던 남자이자 화자 ‘나’의 생물학적 아버지 포터 씨. 그 역시 잘 생긴 늙은 어부 너새니얼 포터의 최소한 스물한 번째 자식이었으며, 어린 시절 단 한 번, 어머니 앨프리다 로빈슨의 손에 이끌려 그물을 깁고 있던 생물학적 아버지 너새니얼 포터 씨 앞에 나선 적이 있었을 뿐이다. 앨프리다는 어린 아들과 살다가, 살다가, 고생스럽게 살다가, 더는 견딜 수 없어 아이를, 너새니얼 포터 씨가 정확하게 절반의 디옥시리보핵산을 물려준 아이를 맡기려 했으나 깔끔하게 거절당하고, 그래서 어머니 앨프리다 로빈슨은 어린 로더릭 포터를 부모 없는 아이를 위한 학교를 운영하는 셰퍼드 씨의 집에 들이고, 세상에서 가장 큰 물, 바다를 향해 하염없이 걸어 들어가버리고 만다. 포터 씨가 자신을 바라보던 어부 아버지 너새니얼 포터 씨의 텅 빈, 고요하고 공허하기 그지없는 눈길을 기억했는지는 모르겠다. 화자 ‘나’도 포터 씨를 만난 적이 있다. 카리브해의 작은 앤티가 섬에서 마주치지 않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테니까. 글씨를 읽지도 쓰지도 못했던 포터 씨한테 나온 ‘나’는 글을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알았으니 그리하여 포터 씨 이야기를 전할 수 있게 된다.
부모 없는 아이들을 위한 학교의 교장 셰퍼드 씨와 이 학교의 교사인 셰퍼드 여사는 아이들이 부모가 없는 가난한 아이들이었기 때문에 경멸하고 미워했다. 그러니 학교를 다녔어도 글씨를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겠지. 대신 셰퍼드 씨는 로더릭에게, 사실 당시에 그는 로더릭이라는 정식 이름이 아니라 그저 ‘드리키’라고 불렸는데 어쨌거나 홀 씨가 쓰던 4인용 중고차를 구입한 이후 드리키를 멍청하다고 하고, 온갖 무척추동물과 비교하고, 엄청나게 골칫거리인 무분별하게 증식하는 식물계 일군과 비교하는 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추악함과 잔혹함을 발휘하면서 자동차를 운전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다 그런 것이지. 완전히 좋은 일이 없는 것처럼 완벽하게 나쁜 일도 별로 없는 게 인생이지 뭐. 그걸로 한 평생 먹고 살며, 비록 다른 섬에 살던 먼 친척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었지만 그 친척이 일찌감치 죽는 바람에 결국 남의 자식들에게 가게 되는 엄청난 재산을 만들었으니.
세월은 어김없이 흘러 ‘나’ 일레인 포터 리처드슨은 뉴욕에서 소설가, 수필가, 정원사, 원예작가로 성공했으며, 백인 남성과 결혼해 순서대로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생산한 후 지나가버린 시간과 화해한다. 그리하여 카리브해의 섬나라 안티구아의 앤티가 섬에 있는 아버지 로더릭 너새니얼 포터 씨의 무덤을 찾는다.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소설을 읽으며 이게 정말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라고 믿는 우를 범하지 말자. 아울러 화자 ‘나’와 ‘나’의 아버지 로더릭 너새니얼 포터, 그의 어머니 앨프리다 로빈슨과 ‘나’의 어머니 애니 빅토리아 리처드슨의 생이 유별나게 드라마틱했다고 여기지도 말자. 20세기의 카리브해에서 살던 아프리카계 사람들의 평균적인 삶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있어 글씨를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알며, 심지어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재미있게 들려줄 수 있는 힘까지 가지고 있어서, 그들의 한살이가 독자들에게 유별난 감상을 주는지도 모른다. 사는 것이 다 그렇듯이, 소설을 쓰는 것 역시 다 그런 법이니까.
아무쪼록 당신도 이 책의 문장, 아프리카계 사람들 특유의 리듬인 것도 같은 음률을 담은 “단어와 구절의 반복”이 특징적인 문장을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