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봄바람을 기다리며 ㅣ 더봄 중국문학 전집 2
거페이 지음, 문현선 옮김 / 더봄 / 2018년 3월
평점 :
.
거페이格非는 필명이다. 본명은 류용劉永. 64년 용띠. 이름도 처음 듣고, 작품도 처음 읽지만 중국에서는 60년생 위화, 63년생 쑤퉁과 함께 중국 아방가르드 작가군의 한 명으로 친다고 한다. <봄바람을 기다리며>가 “관심도서” 목록에 오래 있었던 걸로 보아, 이이 작품이 괜찮다고 언제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거페이는 주도가 난징인 장쑤성 단투 줄신이다. 장쑤성이면 황해에 면한 양쯔강 하류지역. 작품의 배경이 양쯔강을 면한 장쑤성 내륙지역인 듯하다. 그러니 위도가 32도밖에 되지 않지만 북풍한설 몰아치는 한겨울엔 땅에 묻어 보관하는 배추 같은 채소 등속이 꽝꽝 언다고 그러지. 작품은 화자 ‘나’, 자오바이위趙伯渝가 장쑤성의 작은 촌 마을 루리자오儒里趙촌과 이웃한 야오터우자오窯頭趙촌 사람들이 1958년부터 2007년까지 한 세월을 살아낸 이야기이다.
두 마을 다 조씨 집성촌이지만 루리자오촌에 사는 사람들이 은근히 야오터우자오촌 사람들을 아래로 보는 경향이 있다. 마을의 원로 가운데 한 명인 자오시광의 이야기를 전적으로 믿자면, 루리자오촌 사람들의 조상들은 옛날 제나라가 있던 산둥성 랑야에서 대대로 고관대작을 배출한 명가의 후손으로 진晉나라 회제懷帝 시기에 경치 좋은 강남으로 옮겨 터를 잡았다고 한다. 좋은 말로 해서 경치 좋은 강남으로 온 것이지, 회제는 5호 16국 시대를 맞아 흉노가 건국한 잡스러운 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와 잡혀 죽는 등, 중국 역사에서 가장 정신없던 시절에 난을 피해 조금이라도 북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피난을 온 거 같다. 하여간 사마염이 첫번째 황제로 등극한 사마씨의 진나라는 신기하게도 사마 성을 가진 인물들은 제 명대로 산 사람이 별로 없었다. 서로 죽이고 죽느라고. 하여간 이때 양쯔강을 건너 강남으로 온 조씨들은 자기네 마을을 배운 동네 조씨 촌, 즉 유리儒里라 했고, 어디서 온 줄도 모르고 오자마자 집 짓기 위해 벽돌을 굽느라고 가마를 세워 가마 사람들, 요두窯頭라 멸칭했다. 그래 “둘 다 자오씨라고 해서 뭉뚱그려 자오자촌, 조가촌趙家村이라 할 수 있겠느냐” 하는 거였다.
그러나 1949년에 공화국이 섰으니 세상이 바뀌어, 공부를 했다고? 그래서, 어쩌라고? 시대가 되어버렸다. 근데 이 자오시광趙錫光 할배도 문제가 많은 인간이기는 하다. 원래 이 양반이 중문이 몇 개인 저택에 살면서 농지가 백여 마지기, 그러니까 2만평을 가뿐히 넘었고, 방앗간 두 개, 기름집 하나를 가진 부르주아 지주였다. 이 할배 특기가 눈알 돌리기라서, 이제 땅이 많고, 집도 크고, 가게까지 몇 개 가진 사람들은 인간 축에도 끼지 못할 것임을 딱 알아본 거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부동산을 “유일한 친구”이자 칠현금 연주에 관한 한 전 중국의 일인자인 자오멍수에게 팔았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 자오멍수는 1955년 한여름에 처음으로 공개 비판을 당하고 집에 돌아와 초우蕉雨산방에서 음독자살했다. 그래도 자오시광 이 할배가 마을에서 가장 학식이 높아 자기 아들 창성, 손자 퉁빈한테 글을 가르쳤는데, ‘나’도 퉁빈의 어깨 너머로 글을 배우는 걸 모른 척해줬다. 다행히 자오시광의 바람직하지 않은 인간성을 자기 대에서 마감을 해 아들은 보통사람, 손자는 정이 깊고 의리 또한 두터운 남자로 성장해 ‘나’와 평생 절친관계를 이어간다.
‘나’의 아버지 자오윈셴趙雲仙은 돌림자인 선仙 자 때문에 간혹 ‘신선’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대개 ‘자오바보’ ‘큰 바보’ 또는 ‘자오 큰 바보’로 불렀다. 왜 큰 바보냐면, ‘나’가 ‘작은 바보’니까. 그러나, 이제야 말하지만, 아버지는 점술가다. 세상에 바보 점술가 보셨어? 내가 예수를 믿지 않는데 하물며 점술가의 사술을 믿겠는가? 그래도 정상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좋은 의미이거나 나쁜 의미로) 현혹해 밥술이라도 먹으려면 여간 눈치가 재고 상황판단이 빨라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러니 바보일 수 없는 법. 젊어서 아버지는 상하이 홍커우虹口에서 남방물품 잡화점에 견습생으로 일했던 적이 있다. 일 잘하고 있다가 상하이 최고의 점술가 다이톈쿠이의 눈에 들어 수하로 들어간다. 원래 사리판단이 빠르고 뭐든지 얼른 익히는 사람이라 다이톈쿠이의 점술을 퐁퐁 묻힌 스펀지가 돼지 기름기 빨아들이듯 해치웠다. 그런데 아뿔싸, 그냥 내버려 두지, 아버지 인생이 꼬이려고 그만 부농 아버지가 난징에 내려와 상점 점원 그만두고 집에 가서 장가를 들라고 명령을 해버린 거다. 이때만 해도 아버지 하는 말은 하느님 말씀이라 어기지 못하고 낙향을 하니, 그래도 똑똑하고, 못 배워서 교양은 없지만, 예쁘기는 겁나게 예쁜 젊은 아가씨가 집에 와 있는지라 엣다 모르겠다, 그 길로 장가들고 아이부터 만들었으니 그게 ‘나’ 자오바이위다.
큰 도시 난징에서 남방물품 상점 점원이면 프롤레타리아라고 주장해도 하나도 이상한 거 없잖아? 근데 깡촌 루리자오에서 손바닥 만한 자기 농지를 소유했다고 부농이라 해서 공화국 생긴 다음에 있는 거 없는 거 다 빼앗기고, 하루 아침에 천한 출신성분이 되어 버렸으니, 동네 사람들이 바보 가운데 상 바보라고 놀리기 시작해서 그대로 혓바닥이 굳어버린 거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연신 벙글거리며 도무지 열을 내지 않아 어린 ‘나’가 보기에 정말 바보 같기도 하고 그랬다. 소설은 섣달 29일에 시작한다. 옆 마을, 그래도 걸어가려면 한 나절이 걸리는 작은 어촌 마을 반탕에서 의뢰가 와서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길을 떠났다. 동네에 아름다운 아주머니가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데리고 산다. 이런 지 얼마 안 됐다. 올 한 해 동안 시아버지(나이 먹었으니 그냥 죽은 것이지만), 남편(북쪽으로 쌀 수송하다가 바람이 불어 배와 함께 난파), 큰아들(사연을 결코 알려주지 않음), 남자만 셋이 차례대로 죽어버리고 내 또래 작은 아들도 도무지 매가리가 없이 시들시들하다. 그리하여 혹시 하는 마음에 아버지를 부른 것. 아버지를 청하기 전에 반당사에 사는 중이 말해주기를 딸 춘친春琴에 문제가 있어 액이 쏟아지니 자기와 함께 절로 들어가 심부름을 하며 지내라고 한 적이 있단다. 춘친이 큰 액이었는지 반당사에 갑자기 불이 나고, 이 말을 꺼내 중도 함께 타 죽었다나? 묵묵히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는 두려움과 경계심이 가득한 눈빛에 혐오와 원망의 기운을 담아 바라보는 춘친을 지그시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아주머니와 속닥속닥. 다음날 아침 반탕을 떠나면서 아버지는 작은 소리로 내게 말해주었다. 춘친이 곧 우리 마을로 시집올 거라고.
춘친이? 누구한테? 혹시 홀아비인 아버지한테 시집을 와 내 엄마가 되는 거 아냐? 겨우 다섯 살 많은 엄마. 아, 그러면 문젠데. 걱정하지 마라, ‘나’여. 루리자오촌에 못 생기고 나이 많이 먹은 총각이 하나 살았다. 빈농이었다가 아버지가 오래 가는 병에 들어 그나마 싹 거덜을 내고 숟가락을 놓더니, 시름시름 어머니도 뒤따라 갔다. 동네사람들이 의견을 모아 강 건너 외삼촌한테 보냈더니 며칠도 안 돼 바지도 입히지 않고 다시 강 건너 동네로 보내 버렸다. 자기 식구들 먹고 살기도 팍팍해서 안 되겠다나? 마을 사람들이 이 아이를 어떻게 하나, 다시 뜻을 모았더니 또 길이 생겼다. 동네 사당을 늙은이 하나가 지키고 있으니 그리로 보내 심부름을 하며 함께 살면 좋겠다고. 그렇게 했다. 그랬더니 이제 동네 사람들이 불쌍하다고 먹을 것도 남으면 보내주고, 입을 것도 보내주어, 숱한 아이들이 겨울에 입어보지도 못하는 솜바지를 이 아이한테 주기를 망설이지 않아, 아이는 오히려 기골 장대하고 튼튼하고 힘 센 천하장사로 성장해, 2부의 주인공이 될 자오더정.
세상이 휙 뒤집어져, 현의 간부가 루리자오촌에 와서 촌의 대표를 뽑으라 성화했고, 촌에선 석 달이 지나도 뜻을 모으지 못했다. 급기야 현의 장이 직접 방문해 많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딱 결판을 봤다. 당신들이 원하지 않는 누구가 촌대표를 하고 싶은데 나서기 면이 없으니 직접 가마를 가져와 태워 대표로 앉히기를 기다리는 거 맞지? 아이고, 진짜 점술가는 여기 있었다. 그랬더니 속에 그런 마음 또는 욕심이 대창 속 지방 들이찬 듯했던 자오시광 영감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아니, 아니, 나는 그런 적 없소, 시뻘개진 목으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현의 장은 그러면 가장 성분이 좋은 사람을 고르겠다, 제일 가난한 자가 누구냐? 해서 더 이상 얘기할 거 없이 자오더정이 한 순간에 촌 대표로 올라선 것.
이때 한 여자가 발딱 일어서서, 일자무식한 자가 어찌 대표가 될 수 있겠소? 여태 가장 천했던 자가 남의 위에 오르게 되면 어떻게 공정한 일을 할 수 있겠소? 격에 너무 맞지 않으면 사람들이 진정으로 따르지 않으니 이게 문제가 아니오? 따박따박 따지고 들어 현의 장이 보기에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자오더정은 촌의 대표로, 발언한 여자는 현의 사무관으로 발탁해 데리고 가서 몇 달 교육을 시킨 다음 정식 촌 대표 자리에 올랐다. 이때 자오바보, 점쟁이 자오윈센이 장가까지 들게 해주었으니 이 고마움이란. 자오더정은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나’가 성인으로 자랄 때까지, 그리고 자신이 죽을 때까지 아버지의 은혜를 잊지 않는 의리의 사나이였다.
재미있다. 위화, 쑤퉁, 그리고 옌롄커 같은 작가들과 비슷한 주제인데 그들보다 톤이 훨씬 부드럽다. 가난과 폭력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인간 짐승의 모습을 발현하기도 하고, 인간 보살을 체현하기도 하지만 앞의 세 사람들보다 적나라하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조씨 들의 집성촌 이야기라서 수다한 ‘자오’ 이름이 나와 많이 헷갈릴 수 있다. 다른 성씨의 중요 인물도 하필이면 ‘가오’ 씨라서, 이틀동안 내리, 자오, 가오. 가오, 자오 속에서 헤맬 수도 있다. 그런 건 다 팔자소관이니 각오하시고 읽어보시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