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신없는 할머니 부클래식 Boo Classics 90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김미란 옮김 / 부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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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원래 제목은 <Kalendergeshichten: 달력이야기>이다. 책을 선택하기 전에 ‘달력 이야기’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더라면 더 좋았을 뻔했다. 짧은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으로, 익살극, 우화, 일화 같은 서사적인 작은 형식들을 포함한단다. 17, 18세기 독일에서 민간인들이 사용하는 달력은 제대로 배우지 못한 농민계층의 유일한 읽을 거리였다고 역사 후기에 나와있다. 역자 김미란은 “찬송가와 성경을 제외하고”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지금도 성경과 찬송가 값이 다른 책값과 비교하면 잠실롯데월드타워라 타의 추종을 불허하건만 17세기, 18세기에 일반인, 농민들이 가정에 한 권씩 장만해놓고 읽을 수 있었을 거라고 진심으로 믿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여간 그렇다. “달력 이야기”가 나와 있는 소설작품도 몇 편 읽어본 적 있어서, 만일 원제가 그랬다면 조금 더 생각해보고 대출을 할 것인지 그냥 말 것인지 따져봤을 텐데, 어쨌든 브레히트라는 이름 하나만 보고 딱 고른 책이다.

  열일곱 편이 실려 있다. 위에 쓴 것처럼 익살극도 있고, 우화도 있고, 일화도 있고, 브레히트가 쓴 시도 있다. 마지막에 실린 <코이너 씨 이야기>는 원래 121편으로 출판되었다고 하는데, 이 책에서는 이 가운데 39편만 골라 실었다. 이 가운데 표제작이며 제일 앞에 소개한 <채신없는 할머니>가 단연 돋보였다. 지금 시각으로 봐도 참 쿨한 할머니의 말년 2년 동안의 생활을 소개한 일화. 브레히트가 자신의 할머니 탄생 백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939년에 써서 1949년에 출간한 《달력이야기》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브레히트의 할머니 카톨리네 브레히트 여사의 진짜 삶하고는 일치하지 않지만 할머니한테서 강한 인상을 받았다는데 어떤 작품이냐 하면:


  할머니는 일흔두 살에 과부가 됐다. 할아버지는 바덴 주의 작은 도시에서 두세 명의 조수를 두고 석판 인쇄업을 했고, 할머니는 인쇄공과 자녀들을 먹이기 위해 요리를 했다. 일곱 명의 자녀를 출산했지만 둘은 어려서 죽고, 빈약한 생활비로 다섯 아이를 키워야 했다. 다섯 가운데 딸 둘은 미국으로 갔고, 아들 둘은 독일 안에 있기는 하지만 멀리 떨어져 나갔고, 막내아들만 몸이 허약해 작은 도시에 그대로 남아 아버지에 이어 인쇄공이 되었다. 역시 부모한테 배워 막내도 많은 아이들을 낳아 대가족을 거느리는 가장으로 성장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어쨌든 일곱 명의 자녀와 인쇄공들이 함께 살던 큰 집에 혼자 살기로 했다. 막내아들이 작은 집에서 대가족을 거느리기가 좁고, 불편하고, 번거로워 부모 집에 들어가 함께 살았으면 했지만, 어머니는 안면 몰수하고, 천만의 말씀을, 일주일에 한 번 점심이나 같이 먹는 선으로 칼같이 선을 그었다. 자식들은 이제 벌이가 없는 어머니가 어떻게 살까 싶어서 작은 금액을 갹출해 매달 생활비를 보내기로 했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 형들 보다는 자주 어머니를 찾는 막내도 용돈을 보냈는지는 모르겠다.

  할머니는 라이프 스타일이 확 바뀌었다. 그래서 “채신없다”는 형용사를 제목에 붙이긴 했지만, 혼자 살기 시작한 이후부터 할머니는 이틀에 한 번 꼴로 음식점에 가서 외식을 하고, 당시엔 거의 부랑배들의 집합소로 여기던 영화극장에 수시로 드나들고, 중년남자인 구두수선공의 작업실에도 드나들었는데 그곳은 가난하고 소문도 좋지 않은 좁은 골목에 있으며 일자리 없는 여종업원들이나 수공업자 청년들이 주로 모여 있는 곳으로 평판이 안 좋았다. 게다가 대형마차를 빌려 유원지에 소풍을 가고, 기차를 타고 K시에 있는 경마장까지 출입을 한단다. 이게 막내아들, 화자의 막내 삼촌이 형들에게 고자질한 것을 옆에서 들은 내용인데, 막냇삼촌이 열을 받은 가장 중요한 이유가, 경마장이 있는 K시에 갈 때마다 정신지체가 있는 어린 여자애 하나와 함께 다니면서, 그 여자애에게 모자도 사주고, 모자 위에 장미꽃도 달아주었기 때문이다. 자기 딸한테는 견진성사를 받을 때 입을 드레스 한 벌이 없는데 말이다.

  훗날 화자가 생각해보니, 할머니는 두 번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한 번은 딸, 아내, 어머니로, 또 한 번은 완전히 자유로운 독신여성 B 부인으로. 영유아 시절을 빼고 첫번째 인생으로 대략 육십 년이 걸렸고, 두 번째는 겨우 이 년이 넘지 않았다. 남은 얼마 남지 않은 생을 자식 손주들 다 모른 척하고 오직 자신 하나를 위해 즐긴 인생. 그는 말한다.

  “할머니는 오랜 세월 속박의 삶을 살다가 짧은 세월의 자유를 맛보고 인생이라는 빵의 마지막 부스러기까지 다 드시고 가신 것이다.”

  여기서 나는 영어 알파벳으로 P.S.라고 적고, 이어서 “돌아가실 때는 그 처녀(소녀시절의 정신지체아)가 옆에 있었다. 할머니는 일흔네 살이었다.”고 써야겠다.


  이것에 비견해 재미있는 소품이 열다섯 번째로 실린 <부상당한 소크라테스>인데, 진짜로 페르시아 전쟁에 참가해 발바닥에 부상을 입은 소크라테스가 전쟁영웅이 된 기가 막힌 사연이다. 근데 둘 다 소개하면 김이 빠질 거 같아서 오늘은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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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26 05: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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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류드밀라 울리츠카야, <행복한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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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부스 타킹턴, <앨리스 애덤스의 비밀스러운 삶>
금요일. 오노레 드 발자크, <골동품 진열실>

그레이스 2024-07-29 07:23   좋아요 1 | URL
<골동품 진열실> 발자크 군요!^^-------

Falstaff 2024-07-29 07:36   좋아요 1 | URL
넵. ㅎㅎㅎ <골동품 진열실>에도 라스티냐크 출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