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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식과 이완의 해
오테사 모시페그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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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에 모시페그가 쓴 <아일린>을 꽤 재미있게 읽어서 곧바로 <내 휴식과 이완의 해>도 읽으려 했다가, 독자 평이 하도 좋지 않아 안 읽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어라, 도서관 개가실에 책이 꽂혀 있어서, 그래, 세월이 꽤 흘렀으니 이제 한 번 읽어봐도 괜찮겠다 싶어 책을 폈다가 에그머니, 폭삭 망해버린 책. 독자 평점이 높은 베스트셀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는 왕왕 있어도, 이를 5별망작이라고 하기도 하지만, 독자 평점이 아주 낮은 책이 마음에 드는 경우는 없다, 이건 진리 비슷하네.
출판사 제공 책소개는 이렇게 말한다.
“<내 휴식과 이완의 해>는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일 년간 동면에 들기로 계획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차갑고 신랄한 블랙코미디로 그려”냈다고,
책 속의 주인공이자 화자 ‘나’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① 오래 전에 지나간 것과 ② 요즘 지나가고 있는, 겪고 있는 것이 있으니, ①은 유소년 시절에 각자 자기일 때문에 ‘나’에게 관심과 애정을 충분히 표현해주지 않은 부모이고, ②는 나를 버리고 자기 또래 여성과 결혼을 모색하고 있는 나이 많고 구강성교에 환장한 (‘나’의 입장에서)애인 또는 (상대인 트레버 의견으로)섹스 파트너다.
무정한 부모는 둘 다 죽었다. 죽으면서 지금 ‘나’가 살고 있는 뉴욕 이스트 84번가 고급 아파트와 뉴욕 주 북부의 옛집, 그리고 주식과 채권 등의 동산을 남겨, 옛집에서 들어오는 집세, 아버지의 옛 재정관리자가 아직도 관리하고 있는 투자금에 대한 이익배당과 이자 같은 것이 쉴 새 없이 통장에 꽂혀, 아이비 리그 가운데 한 학교인 컬럼비아 대학 미술사학과를 졸업한 ‘나’는 노동할 필요가 전혀 없으면서, 내가 벌지도 않은 돈으로 진짜 명품 옷과 속옷, 신발, 기타 악세서리까지 완비하고, 심지어 사놓고 상표도 떼지 않은 것들이 수두룩할 정도인데, 원래 되는 인간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되는 법이라, 모델 같은 미모까지 완비해서, 숱한 사람들이 ‘나’를 숭배하는 동시에 미워하고 있다. 참고로 지금 스물여섯 살이다. ‘나’가 대학 4학년 때 법적으로 확립된 고아 신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정 없던 부모가 ‘나’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늘 느끼고 있는 과거의 한 페이지로 등장한다. 가정폭력, 학대 이런 거? 없었다.
애인 트레버. 물론 윌리엄만큼은 늙지 않았다. 이이를 설명하기 위하여는 다양한 체위와 기교의 종류를 이야기하지 않을 도리가 없으니 점잖은 우리는 이쯤에서 말을 말자. 띠동갑 이상으로 나이가 많은 아저씨로, 하도 젊은 여성하고만 잠자리를 해서 그런지 이제 자기와 동갑, 갑장인 여성을 만나 진정한 사랑을 찾았다고 육갑을 떨어 ‘나’와 그만 만나자면서 이별 기념으로 여태 ‘나’가 즐겼던 비디오 재생기 대신 DVD 플레이어를 선물하고 떠난다. 그리고 책의 끝부분에 가면 정말로 그 여자와 결혼한다.
26세의 ‘나’는 돈이 많다. 동산, 부동산 다 많다. 그런데도 취직을 했다. 버그도프스와 바니스와 이스트빌리지의 최고급 빈티지 부티크에서 쇼핑한 경탄스러운 의상과 컬럼비아 대학에서 미술사를 전공한 배경이 ‘나’의 무지막지한 직업적 자산이 되어 웨스트 21번가에 있는 ‘순수미술’ 갤러리 중 하나인 더키트의 직원자리를 손쉽게 얻었다. ‘나’의 보스 너태샤가 ‘나’에게 바라는 건 패션 캔디. 아방가르드한 옷을 입고 갤러리의 책상에 앉아 관객 누가 질문을 해도 잘 모르는 척하는 일을 하며 연봉 2만 2천 달러를 받았다. 그깟 연봉은 안 받아도 그만이지만 놀면 뭐해. 그러다가 창고에서 잠들어버리는 일이 습관이 됐다. 중국계 핑시의 전시회가 있었다. 개들의 박제를 놓은 설치미술 작품이었다. 근데 유럽 출장 간 너태샤가 전화를 걸어 ‘나’를 해고해버렸다. ‘나’는 짐을 챙겨 나가려 하다가, 어차피 오늘까지니까 할 일이 남았다면서 밤까지, 다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나오기 전에 개1과 개2 사이에다 똥을 누고, 닦은 휴지를 개3의 입에 물려놓고 나왔다. 너태샤가 욕을 욕을 했겠지만 고소를 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완전한 맨정신은 아니었다. 정말 맨정신이었으면 진짜 도라이게? ‘나’는 뉴욕에서 아주 드물게 찾을 수 있는 나쁜 정신과 의사 닥터 터틀을 만나 진정제를 처방 받아 많은 양을 먹은 상태였다. 그래서 <내 휴식과 이완의 해>도 잠에서 깨, 24시간 영업하는 잡화점 ‘보데가’에 가서 대용량 커피 두 잔을 사, 한 잔은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원샷으로 마셔버리고, 두번째 잔은 TV로 영화를 보며 동물 모양 크래커와 함께, 트라조돈, 앰비언, 넴뷰탈을 먹은 후 천천히 잘 때까지 마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트라조돈. 수면 유도제. 앰비언. 진정제. 넴뷰탈. 진정제이면서 약물을 이용한 사형집행에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약물을 처방해주는 의사가 닥터 거북이, 터틀이다. 택시 사고로 목에 발포고무로 만든 보조기를 달고 있고, 뚱뚱한 얼룩고양이를 안고 있는 나이든 여자.
‘나’는 닥터 터틀에게 호소한다. 6개월간 잘 자지 못했다고. 사람들과 어울릴 때 절망과 불안을 느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은 욕구를 막아줄 뭔가가 필요하다고. 어쩌면 PTSD인지도 모르겠다고. 그래서 진정제가 필요하다고.
닥터 터틀은 말한다.
“일단은 리튬과 할돌을 먼저 받아 가요. 치료를 처음부터 요란하게 시작하는 게 좋아요. 그래야 나중에 좀 별난 약을 써볼 필요가 있을 때도 보험사가 놀라지 않거든요.”
닥터는 전문가였다. 약물 전문가이면서 보험사를 이마 치고, 뒤통수도 치는 선수. 그리하여 닥터 터틀의 약물 처방과, 처방받은 약물의 임의 과용, 오용, 혼용이 시작되면서 작품은 노골적인 목불인견, 눈 뜨고 볼 수 없는 차원으로 접어든다. 진정제, 수면유도제, 안정제를 숟가락으로 퍼먹는 수준에 도달한 ‘나’는, 세상에 ‘나’만 가지고 있는 두 가지 불행, 부모와 트레버의 애정 부족으로 점점 망가져, 빨래하기 귀찮아 더러워지고 뻣뻣해진 팬티는 그냥 버리고, 샤워는 잘 해야 일 주일에 한 번하고, 눈썹 뽑기, 탈색, 제모는 생략하고, 보습제, 각질제거제도 중단한다.
게다가 ‘동면’에 들어가서 잠을 자는 “내 휴식과 이완의 해”가 2000년 6월에 시작하니까, “해year”라 했으니 2001년 6월에 동면이 끝나면, ‘나’를 정면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어처구니없게 2001년 9월 11일, 무역협회 건물 테러 사건이다.
도대체 뭐야? 뭘 주장하는 거야? 난 모르겠다. 아니, 알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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