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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몬 라
빅토르 펠레빈 지음, 최건영 옮김 / 고즈윈 / 2012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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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에 국립 모스크바 바우만 공과대학 군사학부 교수의 아들로 태어난 빅토르 올레키예비치 펠레빈은 아버지가 권했는지 모스크바 에너지공대 전기공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까지 진학했음에도 학업을 때려 치우고 글쓰기에 몰입한다. 이 시기가 우연히 소비에트 각지에 우뚝 솟아 위용을 과시하던 레닌의 동상이, 목에 굵은 밧줄이 걸린 채 콘크리트 바닥으로 넘어지면서 머리가 뎅거덩, 떨어지던 시기와 맞물린다. 이때는 모스크바에서도 양철 상자에 동전을 넣기만 하면 와당탕, 소음을 내며 양철 자판기에서 펩시콜라(P)가 쏟아져 내리던 때, 대마초 연기와 코카인을 코로 흡입하느라 코 점막이 거덜이 난 청년들이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파는) 앱솔루트 보드카에 펩시콜라를 타 마시면서 당연히 러시아 말로 “피즈테츠(P)”라고 가장 더러운 욕을 하던 P-세대의 시절이었다. 1989년에 소설이 아니라 동화를 발표해 작가로 데뷔한 펠레빈은 1992년, 생일이 아직 지나지 않아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첫 장편소설 <오몬 라>를 발표하는데, 이 범죄형 얼굴을 한 거구의 사나이가 발표하는 소설은 이후 나오는 족족 러시아 판 베스트셀러의 자리에 오르니, 아무래도 대학 또는 전공 선택은 초장에 헛발인 거 같지?
나도 이이가 쓴 작품은 <P 세대>와 <스너프>를 읽어봤다. <P 세대>는 앞에서 잠깐 소개한 시절의 시대극이고 <스너프>는 한 3천년이 지난 시점을 무대로 해서 (글을 쓰던) 지금 시대의 문제점을 풍자한 SF 소설이었는데, 내가 읽기로는, 내 취향이 SF 보다 아무래도 시대극을 좋아해서 그런지 <P 세대>를 재미있게 읽었다. 역시 SF 작품은 책을 읽으면서 뇌 에너지를 많이 소비해야 하고, 소비하는 만큼의 효용을 보장하지 않는다. 내 경우에 국한하면 그렇다는 거다. 아무쪼록 SF 팬들께서는 이 말 읽고 열 내지 마시라. 그러면 장편 데뷔작인 <오몬 라>는? SF다. 1992년 발표해서 93년에 브론조바야 울리츠카 상을 받았다고 한다. 아직 옛 소비에트 연방에 맺힌 아쉬움과 아픔이 상당히 남아 있었던 때라서 소비에트 시절의 말도 안 되는 냉전 상태를 제대로 비틀고 있기도 하다. SF라도 현실 비판이나 풍자를 품고 있으면 독자들에게 더 효과적으로 어필하는 법이다.
마트베이 크리보마조프 씨는 평생 모스크바 경찰로 근무했다. 아들 오비르와 오몬을 낳은 아내는 그만 일찍 세상을 접는 바람에 아이들을 동생한테 보내고 평생 다시 결혼하는 일 없이 홀아비로 살았다. 큰 아이 이름 ‘오비르’를 우리말로 하면 “외국인 비자 등록부”라는 뜻이고, 작은 아이 ‘오몬’은 크리보마조프 씨의 바람대로 자신을 이어 경찰이 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경찰 특수부대”라는 이름을 주었다. 불행하게 오비르는 열한 살 때 피워보지도 못하고 죽어버렸으며, 더욱 상심한 크리보마조프 씨는 거의 하루 종일 보드카와 맥주에 절여져 다 낡은 소파에 기대 앉아 세월만 죽이는 상태로 접어들었다. 원래 이이의 진실한 꿈은 모스크바 근교에 작은 밭뙈기를 장만해 비트와 오이 따위를 기르면서 말년을 평화롭게 보내는 거였는데, 꿈이 쉽게 이루어지면 꿈이 아니라서 그냥 꿈만 꾸었다.
작품의 주인공 오몬 마트베예비치 크리보마조프는 어려서, 유소년 시절 동네 작은 놀이터에 창문이 두 개 달린 장난감집을 기억한다. 이 장난감집이 오래 돼 망가지는 바람에 사람들이 이것을 다시 리모델링했고, 그게 어린 오몬이 보기엔 비행기처럼 보여, 안에 들어가 유소년 특유의 상상력을 발휘해 자신이 설원의 상공을 나는 비행기 안에 있다는 식으로 설정하고는, 조국의 상공을 침범하는 유럽, 미국의 전투기와의 교전 같은 걸 상상하기를 즐겼다. 조국의 하늘은 내가 지킨다! 그게 오몬의 인격을 발아시킨 이후 처음으로 비행물체 조종사의 꿈을 키운 계기였다.
이후 모스크바 변두리에서 열린 “국민경제 달성 박람회장” 주위를 산책하다가 갑자기 거대한 전화기의 울음처럼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고, 곧바로 ‘그’가 보였으며. ‘그’는 허공에 앉은 자세로 공중에 떠서 천천히 이동했는데, ‘그’의 뒤에 호스가 달려 아마 산소를 공급해주는 것 같았으며 검은색 헬멧 유리를 통해 우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박람회장이다. 일종의 쇼를 보여주는 곳. 이때가 1960년대 말쯤이니까 미국과의 우주 개발 경쟁을 하던 시기로 우주공간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장면을 연출했을 터이다. 하여간 오몬은 이 광경을 보고 크게 깨달은 것이 있으니, “인간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무중력뿐임을 영원히 절감”하게 된 일. 이걸 조금만 더 멋있게 쓰자면, “지상에서 평화와 자유를 획득하는 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후 오몬의 영혼은 하늘 저 높은 곳을 염원”하게 되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오몬은 가장 깊은 우정을 나눌 미쪽 스비리덴코를 만난다. 미쪽은 만사에 의문을 갖는 타입이지만 일단 비행사가 될 것이고, 그런 다음 달로 날아갈 것을 확신하는 소년이었다. 다행히 미쪽의 아버지 스비리덴코 씨는 크리보마조프 씨와 달리 술과 우울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양반이라, 미쪽이 7학년을 끝낼 여름에 아들과 친구를 위해 “로켓” 캠프 이용 허가증을 얻어주어 모스크바 중상급 가정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캠프에 갈 수 있었다. 캠프의 식당 안에 종이로 만든 로켓의 모형이 놓여 있었는데, 미쪽과 오몬의 궁금증은 처음엔 모형 안에 사람 모형도 들어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아? 당연히 아무도 모르지. 캠프 강사들도 모를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호기심은 (거의)뭐든지 가능하게 한다. 이것을 위하여 미쪽은 한밤이 되자 몰래 식당에 숨어들어 로켓 모형을 해체해버린다. 그랬더니, 정말 사람 모형도 들어 있는 거다! 그래서 추리하기를, 애초에 제일 먼저 사람을 만들고 의자에 앉힌 후에 조종실을 시작으로 로켓을 안에서 바깥 순으로 만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흥미로우면서도 실망스럽고, 작품으로 보면 거대한 복선이지만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알아채기 힘든 문제점이 하나 있으니, 조종실에서 로켓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없다는 거였다. 로켓에 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게 조종실 내부하고는 연결이 되지 않았던 것. 이 캠프에서 미쪽과 오몬은 통행이 금지된 야밤에 이동을 했고, 로켓을 해부한 벌로 혹독한 군사훈련을 받는다.
어느덧 소년 오몬과 미쪽이 클 만큼 다 커서 이제 대학을 정할 시간이 왔다. 이들은 고민도 없었다. 항공학교에 가기로 일찌감치 결정하고 다만 어느 항공학교에 가느냐만 남았던 터. 결국 마레시예프 기념 자라이스크 붉은 깃발 항공학교를 선택했다. 때를 맞추어 잡지에 이 학교와 연관된 월면月面도시 생활기사를 본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지역군사징병사무소가 발행한 영장을 주머니에 넣은 채 열차를 타고 멀고 먼 자라이스크 마을에서 내리고, 다시 버스로 한참 거리에 떨어진 숲 속의 학교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소위 본고사를 봐야 한다. 본고사는 우리나라 본고사와 달리 필기시험 점수와 별개로 진행하는 면접시험이 결정적으로 당락을 좌우한다. 면접관은 대령급 장교와 군복을 입지 않은, 나중에 별이 세 개인 중장 계급으로 밝혀지는 노인도 동석한다. 면접 초기에 오몬은 버벅거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우주비행사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로 로켓 캠프에서 있었던 일과, 그 결과 당해야만 했던 혹독한 군사 벌칙을 이야기하자 사복 입은 노인이 마구 홍소를 쏟아내 당당하게 합격한다.
합격발표가 있던 날, 비로소 학교 건물 기숙사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첫날 밤부터 사달이 나버렸다. 어떤 끔찍한 사건인지는 직접 확인하시고, 이것도 뭔 풍자겠지만, 어쨌든지 간에 오몬과 미쪽, 두 소년은 사건에 말려들지 않고 따로 둘만 사복 노인의 호출을 받아 그를 만나러 간다. 여기서 그가 현역 중장임이 처음 밝혀진다. 그는 말한다.
“자네들의 시험 결과를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특히 면접 결과를. (중략) 자네들은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까게베 제1과 부속 기밀우주학교 입학 대상으로 선발되었다. 진짜 인간이 되는 건 잠시 뒤로 미루고, 대신 모스크바로 갈 준비를 하도록 해라. 그곳에서 나를 다시 보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까게베”를 알파벳으로 쓰면 “KGB: 국가보안위원회”다. 악명높은 그곳, 맞다. 소련 국민과 외국인의 활동을 감시하던 비밀경찰.
시절은 벌써 70년대 말이나 80년대 초일 것이다. 말은 우주 경쟁이지만 이미 소비에트는 자금력과 기술력 모두 미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전세계가 다 알고 있었다. 소련 국민들만 빼고. 그래서 소련은 달 착륙과 차별할 생각으로 대신 유인우주선의 우주 체류를 통한 지구관찰에 역점을 둔다. 영화 <아마겟돈>에서 브루스 윌리스가 이끄는 석유시추팀들이 소련인이 관리하는 우주정거장에 도킹하는 장면을 생각하면 딱이다. 그럼에도 KGB는 달 탐사를 세상에 광고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과 같은 장소에서 경쟁하면 있는 것, 가진 것 다 뽀록이 날 터이니 달의 뒷면을 탐사한다고 발표를 했고, 우리의 오몬과 미쪽이 월 배면 탐사의 팀원으로 발탁이 된 거다. 이렇게 작품은 소비에트 시절 정부와 정부기관에 의하여 저질러졌을 지도 모르는 행위를 풍자하기 위하여 펠레빈의 뇌를 짜내기 시작한다.
그러면, <오몬 라>에서 “라”는 뭐냐고? 그건 알려드리지. 오몬이 선택한 최고 신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수천 년 전에 믿었던 ‘라’ (중략) 신이 매의 머리를 하고 있어서 였을 것이다. 조종사나 우주비행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영웅들은 종종 매라고 불렸으니까. 나는 만약 내가 정말로 신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형상은 바로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고 결정해버렸다.”
즉 오몬 마트베예비치 크리보마조프는 자신의 가문 크리보마조프를 버리고 대신 자신이 선택한 최고의 신인 ‘라’의 가문으로 이적해버릴 결심을 해버린 거다. 미리 알려드리는 이유는, 이게 아니면 작품의 결말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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