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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명학수 지음 / 창비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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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학수. 처음 들어보는 작가. 메이저 가운데 하나인 창비에서 첫 소설집을 냈으니 괜찮겠지, 단순하게 생각하면서 도서관 신간도서 코너에 올라와 있는 걸 골랐다. 근데 책 앞날개에 실린 사진을 보니, 어라, 벌써 시간의 손톱이 몇 번 할퀸 듯한 사진이 실려 있다. 작가 소개도 내가 읽어본 가운데 제일 짤막하다.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그렇군. 조선일보 신춘문예 출신인데 창비에서 책을 내? 조금 더 뒤져보니까, 경기도 동두천 출신의 1966년생이란다. 그러면 50대에 등단을 했고, 책 저 뒤편에 있는 “작가의 말”로 추측해보면 이상李箱의 레몬을 찾아 헤맨, 즉 십 년가웃의 습작시절이 있었음 직하다. 어디까지나 추측임을 전제로 말하건대, 40대에 습작 시작, 만 쉰하나에 등단, 쉰일곱에 첫번째 단편집을 낸 거다. 흠. 밥벌이는 따로 있겠군 그래. 아니면 고마우신 마나님이 벌어 먹여주어, 명선생은 1년에 5백 파운드의 가욋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었겠고.
여기까지는 그냥 농담이다. 이제 나올 진심은, 첫번째 단편집이라 하더라도 작품 속엔 오랜 공력이 담겨있다는 거. 구태여 문장을 섬세하거나, 감각적이거나, 중의적이거나, 비유의 혼돈 속에 머물게 하지 않는다. 단편답게 이야기가 곁가지로 흐르지 않으면서 제대로 스토리 라인을 따라 걷는다.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요즘 우리나라 작가들의 화법과 차이가 나서,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고만고만하지 않아 더 눈에 확 띄었는지도. 나는 즙 짜는 것, 즉 감정의 과잉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울의 골짜기는 혐오한다. 피 토하면 불쾌하고. 하필이면 내가 근래에 읽은 작품들만 그랬겠지. 시, 소설이 대개 그랬다. 희곡은? 너무 많이 벗기고, 죽여서 끔찍했다. 인생 두 번째 책 읽기에 접어든 내가 주로 다른 나라 작품에 몰두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다.
그런데 명학수는 다르네. 좀 일찍 습작을 시작하고, 15년만 더 빨리 등단을 해서 계속 작품을 써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물론 단편집 달랑 한 권 읽고 한 방에 이리 상찬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지만, 여덟 편이 담긴 책 안에서 <호수>,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은하>, 이렇게 네 편이 마음에 들었다면 꽤 쏠쏠한 수확이다.
<호수>. 그렇고 그런 세미나에 초청을 받아 콘도형 리조트에 간 작가, 화자 ‘나’. 비는 오고, 세미나에 참석하기 싫고, 밖에 나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있는데, 옆에 있던 여자가 우산을 쓰고 가더니 잠깐 서서 ‘나’에게 말한다. “같이 쓰실래요?” 그렇게 했다. ‘나’는 이 동네에 있다고 들은 호수가에 가 매운탕에 소주 한 병 하려 했다니까, 여자는 시내에 닭백숙 잘 한다는 곳이 있어 거기 가는 길이라고 같이 가겠느냐고 한다. 그렇게 했다. 호수가 정말 이 근동에 있기나 하나? 있었단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나>. 수진은 고등학교 문예부 동창들과 십년 만에 만났다. 수진, 세영, 종수, 영민, 지연 등등과 함께 1차 하고, 2차 하고, 3차로 등단한지 3년이 된 잘 나가는 작가 기훈의 오피스텔로 갔다. 석촌호수의 오피스텔에 고등학교 졸업하고 십년 밖에 안 되는 청년이 혼자 살면, 부모를 잘 만났거나, 20대에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행운아다. 문제는 다들 술을 많이 마셨고, 수진이 두통이 생겨 기훈이 준 진통제를 먹었는데 오히려 더 심해져 구토도 하고 정신을 잃어 침실에 들어가 기훈의 침대 위에서 잤다는 거다. 새벽에 일어나 도망치듯 가면서 보니, 기훈은 거실 소파에서 자고 있고, 나머지 친구들은 한 명도 없다. 기훈은 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몰카를 찍었다는 소문이 돌던 모범생이었다. 수진은 혼돈에 빠진다. 나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대학 4학년생 커플. 5월에 지하철을 타고 서울랜드로 데이트를 가려다가 하도 가족단위 승객들이 많아 엉겁결에 과천 경마장, 요즘 말로 경마공원에서 내린다. 그냥 재미로 복승식 마권을 사서 돈을 건다. 근데 신기하지, 영주가 배팅한 말 두 마리가 1등, 2등으로 들어와 32.5배의 배당을 받는다. 물론 약간의 세금은 제하고. 말에 관한 아무런 정보와 지식 없이 아홉 마리 가운데 두 마리를 맞힐 확률은 9C2, 9!/(2!*7!), 즉 36분의 1이다. 두 번 연속 맞힐 확률은 (1/36)^2=1/1296. 세 번 연속 맞힐 확률은 (1/36)^3=1/46656. 쉽게 말해서 영주는 계속 맞힌다. 뭐가 씌운 게 확실하다.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계속, 계속. 그러다가 ‘나’의 형이 결혼을 하는 바람에 한 주를 쉬는데, 어떻게 되게? 읽어 보셔야지.
<은하>. 합평 수업이라고 있다면서? “라떼”는 그런 거 없어서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하여간 합평을 했다니 문과거나 문창과 재학중일 커플이 주인공들이다.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열일곱 살 커플의 임신, 출산, 육아기가 있었다. 어느 소설가가 그걸 소설로 써서 제목을 <은하>라고 했다. 커플은 다퉜다. ‘나’는 미니홈피 내용도, 그 소설에도 관심이 없었는데 미영은 허구가 아니라 더 흥미를 느꼈다. 시간이 지나 ‘나’는 군대에 갔고, 미영은 강릉으로 떠나 그걸로 이별이었다. 몸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지는 게 진리니까. 그러나 몇 년 후, 미영은 소설집 《은하》를 출간해 단박에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한다. 찌질한 ‘나’는 미영의 팬미팅에 졸졸 따라가서 뭔가를 물어보려 한다.
재미있게 읽은 순서다. 당연히 읽는 사람마다 재미있는 작품이 다를 수 있고, 순서도 다를 수 있다. 그게 정상이다. 그러니 내가 꼽은 작품과 순서가 당신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양해하시고 그냥 넘어가기 바란다.
명학수. 얼른 장편도 하나 쓰기 바란다. 너무 늦게 시작했다. 이제 쓸 수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진심으로 바란다. 고목나무에 꽃이 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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