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한 멜모스·아듀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파롤앤(PAROLE&)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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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정도 분량이면, 다른 작가한테는 중편이겠지만 적어도 발자크는 그냥 단편이라 해야 할 두 작품을 실었다. <회개한 멜모스>와 <아듀>의 공통점이라면 1812년 모스크바를 함락하기는 했지만 추위에 뒷덜미를 잡힌 프랑스군 최악의 퇴각전투인 “베레지나 도하” 참전 군인을 다루고 있다는 거다. <아듀>는 아예 내놓고 전투 장면을 상세 묘사하고 있다. 당연히 발자크가 썼으니 실제보다 더 혹독하고, 비참하고, 춥고, 살 떨리는 장면의 연속상영이다. 그리하여 <아듀>에 관해서는 독후감 열라 써봤자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이거야말로 백문이불여일견, 아무쪼록 직접 읽어 보시기 권하고, <회개한 멜모스>를 이야기해보자.


  <회개한 멜모스>는 금천출납계원이라는 직업인에 대한 발자크 식 설레발로 시작한다. 사회계에서 문명이 밪어낸 희한한 인간종이며 인간의 형상을 한 피조물이라고 했으니, 이게 인간, 즉 사람이란 얘기인지 사람도 아니라는 뜻인지 독자를 현혹하기 시작한다. 발자크의 눈부신 구라를 그래도 소개해보자.


  “영락없는 인간의 형상을 한 피조물인 그 종은 신앙심을 통해 수분을 공급받고 단두대라는 지지대로 줄기를 꼿꼿이 세우지만, 악행의 손으로 자잘하게 가지치기되면서 건물 4층에서 참한 아내와 성가신 아이들에 둘러싸여 나무처럼 자란다. 파리에 서식하는 금전출납계원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두고두고 생리학자를 괴롭히는 문제로 남을 것이다.” (p.10)


  이어서 발자크는 독자에게 질문하기 시작한다.


  “덫에 갇힌 생쥐를 앞에 둔 고양이처럼 항상 돈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을 떠올려보시겠는가? 방범 철창이 쳐진 좁은 공간 속에서 일 년의 7/8을 매일 7시간에서 8시간 동안 등나무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선박 조타실에 못 박혀 있는 항해사보다도 덜 움직이는 재주를 지닌 사람을 떠올려보시겠는가? 그런 일에 종사하면서도 무릎이나 골반 관절에 경직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을 떠올려보시겠는가? 왜소하다고 할 만한 몸집을 가진 사람은? 돈을 하도 많이 다루어서 돈이라면 신물이 날 법한 사람은?” (p.11)


  발자크가 관찰하고 경험한 금전출납계원은 역사를 이 잡듯 뒤져봐도 번듯한 지위라고 할 만한 자리에 올라간 계원을 발견할 수 없었고, 결국엔 중죄인 감옥에 수감되거나, 외국으로 도피하거나, 마레지구 생 루이가의 어느 집 3층에서 죽은 듯이 살게 된단다. 이 당시 파리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층이 위로 올라갈수록 가난한 사람들이었다니, 생 루이가의 3층에서 “죽은 듯이” 산다는 걸 보면 결국 인생이 찌그러진다는 뜻이겠다. 금전출납계원. 지금 시대에는 거의 사라진 직종이다. 은행에 가면 플라스틱 박스 안에서 주로 현금을 내주고 받는 행원을 말한다. 현금 시대에는 은행마다 있었는데 지금은 본 것 같기도 하고 못 본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왜 발자크가 이렇게 하루 종일 지독한 돈 냄새를 맡으며 박봉에 시달리는 사람들한테 박한 평가를 했는가 하면, 견물생심이라고, 돈을 자꾸 만지기는 하지만 정작 자신이 필요한 만큼 돈이 없는 사람한테 사고가 생길 위험이 높기 때문이다. 나도 살면서 봤다. 돈 액수에 민감해지지 못하는 은행원. 출납계원과 은행,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다.


  부오나파르테 나폴레옹이 쌍코피가 터지고나서 프랑스에선 루이 18세가 왕정을 복고한다. 이 시절인 1815년 이후 돈의 원칙이 명예의 원칙을 대체해 우리 문명의 진정한 상처를 입혔다고 발자크는 주장하는데, 뭐 잘 모르겠다. 상처입은 “우리 문명”에서 ‘우리’의 범위에 아시아인이 들어가는지 아닌지도 모르겠고. 하여간 이 시절 프랑스 파리 생-라자르 가에 뉘싱겐 남작이 자기 이름을 따 “뉘싱겐 은행”을 세우고, 1813년 모스크바 퇴각 당시 자신도 참전한 바 있는 스투드장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퇴역장교, 명예 대령인 카스타니에 씨를 월급 5백 프랑의 현금출납계원으로 고용한다. 카스타니에는 정수리가 빤질빤질한 대머리의 사십줄에 접어든 사내로 반백의 관자놀이에 동그란 얼굴이며, 뉘싱겐 남작처럼 윗옷 가슴에 레지옹도뇌르 훈장의 약장을 달고 다닌다. 나폴레옹 제정 시대 용기병 대대의 지휘관이었으며 부상당해 2천4백 프랑의 퇴직금을 받고 제대한 인물이다. 은행에서는 현금 출납 외에 가장 핵심인 회계장부 업무도 지휘하고 있다. 그러니까 은행장의 핵심 측근이라는 말씀.

  이 날도 카스타니에는 일과를 마치고 은행문을 닫은 후에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여러 은행 앞으로 발행된 신용장 중에서 런던의 와차일딘 은행 앞으로 발행한 신용장을 집어 들더니, 세상에, 뉘싱겐 행장의 서명을 위조해 슥슥, 신용장에 사인을 했다. 나는 작품을 다 읽었으니 어떤 서명인 줄 안다. 귀 와차일딘 은행께서는 폐 뉘싱겐 은행이 보증하오니 위에 밝힌 카스타니에 선생에게 현금 1백만 프랑을 지급해주시기 바랍니다. 남작 뉘싱겐 서명. 이제 이 한 장을 가지고 런던 와차일딘 은행에 가면 즉시 1백만 프랑에 해당하는 세계 각국의 돈을 받을 수 있게 된 거다. 오늘은 토요일. 내일은 휴무인 일요일. 월요일은 내용은 모르겠지만 출근하지 않기로 합의가 된 날이고, 화요일 정오에 나오기로 했으니 카스타니에는 적어도 3박4일의 시간을 벌어 놓았다. 이 동안 런던에 가서 현금을 찾고 위조한 여권과 변장을 위해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에 이탈리아 피렌체로 가서 페라로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여생을 즐기기만 하면 되는 거다. 페라로 백작은 1813년 젬빈 늪지 전투에서 죽은 불쌍한 대령이다. 이 젬빈 늪지 전투가 뒤에 실린 <아듀>의 핵심 장면이라서 이렇게 저렇게 다 연결이 된다니까.

  하여간 이렇게 신용장 또는 약속어음을 봉투에 담고 속주머니에 넣은 카스타니에는 왜 이 위험한 장난을 할까? 뭐긴 뭐야? 19세기 프랑스 소설에서. 여자 때문이지. 아킬리나. ‘나키’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이 어린 불여우는 사십대 카스타니에의 정부가 되면서 겉으로는 그냥 아닌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면서도 남자가 스스로, 알아서, 자동적으로 온통 비싼 가구, 옷, 귀금속, 보석, 신발, 언더웨어를 사 바치게 만들었다. 2천4백 프랑의 퇴직금과 월급 5백 프랑만 가지고 있던 퇴직 명예 대령 카스타니에는 애초에 정부를 둘 처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미 저질러버렸으니 이걸 어떻게 해. 이제 신용장에 서명하고 속주머니에 넣은 찰라, 에그머니, 이미 은행문을 닫아 걸었건만, 현금출납 철창 뒤편 작은 창구에서 웬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는 거다. 영국인처럼 보이는데, 프랑스 사람이 영국인을 예쁘장하게 그릴 수 없는 법. 발자크 눈에는, 시체의 피를 빨아먹은 것 같은 차가운 기운이 감도는 붉은 입술의 30대 남자. 그는 어음을 현금 50만 프랑으로 교환하러 온 고객으로 이름을 존 멜모스라고 영수 서명했다. 이제야 멜모스가 나온다. 카스타니에가 약속어음을 받으니 희한도 하지, 돈을 주려는 순간, 그가 없어졌다. 돈을 받았다고 서명을 했지, 금고에서 돈도 꺼냈지, 지금 문을 닫으면 화요일 정오에나 열지, 카스타니에는 당연히 현금 50만 프랑도 자기 주머니 속에 넣는다. 일을 다 마친 카스타니에는 남작이 없을 때 늘 그렇듯이 남작부인, <고리오 영감>에 나오는 젊은 대학생 라스티냐크의 애인이기도 한 남작부인에게 런던의 와차일딘 은행에서 발행한 약속어음 50만 프랑을 지급했다고 보고하고 드디어 퇴근한다.


  길거리로 나온 카스타니에. 그는 잠깐 즐거운 고민을 한다. 오늘은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정부 아킬리나와 함께 극장에 가서 좋은 시간을 즐기고, 내일 일어나 마르세유로 갈 때는 아킬리나를 데려가야 하나, 데려가지 말아야 하나? 그는 손바닥에 침을 탁 뱉은 다음에 오른손 손가락으로 손바닥을 탁 때려 오른쪽으로 튀면 데려가고, 왼쪽으로 튀면 피렌체에서 새 애인을 찾는 걸로 하고 손을 번쩍 든 순간, 등 뒤가 서늘해 뒤돌아보니, 에그머니, 영국인이 또 나타난 거다. 존 멜모스가. 키 큰 멜모스가 카스타니에의 귀 가까이에서 속삭인다.

  “너는 그녀를 데리고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더니 다시 선언하기를,

  “너는 떠나지 못할 것이다!”

  결론은? 언제나 불행한 예언은 들어맞는 법이다. 발자크는 결코 당신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지는 않겠지만. 궁금하시지? 얼른 도서관 가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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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6-21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크리스토프 하인, <호른의 죽음>
수요일. 쥴퓌 리바넬리, <호랑이 등에서>
금요일. 송지현, 《이를테면 에필로그의 방식으로》

stella.K 2024-06-21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우리의 발자크 옹께서 이런 단편을 쓰셨다니 저도 좀 놀라운데요? 부담은 적을 듯하지만 왠지 그의 악마같은 표현은 여전히 만만치 않을 것 같네요. ㅋ

Falstaff 2024-06-21 15:41   좋아요 1 | URL
발자크 치고는 장황한 편 아닙니다. 책이 얇아서 권하게 되지는 않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