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사람
김숨 지음 / 모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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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9월 16일. 이날 하루 부산 이곳에서 많은 뜨내기들과 토박이들이 얽히고설킨 이야기와 그들의 지난 경험을 모은 책. 표지에 “김숨 장편소설”이라 박혀 있어 독자는 자연스럽게 언제 주인공이 출현하는지 촉각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백 쪽에 육박할 때까지 도무지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을 찾을 수 없을 때쯤, 이 작품이 수많은 인물의 단상을 연결해 1947년 당시 부산의 모습을 그렸구나, 짐작할 수 있다. 즉, 많은 등장인물은 어떤 방식으로라도, 길을 지나다 옷깃도 스치지 않고 그냥 서로 지나치기도 한다. 초판이 2023년. 무대는 1947년. 76년 세월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다. 당시의 거리, 물가, 의상, 언어를 그대로 되살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자료와 사진을 많이 궁리하고 들여다보면 훨씬 도움이 되겠지만 특히 언어는 가능하지 않다. 김숨도 현명하게 작품 속에서 부산 사투리나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구사하는 사투리 대신 거의 현대 표준말을 사용했다. 나는 김숨이 쓴 <바느질하는 여자>를 읽었다. 그러나 준수한 작품 속에서 너무도 많은 오류를 발견하는 바람에 이번에 읽은 <잃어버린 사람>은 겉으로만 훌훌 훑었을 뿐 꼼꼼하게 읽지 않았다. <바느질…>처럼 오류투성이 명작일까봐.

  이번에도 참 유려한 문장이다. 너무 유려하고, 섬세하고, 어떤 때는 화려하다. 수식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침에 죽 끓여먹고 점심과 저녁은 냉수 한 사발로 대신하는 극빈자일지언정. 작품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검은 새 하나가 쇠사슬에 매달린 저울추처럼, 땅이라는 접시 위에 오롯이 놓인 세상과 무게를 겨누며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한다.”

  여기 나오는 “검은 새”는 정말로 조류, 하늘을 나는 새를 말한다. 요즘에도 이렇게 쓰는 작가가 있다. 까마귀? 까치? 정확하게 새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검은 새로 일컫는 이 조류는 책이 끝날 즈음에 한 번 더 나온다. 새 “한 마리”가 아닌 물질 “하나”가 하늘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광경을 이렇게 쓴 거다. 하필이면 그 하나가 “쇠사슬에 매달린 저울추”라고 쇳덩어리를 연상해 그냥 중력방향으로 꽂히고 마는 단단한 것, 그래서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 대신, 이게 도대체 뭘 은유하는 것일까, 쓸데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는 부두를 이렇게 묘사한다.

  “바다에 반사돼 생겨난 빛까지 더해지자, 부두는 썩은 고구마 같은 몰골로 죽어 있는 생쥐의 부패한 눈동자마저도 금은보화처럼 영롱히 반짝일 만큼 빛으로 넘쳐난다.”

  어떤 광경인지는 알겠는데, 좀 심한 거 같지 않나? 도무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수사법 교범을 읽는 기분이 들만큼 극한의 미문이 촘촘하게 박여 있다. 마음먹고 인용 해야겠다, 싶은 문장이 있었지만 본문만 650쪽이 넘어가는 책이라 그 문장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글 좋은 건 알겠는데, 좀 심하다. 다듬고 쪼고 갈아 만든 문장도 과하면 질릴 수 있구나.


  그래도 가장 많은 빈도로 출연하는 등장인물이 애신. 어린 나이에 정신대로 끌려가 만주 일대에서 종군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해방 이후 귀국해 집에서는 일본군 군복 만드는 공장에 있었다고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속으로 믿지 않는 눈치지만 이런 거야 안 믿으면 서로 속만 썩는 거라서 그냥 믿기로 작정해주었다는 것이 표가 났다. 때마침 부산 미도리마치, 녹정綠町, 1916년 일제가 서구 충무로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공창지역에서 윤락여성으로 있는 친구가 해운대 사진이 찍힌 엽서를 보내 자기한테 오면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번 한 것을 철썩 같이 믿고 부산에 도착한다. 언제? 1947년 9월 16일에. 부산진역에 내린 애신은 여러 사람한테 길을 물어가며 내년인 1948년엔 달을 보며 즐기는 동네 완월동으로 개명하고, 1982년엔 다시 충무동으로 이름을 바꿀 곳을 향해 걸어간다. 가는 길에 조선 남자와 결혼해 패전 후 남편을 따라 조선에 왔다가 소박맞고 돌아갈 뱃삯도 없어 거지꼴이 된 일본 여성도 만나고, 전혀 쓸모없는 금붕어 한 마리가 든 어항도 사고, 실물보다 예쁘게 보인다는 거울도 선물로 산다. 그렇게 오후가 되어서야 언덕배기의 영업장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야한 원피스를 입은 친구를 만나, 아마도 친구와 비슷한 일을 할 것 같다. 짐작이다. 그렇다는 말은 없다. 이곳의 친구는 애신과 같은 위안소에서 위안부로 있다가 귀국해 집에 가서 부모한테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할 용기가 없어 미도리마치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을 듯.

  등장인물 거의 다 이동거리가 긴 편이지만 애신이 부산진역에서 미도리마치까지 하루 종일 걷는 역할이라 걸으면서 앞에서 이야기했듯 다른 등장인물과 제일 많이 스쳐 지나가면서 인연이면 인연이랄 수 있는 만남을, 대부분 하루만 지나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만나 인물들끼리 얽힌 고리를 만든다. 도대체 몇 명이나 등장하는데 그러느냐고? 모르겠다. 안 세 봤다.


  일제강점기를 마감한 미군정기의 부산. 일본과 중국으로 떠난 징용/유민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고,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소위 야매배를 타고 오는 바람에 빈손으로 도착한 조국. 그들이 전부 고향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숱한 사람들이 부산에 남아 거친 노동에 종사했고, 삼팔선 이남 지역에서도 미군들의 도착지라서 일자리가 제일 많다는 소문을 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몰려들었다. 이 가운데 김숨이 주목한 것은, 일본과 중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왔으나 고향에 가지 못한 군상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반 강제 징용살이를 하다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얼굴과 손이 뭉그러진 사내, 도끼 같은 사람들. 간도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종잣돈을 마련해 은붙이 장사를 하며 중국 각지를 떠돌다 상하이 귀국길에 사기를 당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 천복. 앞에서 이야기했던 버림받은 일본인 처 가쓰코, 시나마치 거리 중국음식점 춘화원 사장 천서방의 치파오를 입은 중국인 며느리를 위해서도 한 꼭지 씩을 마련해두었다. 당연히 부산 토박이들도 대거 등장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인물은 모지포의 가장 늙은 과부 쑥국과 재작년 입춘 무렵에 풍을 맞아 얼굴이 조금 돌아가고 팔이 불편한 백발의 어부 말똥. 말똥은 돛이 하나 달린 외돛배를 타고 나가 생선을 잡는데 유난히 쇳빛나는 물고기를 많이 잡는다. 사실 여부는 다음으로 하고, 김숨은 이 쇳빛 물고기를 ‘다금바리’라고 말한다. 말똥은 어려서부터 거의 이 물고기를 먹고 자랐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라는데, 그게 부산 근해에서 그리 많이 잡혔나? 하여간 이 날 새벽에도 다금바리를 몇 마리 건져 들고 오다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쑥국 할머니 집 울타리 넘어 휙 던진다. 마당에 앉았던 쑥국 할머니는 눈이 지물지물하지만 귀는 잘 들려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그게 다금바리인 것을 알고 냅다 문밖으로 달려나갔지만 그새에 골목엔 아무도 없다. 조금 지나 오중, 오정을 넘어 점심 때가 됐고, 쑥국은 다금바리를 손에 들고 동네의 끝에서 다른 끝 쪽으로 걸어간다. 그곳에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외로운 여자 혼자 사는 집이 있다는 걸 알아서, 먹을 것을 나누기 위하여. 이 시간에 15년 전에 집을 뛰쳐나간 아들 호식이 억새밭을 뚫고 길을 찾아 옛집으로 오고 있다는 건 쑥국이 알 턱이 없다.

  낳은 아이마다 몇날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다음에 낳은 아이한테 명줄을 붙들고 있으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들이라 지었다. 붙들은 곡정 까치고개에서 나이 깨나 들도록 살았다. 그러다 1947년 9월 16일이 왔다. 까치고개에 움막을 짓고 들어와 사는 아낙네가 이날 아침에 아이를 낳고 삼을 갈랐다(삼을 가르다 = 탯줄을 자르다. 이 단어가 몇 번 나온다). 없는 집에서 산모가 조리는커녕 밥이나 한 끼 제대로 먹었을까 싶은 붙들이. 붙들이는 직접 겨울 바다에 나가 바위에 붙은 걸 낫으로 베어내 말린 미역과 말린 갈치를 쑴벙쑴벙 썰어 넣어 끓인 미역국을 들고 산모를 찾아간다. 땜질한 자국이 많은 양은 솥을 높이 걸고, 늙은 땔감 장수 옆에 앉은 젊은 땔감 장수한테 산 땔감으로 불을 피워 국수를 한 솥 끓여 이제 새롭게 장사를 시작한 석분은 작품이 끝날 때쯤 해서 자기 양은 솥보다 한뼘은 더 큰 양은솥을 발견하고 모른 척, 시치미 뚝 떼고 손수레에 싣고 가버린다. 조금 후 풀밭에서 오줌을 누고 나온 아낙네가 자기 양은솥이 없어진 걸 알고 땅바닥에 철퍽 주저앉아 망연히 한숨을 쉬고.


  참 없던 시절에 없이 살던 사람들의 초상.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이 다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문장 때문에 리얼한 느낌이 감해졌다고 말하면 그게 못 배운 티를 내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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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2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하면 질릴 수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Falstaff 2024-04-22 16:00   좋아요 1 | URL
그럼요, 뭐든지 마찬가지지요. ㅎㅎㅎ 저도 독후감을 너무 많이 쓴 거 같아서 말입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