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 대산세계문학총서 186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지음, 차윤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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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 책을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작곡한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앞 이야기, 그러니까 오페라가 시작하기 전에 트리스탄이 출생하게 된 것부터 이졸데를 만나 마르케 왕의 비로 배에 태워 오게 된 사연을 확실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페라 대본을 따라가면 이졸데 삼촌의 머리뼈에 박힌 칼의 조각도 나오고, 전투 중에 큰 부상을 입은 트리스탄을 이졸데가 치료해주었다는 것도 나오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 줄도 몰랐다. 또 고전소설을 읽으면 트리스탄이 용을 죽이기도 했다는데 그건 또 무슨 말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이제 책을 다 읽어 눈이 훤하게 뜨인다. 그래? 트리스탄이 용도 죽였다고? 그거 참 별일이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 역시 여러 판본이 있는 모양이다. 역자 해설에는 1160년대에 토마스 폰 브리타니아가 고대 프랑스어로 앵글로 노르만 버전 <트리스탄>을 썼고 이것을 오늘 읽은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가 큰 줄거리는 그대로 사용하되 작품의 중요한 전환을 이루는 장면에 중세 기독교 극성기엔 금기였던 사기결혼, 마법의 약물, 혼외정사, 불륜 같은, 이것들이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거나 설명하기 힘든 내용을 과감하게 삽입해 다시 썼다고 한다. 여기에 마이스터 고트프리트는 후원자일 것 같지만 아닐 수도 있는 디트리히 백작에게 헌정하는 형식으로 글을 써서, 피헌정자에게 설명하는 형식을 취해 사랑과 (사랑의 동의어이기도 한)고통, 질투, 시기, 음모 같은 현상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글씨체를 달리 해,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물론 이 작품이 나오고 8백년 이상이 지나 마이스터 고트프리트가 주장하는 내용의 7할은 공자왈, 맹자왈, 깨진 기와를 덮은 이끼 수준이라 읽기에 진력이 나기도 한다. 하여간 그렇다.


  작가이면서 화자이기도 한 고트프리트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를 “세상 누구보다도 순수한 사랑의 열망을 보여주었던 아름다운 연인들의 이야기”라고 새빨간 거짓말을 하면서 작품을 시작한다. 물론 작품이 나온 13세기 초가 마법의 시대라서 지금처럼 앞 뒤 따져가며 작품을 감상하는 건 무리겠지만, 세상에 사랑의 묘약이 어디 있니? 두 남녀가 눈이 맞아 결혼하러 가는 길에 사고 치고 적당히 둘러댈 말이 없으니 사랑의 묘약을 마셔서 그런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죄 없다, 발뺌하는 것이지. 그럼에도 이 이야기에 사랑으로 인한 고뇌, 마음의 환희로 인한 상사병의 고통이 없었더라면 높은 평가와 오랜 사랑을 받지 못했을 거란 의견에는 동의한다. 사랑? 당시에 휴대전화가 있나, 우표만 붙이면 날아가 소식을 전해주는 편지가 있나? 그저 연락이 두절되면 다시 이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데, 세상에,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고통이 바로 기다림이란 건 다들 아시리라 믿는다. 그건 나중의 일이고 먼저 파르메니에의 영주 리발린에 대하여 알아보자.

  파르메니에는 브리타니아 지방에 있다. 여기서 주목. ‘브리타니아’라니까 고대 잉글랜드라고 생각하시지? 프랑스 북서부 해안지역에 브르타뉴도 있다. 책에서도 브리타니아가 지금의 잉글랜드 섬을 말하는 브리타니아인지, 프랑스 브르타뉴인지 확실하게 언급하지 않고 슬쩍 넘어가지만, 영국 남서부 끝에 위치한 콘월과 파르메니에를 왕복하는 수단이 배이며, 후에 독일 땅에서 있을 예정인 전쟁에 배를 타지 않고 참전하는 걸로 보아 프랑스 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거 같다. 이 파르메니에의 영주 리발린으로 말하자면 혈통은 왕처럼 고귀하고 나라는 제후령 못지 않았으며, 세상 사람들의 즐거움이자 기사도의 모범이라, 통치자와 기사의 덕목에 있어 일족의 자랑이자 나라의 희망으로 칭송받았다.

  당연히 파르메니에와 리발린도 우환이 하나 있으니, 모르간을 영주로 하는 호전적인 이웃 영지가 틈이 날 때마다 경계를 넘어 노략질을 일삼고 변경지역에 공물을 요구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 동안 두 영주가 기사들을 이끌고 싸움을 했지만 승부를 가리지 않고 두 진영 다 막심한 피해를 입을 뿐이었다. 이제 두 진영의 국력을 모두 쏟아 일대 회전을 벌였으나 역시 둘 다 쌍코피만 줄줄 흐른 채 서로 얻는 것이 없어 불만이지만 화친까지는 아니고 적어도 일정 기간 휴전에 돌입하기로 서약했다.

  젊은 영주 리발린은 피가 끓어 도무지 영지 안에 틀어박힐 체질이 아니어서 나라와 백성의 “신의를 간직한” 충실한 총대장 로알 리 포이테난트에게 영지의 경영을 부탁하고 예법과 기사도를 배우기 위하여 마르케 궁전으로 배를 타고 출발한다. 콘월과 잉글랜드를 다스리고 있는 젊은 왕 마르케는 아서 왕의 탄생지이기도 한 틴타욜에 머물고 있어 그곳에 도착해 왕의 극진한 대접을 받는 리발린. 5월이 오자 왕은 봄을 맞아 4주에 달하는 큰 축제를 열어 잉글랜드의 모든 기사가 매혹적인 숙녀들을 대동하고 콘월에 집결한다. 여기서 리발린은 왕의 동생, ‘하얀 꽃’ ‘백합’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블란셰플루어를 소개받고 눈길을 교환하더니 즉각 자신이 블란셰플루어를, 그이가 자신 리발린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직감한다. 그러나 방문객이며 기사인 리발린이 왕의 여동생에게 함부로 접근할 수도 없고, 접근할 기회도 없어, 진정한 사랑이 그토록 아픈 고통인 줄 몰랐다.

  축제가 끝나자 마르케 왕의 가장 강력한 적이 콘월 땅을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선에서 들려왔다. 마르케는 즉각 전군을 소집했고, 리발린 역시, 당연하게 자발적으로 참전을 희망해 은빛 갑옷을 받쳐 입고 높은 말 위에서 장창을 꼬나 쥐고 적진을 향해 돌진한다. 적들에 둘러싸여 고군분투하다가 드디어 적장을 단 칼에 베는 데는 성공했으나 자신 역시 옆구리를 창에 찔리는 중상을 입어 실려오는 처지.

  상처가 곪아 악취가 진동하고 정신이 혼미해 북망산을 헤매기를 몇 주. 여기에 고통 속에서 침묵을 지키며 우울하게 지내는 것이 일상이 된 또 다른 청춘 하나가 있었으니 블란셰플루어. 이 젊은 여성은 비단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거지 차림을 한 후, 자기를 여의사라 거짓 증명하고 리발린의 죽음의 침상에 들어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뭐 치료를 할 줄 알아야지. 치료를 하기는 한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녀는:

  “연인을 팔에 안고 자기 입술을 그의 입술에 대고 입술이 그 안에서 사랑의 욕망과 힘이 불타오를 때까지 짧은 시간 동안 수없이 키스를 했다. 왜냐하면 사랑이 그녀의 입술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입술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고 엄청난 힘을 불어넣어서, 그는 그 멋진 여인을 반쯤 죽어가는 자신의 몸으로 바짝 끌어당겨 밀착시켰다. 두 사람의 욕망이 채워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사랑스러운 여인은 그의 아이를 배었다.”

  크. 죽어가는 와중에도 했네, 했어. 작품의 시기가 13세기 초. 1210년경. 이 당시에 귀족계급에서 혼전임신은 전혀 용인이 되지 않았다. 심지어 처녀가 아닌 여성이 결혼하는 것도 당사자의 명예에 심각한 스크래치가 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마이스터 고트프리트는 과감하게 혼전관계에 이은 혼전임신을 나름대로의 러브씬과 함께 선보이고 있다. 비록 오래 걸리지 않았던 섹스지만 이걸로 리발린은 기사회생하여 차츰 건강을 회복한다. 그게 건강에 좋다니까, 글쎄.

  원래 주인공한테는 오래 쉴 시간이 없는 법이라 이제 상처도 회복하고 좀 즐길 만하니까 조국 페르메니에에서 전갈이 오기를 모르간이 다시 쳐들어왔단다. 허겁지겁 다시 갑옷과 무기를 챙겨 귀국 배에 오르려니 블란셰플루어가 득달같이 달려와, 여보 리발린 경, 나는 어쩌라고 혼자 튀십니까? 그깟 명예고 뭐고 간에 문제가 아니라 이 몸에 있을 게 없으니 이걸 어떻게 한대요? 우리의 리발린은 두 번 이야기할 거 없이 블란셰플루어를 옆구리에 끼고 야밤에 배에 올라 출항시켜버린다.

  중세 기사 이야기에서 주인공은 자주 출생과 동시에 큰 비극을 당한다. <니벨룽겐의 반지>에서 지크프리트는 엄마 지클린데가 임신하고 하루, 아니, 몇 시간 지나 아빠 지크문트가 훈딩의 칼에 맞아 죽는다. 그것도 모자라 지클린데도 지크프리트를 낳다가 산고로 죽어버려 악당 난장이 미메가 데려다 키운다. 이 작품에서도 전례를 따라 리발린은 모르간과 치열하게 싸우다 전장에서 죽음을 당해 방패 위에 시신을 올려 실어오고, 블란셰플루어는 지클린데처럼 아들을 낳은 직후에 숨이 넘어간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우리의 주인공 트리스탄. 그래도 다행스럽게 리발린에게는 충성스러운 대장군 루알 리 포이테난트가 있어서, 장군은 트리스탄을 자신의 두 친아들보다 훨씬 더 공을 들여 세상의 모든 언어, 음악과 악기, 노래, 무공, 말타기를 익히게 해 당대 최고의 기사로 만드는 데 성공해, 이 아이가 자라 스무살이 넘어 드디어 외삼촌 마르케 왕을 찾아가 우리가 아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전설을 만들어가게 한다.

  이졸데 관련해서는 이야기를 아껴두겠다. 혹시 당신도 읽을 지 모르니까.


  처음에 말했듯이 나는 흥미진진하게 읽었다. 하지만 당신까지 이 작품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는 못하겠다. 나는 내내 궁금했던 것을 시원하게 풀 수 있는 기회였던 반면 당신한테는 서양 옛이야기 한 편일 수도 있으니. 그런데 13세기 초 소설에서 이 정도면 엽기 포르노 취급을 당해 종교재판 대상 아니었을까? 걱정 마시라. 마이스터 고트프리트는 이 작품을 미완성으로 남겨놓고 생을 마감했다.



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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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15 14: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다 죽어가면서도 ㅋㅋㅋㅋ그걸하다니 ㅋㅋㅋㅋ 아놔 ㅋㅋㅋ 그리고 그 한방에 애까지!! ㅋㅋㅋㅋㅋㅋㅋㅋ 그 의사쌤 치료법 아주 신통방통하구먼요.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4-15 15:34   좋아요 0 | URL
글쎄 그게 몸에 무척 좋은 거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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