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裁·縫)-고 할머니 편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24
왕팅팅.스류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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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젊은 여성 극작가 왕팅팅王婷婷과 스류石榴의 공동작업으로 2017년에 74세가 되는 여인인 고할머니老顧를, 2037년 94세(59쪽)의 고할머니와 오버랩 시켰다. 역자 해설에 의하면 모옌의 <개구리>에서 재미있게 이야기했듯이 적극적인 산아제한 정책의 결과로 중국도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는 인구 감소의 딜레마에 빠져 2035년이 되면 노인 인구가 무려 4억 8천만, 전체 중국 인구의 1/3에 육박한다. 이를 주목한 연출자 왕팅팅王婷婷(우리말로 다시 쓰면 ‘왕이뻐이뻐’쯤 된다)은 당연히 주류에서 이탈, 소외될/소외된 노인들을 인터뷰했고, 그 내용을 토대로 희곡을 쓴 것이 <재裁∙봉縫 – 고할머니편>이다. 작품을 지은이들이 두 명의 여성이었으며, 등장인물 또한 아직 생일이 지나지 않아 73세인 여성, 할머니라서 1944년생 중국여성이 걸어온 사회문화적 허들이 어떻게 이 여성의 삶에 고단함을 입혔는지에 초점을 맞추게 된다.


  1944년생. 다섯 살 때인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되고, 고할머니는 어린 나이부터 좋지 않은 출신 성분으로 고생길이 훤하다. 그래도 배워야 산다는 건 부르주아에 가까워서 출신성분이 좋지 않을수록 잘 아는 법이라 당시에 여자라도 간신히 대학을 졸업했지만 아뿔싸 이제 일을 해 가문에 보탬이 될까 싶을 때 문화혁명이 쳐들어온다. 말로만 쳐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홍위군을 자칭한 일단의 무리가 집까지 몰려들어 자아비판과 조리돌림을 해대는 난리통을 겪는다. 나이가 차면 신체와 정신에 특별한 하자가 없는 한 한 남자와 혼인하여 아이 하나를 낳고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알아 별로 원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밉상도 아닌 남자한테 결혼을 당해 살아야 했다. 살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재봉일, 요새 말로 의상 디자이너 숍을 그렇게 내고 싶었지만 결국 남편 바라지와 아이 키우기, 그리고 여자가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사회 통념 또는 저항 때문에 이루지 못한다. 아이가 다 크면 이제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며, 남편 역시 나이를 먹었어도 여전히 꽉 막힌 상태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어느새 일흔셋. 아들은 결혼하여 딸 뤼뤼를 낳더니 엄마보고 키워달라 한다. 몇 년을 키워 정을 흠뻑 쏟아 그 재미로 살려 했건만 이젠 직접 기르겠다고 데려간 지도 오래다. 늙은 남편은 겁도 없이 여전히 좌변기 앞에 서서 오줌을 누어 그때마다 아내가 솔을 들고 벅벅 문질러 닦아야 한다. 정말 나서 그러는지 아니면 날 것이라 뇌가 명령을 해 그렇게 느끼는지 오줌 지린내에 고개를 절래절래 저어가며. 변기를 문질러 닦으면서 고할머니는 남편에게, 이젠 그만 살자고, 더는 이렇게 살지 못한다고, 이혼을 요구하고, 평생 처음으로 자신이 뭔가를 자발적으로 결정해 가정법원 이혼 서류에 인감도장을 꽉 눌러 찍어 버린다. 그래서 몇 십 년을 함께 산 노부부는 늙은 남편이 서서 오줌 눈다는 이유로 재裁, 옷衣을 다친(戈+十)다. 즉 잘라진다.


  그러나 사십여 성상을 함께 산 부부. 고할머니는 남편을 아파트 옆 동에 세를 얻어 살게 하고 삼시 세끼를 다 할머니 집에 와서 챙겨 먹게 하며, 여전히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쏟는다. 헤어졌지만 사실은 여전히 붙어 있는 상태로의 봉縫. 갈라섰지만 갈라지지는 않은 상태. 독자는 극이 끝날 즈음에 알게 되니, 이혼을 하고 조금 후 전남편이 된 노인이 이미 숨을 거두었음을.

  세월은 흘러흘러 2037년이 되었겠지. 이제 아흔세 살이 된 고할머니는 시장에 갔다가 먹음 직해보여 커다란 가재, 랍스터일 듯한 걸 사와서 요리를 하려다가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것이 먹기에 아까워 어항에 넣고 살려준다. 가재는 그것이 고마워 할머니에게 한 가지 소원을 말해보라 하고, 아흔셋의 할머니가 특별히 바라는 것이 없어서 가재에게 선택을 맡겨 지금부터 스무 살이 젊었던 시절, 일흔세 살의 자신과 이야기하고, 당시의 모습도 관찰한다. 이렇게 극은 아흔세 살의 고할머니가 일흔세 살의 고할머니의 삶을 바라보기도 하고 대화도 하는 장면으로 채워진다.

  이미 죽은 고할머니의 이혼한 전 남편은? 귀신이 아니라면 등장할 수 없겠지. 그러나 현대 기술이 있어서 오줌을 누며 그거 하나 제대로 조준을 하지 못해 아무데나 질질 흘리는 영감은 영상으로 만나고 대화할 수 있다. 일흔셋도 많은데 아흔셋이라니. 두 노년의 고할머니는 오랜 인생을 살아 이제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체득을 했다. 물론 이건 극작가/연출가인 왕팅팅과 스류가 많은 노인들을 인터뷰해서 알아낸 것이겠지만 여전히 죽은 전남편의 오줌 지린내가 코끝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 아직도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것, 이것들이 이제 그리 싫지 않은 것, 모든 게 다 합해 그게 지난 세월이라 하는 것들이 와닿는다.


극작가 왕팅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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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11 1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소개를보니 실제로 93세 배우가 역할을 맡았다고 하네요. 하긴 이순재 배우가 91세라니 9순에도 현역이 가능하네요. 대단합니다.
근데 2037년이면 근미래인데요?

Falstaff 2024-04-11 20:34   좋아요 1 | URL
넵. 책 속에 공연 장면 몇 컷이 나오는데요, 거기엔 93세 배우는 안 보입니다. 아무래도 대사도 짧고 동선도 활발하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실제 나이 근방의 배우를 캐스팅하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2037년.... 미래상에 관해서는 뭐 별거 없습니다. 방 밖으로 나가지 않으니까요. 현명한 선택 같았습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