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르칸트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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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로망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에서 시작해 요동반도, 베이징, 시안, 티벳을 거쳐, 아니면 몽골과 고비사막을 건넌 후, 카슈미르 고원을 거쳐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와 부하라, 그리고 이곳에서 길이 갈려 투르크메니스탄, 이란으로 갈 수도 있고, 북쪽의 카자흐스탄, 러시아를 건널 수도 있는 멀고 먼 황야, 그러나 곳곳에 숨은 보석 같은 아름다운 광활함에 대한 경의 또는 로망, 선망. 이런 꿈을 갖고 있으니 <사마르칸트>라는 제목의 책을 어떻게 읽지 않을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작가 아민 말루프는 레바논에서 태어나 베이루트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 생활을 하다 내전이 벌어지자 1976년에 프랑스로 귀화해 살며 프랑스어로 소설을 썼다. 이이와 비슷한 사람 가운데 <프랑스어의 실종>, <사랑, 판타지아>, <알제의 여인들>을 쓴 아시아 제바르도 있다. 제바르는 알제리 출신인 것만 다르다. <사마르칸트>는 1988년 작품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이 책의 역자 이원희가 1997년에 번역 출간했으나 절판 상태로 세월을 보내다 이번에 “교양인” 출판사를 통해 보완 개정판으로 나왔다. 역자가 직접 말했다. “역자는 당시 이슬람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부족했던 탓에 많이 미흡했던 번역을 보완하여 개정판을 내게 되었음을 이 자리를 빌려 밝힌다”고. 좋다, 독후감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말하겠다. 역자는 “이슬람에 대한 정보와 이해 부족”을 탄하기 전에 어떻게 하면 우리말을 매끄럽게 읽히게 할 수 있을까를 조금만 더 고민했으면 좋았겠다고. 이 작품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특히 두 번째 파트로 들어서면 갑자기 우리말 문장의 질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분명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음에도 읽는 게 지겨운 상태로 떨어지고 말았다. 어,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졌나? 싶어 세수하고 와서 읽어도 마찬가지다. 그래 다시 몇 페이지 앞으로 와서 읽기 시작했더니, 암만해도 퇴고가 소홀했던 것 같다. 역자가 혹시 이 독후감을 읽을 지 모르겠다. 당연히 불쾌하고 마음도 상하겠지만, 부탁이니 그저 한 아마추어가 읽기에 그랬나 보다, 하고 웃으며 지나갔으면 좋겠다.


  《루바이야트》라고 아시는가? 11세기 후반에서 12세기 초반까지 활약한 페르시아의 시인, 천문학자, 수학자 오마르 하이얌이 쓴 것을, 19세기에 영국인 에드워드 핏제럴드가 번역해 세상에 내놓은 시집이다. 우리나라엔 민음사, 오정인쇄에서 나온 건 절판이고, 지금은 지식을만드는지식, 지만지 시선집 시리즈로 팔고 있다. 시는 시인데, 당시 왕족, 귀족 등의 식자층은 일반 서민 대중의 노래라고 천시하던 “루바이”라고 부르던 4행시 75편을 모은 책이다. 현대의 평론가, 학자들은 그러나 이 책에 실린 4행시를 정말 오마르 하이얌이 쓴 것인지 의심하고 있다. 말은 그래도 상당부분을, 사실상 에드워드 핏제럴드가 쓴 작품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고 한다. 루바이 한 편을 읽어보자.


  여기 나무 그늘 아래 빵 한 덩어리

  포도주 한 병, 시집 한 권 – 그리고 황야에서도

  내 곁에서 노래하는 그대가 있으니 -

  황야도 낙원이나 다름없구나. (《루바이야트》, p.11, 지만지 2020)


  오마르 하이얌은 페르시아 사람, 정확하게 ‘니샤푸르’라는 곳에서 아브라힘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금의 이란 북동쪽 호라산에라자비 주의 비날루드 산기슭에 있는 도시로 아프가니스탄에서 흘러 들어오는 마약 때문에 황폐화되었다고 한다. 뭐 그런가 보다. 이 시에서 중요한 건 당연히 이슬람을 국교로 하는 셀주크 제국에서 포도주 한 병과, 내 곁의 그대, 즉 연인에 관해 노래했다는 것이 의아스럽다. 물론 당시에도 이슬람 종파 간에 강경과 온건파가 갈려 있었지만 내놓고 이런 시를 쓴 건 놀라운 일이다. 작품 속에서 하이얌이 두려워한 것이 자신이 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란 점이었고, 가장 두려워한 것은 대중이었다. 바보 같은 “대중이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자존심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라나? 이런 의문은 곧 풀린다.

  하이얌이 스물네 살 때. 사마르칸트에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당시였다. 거리에서 초라한 몰골의 가난하고 비참한 노인이 스무 명 가량의 장정들에 둘러싸여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하이얌이 보니 늙은 자베르. 하이얌이 태어나기 11년 전에 죽은 아부 알리, 당대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며 모든 학문의 왕으로 이성의 사도로 숭배했던 아부 알리 이븐시나, 서양에서는 아비센나라고 부르던 큰 학자가 자신의 형이상학과 의학의 후계자로 여길 정도로 가장 총애했던 제자, 자베르였다. 그러나 자베르는 자기 사상을 너무 거침없이 공언하는 바람에 대중에게 미움을 받아 여러 번 옥살이를 하고, 세 번이나 공개 태형을 받아 정신이 이상해져 비참한 말년을 보내던 중이었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하이얌이 장정들 앞에 나서 자기 이름을 밝히고 괴롭힘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자, 얼굴에 칼자국이 난 젊은이가 오마르 하이얌을 향해 “호라산의 별이요, 페르시아와 이라크의 천재요, 철학자들의 왕자인 고명하신 오마르”라고 비아냥거리며 시비를 걸더니, 일단 괴롭힘을 멈추는 대신 사형까지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연금술사”라는 죄목으로 오마르 하이얌을 고발해버렸다.

  샤리아 법정의 판관을 가리키는 “카디” 아부 타헤르는 칼자국 청년을 꾸짖어 물리친 후 하이얌에게 말한다.

  “자네에게 귀한 능력을 주신 신께서 또한 현명함, 침묵할 줄 아는 지혜도 자네에게 주셨기를 바라네. 그것이 없다면 그 어느 것도 존중될 수 없고, 지켜질 수도 없다는 걸 잊지 말게. 지금은 비밀과 공포의 시대라네.”

  그리고 나무상자를 열고 책 한 권을 꺼내 엄숙한 몸짓으로 오마르에게 주었다. 256쪽의 백지로 되어 있을 뿐인 책. 최고급 중국 종이 ‘카키드’로 묶은 책으로 읽는 용도가 아닌, 오마르 하이얌에게 시구가 떠오르면 기록을 하고 절대 비밀로 남기라 한다. 그러니까 시를 쓰기는 하지만 결코 다른 이에게 보여주지 않은 책이다. 현대의 학자들은 이 카키드 종이로 묶은 책에 1백에서 2백 수의 시를 썼다고 추측하고 있으며 이 가운데 에드워드 핏제럴드는 75편을 번역했다고 주장했다. 시를 쓰고 보관을 비밀로 했기 때문에 이슬람 국가의 시인은 술과 연인을 노래할 수 있었고, 그것을 남길 수도 있었던 것.

  오마르 하이얌은 수학자이기도 하다. 미지수 x를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이다. 그래서 수학 이야기. 카디 아부 타헤르는 왜 하필이면 256쪽의 책을 주었을까? 생각보다 많은 분이 알고 계실 듯. 큰 전지를 반으로 자르면 두 장이 나온다. 그걸 다시 반으로 자르면 네 장. 이렇게 해서 일곱 번 자르면 128장이 나오고, 128장이면 256쪽이 된다. 즉 2의 8제곱. 반도체의 용량도 이 법칙을 따른다. 1M DRAM, 2, 4, 8, 16, 32, 64, 128, 256M DRAM. 수학은 삶의 곳곳에, 생각보다 많은 곳에 숨어있다.


  책은 모두 4부part로 되어 있다. 1부와 2부는 오마르 하이얌이 살면서 시를 쓰게 되는 사연과 그의 사랑과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가 있던 카라한 왕조, 이 왕조를 간접 지배한 셀주크 제국을 넘나드는 11, 12세기 페르시아의 격랑과, 격렬한 역사와 종교 계파의 혼돈 속에서 시를 쓰고, 책이 사라지는 과정을 그렸다. 3부와 4부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로 순식간에 8백년이 흐른 다음이다.

  1912년 4월 14일 밤과 15일 새벽 사이, 뉴펀들랜드의 난바다에서 거대한 호화선, 결코 침몰하지 않을 바다 위의 궁전 타이타닉 호가 빙산에 부딪혀 옆구리가 찢어지는 바람에 결국 대서양 해저로 가라앉을 당시, 일등실의 손님이었지만 하마터면 물고기 배 속에 장사지낼 뻔한 벤자민 O. 르사즈 씨가, 보트를 가지고 있어 노를 잘 젓는다는 이유로 여성들만 태운 구조정에 올라 목숨을 건졌으나 타이타닉 호의 금고 속에 보관하고 있던 《루바이야트》는 배와 함께 대서양 해저로 가라앉을 때까지, 책의 발견과 보관과, 역시 르사즈 씨의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야기 자체는 흥미진진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문제도 있는(것 같은) 책이다. 같은 저자, 같은 역자의 다른 책 <타니오스의 바위>도 곧 읽을 예정이다. 기대도 하지만 걱정도 있다. 뭐 사는 게 다 그렇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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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04 0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민 말루프 작가의 책 여러권 있는데 몇년전 ㄱㅂ에서 열었던 작가와의 대담을 보고 있었는데,,,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건지 모르겠어서 실망하고 아직 한 권도 못 읽었어요 ㅎㅎ
통역의 문제인지, 원래 그렇게 피상적으로 말을 하는지...^^;;
실크로드 관련된 책을 좋아해서 제목에 혹했는데,,, 별 3개라니...!

Falstaff 2024-04-04 16:44   좋아요 1 | URL
이 책은 다른 역자가.... 아니, 취소. 이 말을 역자가 들으면 얼마나 기분이 언짢겠습니까. 에휴... 큰일 날 뻔했네요.
며칠 있다가 올릴 <타니오스의 바위>는 같은 역자임에도 잘 읽힙니다. 그래서 더 재미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