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들 위픽
정지돈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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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 정지돈은 <모든 것은 영원했다> 책 한 권만 딱 읽었다. 이런 독자는 다음 작품을 고를 때 마음 속으로 전작과 비슷하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선택을 하기 십상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개가실 신간 코너에 위즈덤하우스의 위픽 시리즈, 내 돈 내고는 절대 사 읽지 않을 위픽 시리즈에 정지돈 이름이 떠 있길래 두 번 생각하지 않고 얼른 골랐다. 설마 이 책도 어느 독자가 희망도서 신청해서 산 건 아니겠지? 본문이 3쪽에서 시작해 56쪽으로 끝난다. 그러니까 다 합해 54페이지. 저번에도 위픽 시리즈 이야기할 때 말한 거 같은데 한 번 더 읊어보자면, 페이지도 같은 페이지가 아니라서 한 페이지에 열일곱 줄, 한 줄에 원고지로 치면 스물 다섯 칸 안쪽으로 널널하게, 몸집 작은 인간들은 글자들 사이에서 축구는 아니더라도 하프 코트 농구는 할 수 있을 정도의 편집이다. 판형이 작기도 해서. 이렇게 단편소설 딱 한 편 실어 정가 1만3천원, 10퍼센트 할인가 11,700원. 책 사서 읽는 분들 치질 생기겠다.

  말했다시피 나는 <모든 것은 영원했다> 스타일의 진지한 가상역사, 가상 인물 같은 걸 기대했다가 난데없이 또다시 느와르 장르를 읽게 된 거다. <크레파스> 읽고 데고 불과 며칠도 안 지나서 또다시 느와르를 읽어주려니까, 아이고, 이게 짧은 단편이라서 다행이지 진짜 골로 갈 뻔했다. 고 채영주의 <크레파스>는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정말로 발생 가능한 한국인과 흑인 커뮤니티 사이의 오해와 폭력, 두 집단의 사이를 이간시키는 백인의 협잡 같은 것이 뭐 그럴 듯도 했건만, 훨씬 더 짧은 <현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들>은 그냥 만화, B급 영화에서 볼 수 있는 디스토피아 itself이다. 주 무대 D시city는 누가 읽더라도 영화 <배트 맨> 시리즈의 무대 고담 시를 연상할 듯. 그러니까 밥먹듯이 강도, 살인, 납치, 사체유기 같은 흉악범죄가 연이어 일어나고 D시 출신이 입사 면접이라도 보려고 하면 면접관들이 눈깔을 허옇게 뒤집어 까고, 즉 면접관이 저 위진魏晉시대 때 죽림칠현의 한 명인 완적이 했던 백안시로 내리 보더란 거다. D시 출신이니 개차반일 거다, 라는 선입견에 입각해서 말이지.


  굳이 주인공을 한 명 꼽자면 “김지미”라는 이름의 젊지 않은 여성이다.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었다. 벌써 시대를 앞질러 가는 양반이라 물론 왕년의 은막스타 김지미를 염두에 두고 이름은 지었지만 세계화 시대에 맞추어 그냥 “지미”라고 해라, 해서 김지미 역시 스스로를 “지미”입니다, 해버렸단다. 근데 이 이름도 반드시 좋은 건 아니다. 예를 들어 이름 뒤에 만일 그런 게 있다면, 접미사 “랄” 혹은 “럴”을 붙여보면 거참, 발음도 이쁘지, 지미랄, 지미럴. 게다가 바람직하지 못한 욕설 한 마디를 붙여도 입에 착착 달라붙으니, “지미 씨발”. 아, 취소, 취소. 점잖은 독후감에 이게 무슨. 그냥 이 정도로 하자. “지미 염병할.”

  지미는 스물한 살 때 원래는 헤어디자이너가 되고 싶었는데, 미용실의 도제 시스템이 영 재미가 없었다. 그래서 때려치우고 감삼동의 빵집 아들과 연애를 시작했고, 이왕 연애하는 김에 빵집 2층에서 그집 아들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원래는 빵을 먹기만 좋아했었으나 진짜로 만들어보니까 재미가 들렸다. 사내가 양 볼에 밀가루를 하얗게 뭍인 게 보기에도 예쁘고. 며칠이 지나 헤어숍 동기들이 모인다 해서 가서 수다를 떨다가, 오후 세시에 밤 페스트리가 나오는 시간을 맞춰 먼저 자리를 떴다. 그만큼 시댁인지 빵집인지, 아니면 남친 가게인지에서 만드는 밤 페스트리가 맛있었나보다. 그래서 허겁지겁 빵집으로 달려가보니 빵집 앞에는 단골 아저씨가 쓰러져 있고, 피가 흥건히 고여있는 카운터 뒤에는 사내의 엄마가 쓰러져 있었으며, 아버지는 주방 입구에 엎어져 있었다. 근데 사내가 없는 거다. 2층으로 올라가보니 사내는 글쎄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총을 맞고 넘어져 있다. 다락엔 매그넘 권총이 있었거든. 사건이 벌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창문 밖에는 범인들이 낄낄거리면서 짐을 챙겨 유유히 걸어가고 있었다. 지미는 다락방에 올라가 얼른 매그넘 총알 여섯 발을 탄창에 재우고 계단을 뛰어내려가 두 명과 한 명으로 나뉜 강도들 가운데 한 명을 골라 “어이”하고 불렀고, 놈이 이건 뭐야, 하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냥 간단하게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남은 두 명을 잡기 위하여 거리로 돌아가보니 없다. 그래서 둘레둘레 쳐다보니 노란색 택시가 한 대 있고, 강도 두 명 가운데 하나가 택시 운전석에, 다른 한 명은 조수석에 앉아 아직 출발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무릎엔 돈다발과 패물을 올려놓고 손에는 페이스트리와 크루아상을 씹어 먹고 있는 거였다. 지미가 터덜터덜 걸어가니 창문이 스르륵 내려졌고, 조수석 강도가 “뭔대?”하고 묻는 순간 지미는 곧바로 총을 꺼내 역시 망설이지 않고, 총알이 다 떨어질 때까지 두 강도들에게 난사해버리고 말았다. 그래봐야 이제 총알은 다섯 발 남았지만. 지미는 곧바로 돌아와서 이 와중에, 업장과 다락 입구엔 남친과 남친의 부모의 시체가 놓여 있는 그대로 먼저 샤워부터 하고 총과 피 묻은 옷을 숨겼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 밤 페이스트리를 먹고 있는데 도착해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경찰이 지미에게 묻는다. “거기 앉아서 뭘 했죠?” 대답을 하길, “밤 페이스트리를 먹었지. 3시에 빵이 나오거든.”


  이건 지미가 스물한 살 때 이야기고, 따라서 책의 제일 앞부분에 소개하는 에피소드이다. 이제 시간이 흘렀든지, 아니면 또다른 지미가 있든지, 그것도 아니면 사설 경호업체의 나이든 여성 사장의 이름을 그냥 편의상 지미라고 했든지, 그건 뭐 중요하지 않고, 하여간 의뢰비가 무지하게 비싼 경호업체, 그러나 사실은 사적 복수를 전담해주는 일로 명성을 쌓아가는 “네이버후드 워치”의 대표는 중년사내의 방문, 그리고 스물네 살 먹은 딸을 찾아달라는, 이미 죽었으면 복수를 해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스물한 살의 지미하고, 네이버후드 워치의 사장 지미 사이엔 작가 ‘융’이라는 남자가 한 명 등장하는데, 마른 호수를 메우고 위에 건물을 지으려 할 때 호수 표면에서 무수하게 많은 유골이 발견되었고, 이 가운데 융의 어머니 유골이 있어서, 여태까지는 엄마가 아빠와 자신을 버린 채 도망한 줄 알았었지만 이제 새삼스레 엄마의 죽음을 파헤치고, 그걸 소설로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일도 생긴다.

  어떠셔? 배트 맨의 고담시에서 벌어지는 일들하고 매우 비슷하지 않나?

  나는 이런 정지돈을 기대하지 않았었거든. 또 이렇게 얇은 책과 비싼 단가의 책을 사고 싶은 마음도 없고. 다행이지 뭐야. 작품이라도 마음에 들었으면 마음 한 구석에 이걸 사야했었나, 괜히 쓸데없이 뇌활동 할 뻔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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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29 08: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2-29 15: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01 07: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3-06 10: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24-02-29 08: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54쪽에….13,000원이요?! 아무리 종잇값이 올랐어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양심없네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2-29 15:48   좋아요 0 | URL
이 시리즈를 직접 사서 읽을 일은 없을 거 같습니다. 너무 심했어요.

stella.K 2024-02-29 10: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유, 지미랄 책값 오지게 비쌉니다. ㅎㅎ
그렇죠. 이름은 무조건 잘 짓고 봐야합니다. ㅋ
옛날 갱지같은 삼중당문고도 좋으니 책값이나 싸면 좋겠습니다.
저도 정지돈은 별론데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더라구요.

Falstaff 2024-02-29 15:49   좋아요 1 | URL
아이고, 삼중당 문고는 학창 시절에 보석 같았지요. 말 함 뭐합니까.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