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모사의 눈부심 - 문학세상 외국소설선 1
쥴퓨 리반엘리 지음, 이난아 옮김 / 문학세상 / 2002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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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개한 쥴퓌 리바넬리의 소설이라고 해서 관심 폭발했다가 폭삭 망했다. 리바넬리는 <살모사의 눈부심>을 발표해 1997년에 발칸 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발칸 문학상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그냥 튀르키예 국내에서 주는 게 아니고 문학상 본부는 불가리아 소피아에 있으며 발칸 반도 뿐 아니라 발칸 지역에 있는 모든 나라의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꽤 크고 중요한 문학상이라고 이 책을 번역한 이난아가 설명한다. 이난아는 튀르키예 유학 막바지에 읽고 “동화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에 감싸인 문체”에 매료되었다고 적었다. 번역서를 읽는 독자들이 제일 아쉬운 점이 바로 이런 거다. 원어로 읽으면 해당 언어의 특유한 울림에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는 반면, 번역서는 아무래도 스토리 위주로 감상하는 게 주 목적이 되니까. 그래서 미리 말하고 넘어간다. 오늘의 독후감은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문장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작품의 스토리에 중점을 두겠다는 것. 리바넬리의 작품으로 세 번째 읽는 것이지만 대단히 재미있게 읽은 <세레나데>도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문장의 공감 같은 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의 정치 관습 가운데 하나가 술탄에 새롭게 즉위한 황제는 자신의 동복, 이복 형제들을 싹 죽여 없애는 것이다. 물론 오스만 제국 만의 유일한 것은 아니다. 동로마제국에서도 덜 떨어진 황제가 즉위할 경우에 형제들을 몽땅 죽이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하여간 발칸 지역에서는 용납이 되던 관습이었던 모양이다. 오스만이라고 해서 모든 술탄이 자기 형제들을 몰살했던 건 아니다. <살모사의 눈부심>에 등장하는 술탄, 17세기에 어머니에 의한 쿠데타로 실각한 이브라힘 1세라고 읽지만 결코 실명으로 등장하지 않는 술탄 역시 맏아들이 아니었다. 생각해보시라. 젊은 술탄이 즉위해 동생을 몽땅 죽였다가 보름 후에 새 술탄이 밥 잘 먹고 무슨 탈이 났는지 밤새 토사곽란 하다가 새벽에 숟가락 놓으면, 왕조가 하루 아침에 무너져버리게? 선대 술탄인 아버지 역시 삼촌들을 몽땅 죽였을 테니까 조카들도 남아 나지 않아 완벽하게 대가 끊어져 버렸을 거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말이 그렇지 사실은 핀치 런너 한두 명은 내버려 두었다. 의심스러우면 이브라힘 1세를 검색해보시라. 술탄 했던 이복형, 동복형도 있고, 삼촌도 있고 하여간 있을 건 다 있었다.

  바로 전대 술탄이 친형인 무라드 4세. 당시엔 일상다반사였던 전쟁을 하러 나가야 하는데 암만해도 후방에서 쿠데타가 벌어지면 진퇴양난이라, 출정하기 전에 동생들을 싹 죽이려 들었다. 작품 중에는 워낙 사람 죽이는 걸 좋아하는 미친 왕 비슷한 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이 순에 입각해 동생들을 비단끈을 목에 묶어 매달았다. 두 명. 세번째로 나중에 이브라힘 1세가 될 동생의 목에 비단끈을 턱, 걸었을 때, 아이코, 베네치아 출신으로 하렘의 꽃이었다가 술탄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된 무라드 4세의 어머니인 황태후가 등장하더니 술탄을 꾸짖기 시작했다. 황제는 아예 씨를 말리려 하는 거요? 그러다 사직이 문을 닫으면 지하의 선조들을 어떻게 뵈려고 하시오. 우리나라 사극에서 나오는 인수대비가 연산군 꾸짖듯이 한 마디 하는 바람에 이브라힘 1세는 목숨을 건진다. 대신 하렘에서 유폐생활을 해야 했단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그렇게 쓰여 있다. 책에서는 목에 비단끈이 걸렸을 때의 공포 때문에, 지식백과에서는 하렘에서의 오랜 유폐생활 때문에 이브라힘 1세의 정신건강에 심한 스크래치가 갔다고 나왔다. 어느 걸 믿든지 그건 독자 마음이다.

  분명한 건 형이 (여자 말고 남자를 좋아하는 바람에)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어 버려서 이제 동생한테 술탄의 자리에 오르라고 하렘에서 나오라 하니까, 동생은 드디어 형이 내 목숨을 거두어 가려는구나, 엉엉 울면서 발버둥을 쳤다는 거다. 그래서 양 옆에 병사들이 붙어 겨드랑이를 끼고 끌고 나가 톱카프 왕궁의 마당에 놓인 술탄의 의자에 앉혔다. 그랬더니 다뉴브 강에서 나일강까지 점령하고 있는 오스만 군대의 정예병이 도열한 가운데 흰 수염의 대신들, 대율법사, 학자, 장군들이 차례로 경배하러 몰려들어 새로운 술탄의 발치에 이마를 대는 걸 보고, 그제서야 그의 웃음소리가 톱카프 왕궁의 복도에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그의 목에 비단끈이 둘리던 때 이후 줄곧 옥죄었던 독성이 강한 앙금이 휘발되어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걸 느끼면서, 좌중에 늘어선 만장한 사람들을 싸늘하게 바라보더니 술탄의 즉위 첫 말씀 한 마디를 이렇게 했다는 거다.

  “자, 누구부터 죽일까?”


  이 작품의 화자는 ‘나’.

  콘스탄티노플, 즉 이스탄불의 톱카프 왕궁의 하렘을 관리하는 책임자다. 궁의 하렘은 금박장식, 희귀한 도자기, 보석이 박힌 관모, 축면사 용포, 자개장식 가구, 에메랄드와 루비로 치장한 장식품, 검은 담비 털에 둘러싸인 호화로운 후궁들의 처소를 관장하고 있어서 만인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터키어와 라틴어, 히브리어, 이탈리아어, 아랍어, 페르시아어로 현학적이고 수사적인 대화를 능란하게 구사할 수 있으며 쿠란 일체를 암송하고 있다. 왕궁에서 받은 교육과정의 전 과목 1등급에 빛나는 일세의 수재라고 자임한다. 그리하여 지식의 창고이며 완벽한 경지에 이른 학자이며, 자비롭다가도 때론 매정하게 행동할 줄 아는 지도자이기도 하다. 검은 얼굴과 납작한 코, 터번에 짓눌린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한 곱슬머리에 검은 눈동자, 나이 먹을수록 정확한 비율을 자랑하는 근육이 우람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 당년 67세의 아비시니아 환관장 슐레이만이다. 물론 나중에 구라 또는 과장인 것이 밝혀지긴 하지만. 힘은 강하건만 견강부회하는 해바라기이기도 하다.

  슐레이만은 오직 한 사람, 완벽하게 창조된 유일한 주인인 오스만 제국의 황제 술탄 한 명을 위해 존재한다. 열두 살 때 아비시니아 사막에서 사냥꾼한테 잡혀 어딘지도 모르는 부둣가에 도착해 거세를 당한다. 매운 고춧가루 물을 가랑이에다 쏟아부어 대충 소독을 한 후에 마취도 없이 둥글게 휘어진 아라비아 단도로 단 번에 내용물을 휙 도려내 버렸다. 죽는 놈은 죽고 산 놈만 다시 배에 태워 이스탄불에 도착해 톱카프 왕궁의 노예로 팔려온 것. 이후 말했다시피 적절한 교육을 받아 하렘의 총 관리자까지 올랐다. 이젠 얼굴을 꼿꼿이 쳐든 아프리카인의 당당한 태도로 세상을 대하며 오직 한 사람에게만 머리를 조아린다. ‘나’에게는 그가 내리는 칭찬이 곧 영광이다. 그는 ‘나’에게 신과 같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는 황제가 황태후를 우습게 보는 바람에 앙심을 먹고, 역사적 사실은 담비 털을 과하게 낭비하는 등 사치에 절어 있는 것에 대한 반동으로 (성장한 유럽 정복민 소년들의 군대인) 예니체리와 관료, 종교인들의 반발로 쿠데타가 발생한다. ‘나’ 슐레이만이 기둥 뒤에서 훔쳐보는지도 모르고 병사들이 술탄의 두 팔을 잡고 질질 끌어 타일로 장식된 작은 방, 좁은 화장실과 부엌만 달랑 달린 방에 집어넣고 벽돌과 회벽으로 창문까지 발라버렸다. ‘나’는 이런 징조를 알고 있었다. 온전한 몸을 가지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어서 내것 대신에 한 어린 아이에게서 자른 물건을 병에 넣어 목에 걸고 다녔으나 이스탄불에 큰 지진이 일어나는 바람에 땅에 떨어져 그것이 깨져버리고 말았던 것이 하나요, 저 시바스의 투르할 마을 처녀가 낳은 새끼 코끼리를 담은 상자를 궁에 가져온 것이 다음이었다.

  아, 이제부터는 스포일러가 확실하다. 엣다 모르겠다. 품절도 아니고 절판인 책이다. 그냥 간다.

  술탄을 폐위시키고 일곱 살 먹은 아들 마흐메드가 즉위한다. 여기서 고민끝에 역 쿠데타를 준비하는 환관장 ‘나’ 슐레이만. ‘나’는 유폐된 ‘나’의 유일한 황제에게 권유하기를, 황제의 모든 아들을 죽여버리면 술탄의 위를 다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아들은 또 낳으시면 되는 겁니다. 그리하여 황위를 보존하옵소서.


  쥴퓌 리바넬리는, 설마 정말로 이렇게 제안하는 신하도 없었겠지만, 유폐된 술탄이 자기 자식들의 목숨을 구하고자 환관장의 제안을 깨끗하게 말 한 마디로 거절하고 죽음의 길을 선택한다는 이유로 그를 찬양한다. 물론 내가 튀르키예 역사를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작품 속에서 숱한 사람을, 심지어 그저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도 가볍게 목숨을 거두어간 폭군이 자기 자식들을 구하려는 거 하나 가지고 정당화 되느냐고. 죽어나간 왕족, 대신, 측근, 정적은 물론이고 군사, 백성들, 그리고 어처구니없는 법령을 정해놓고 어긴다는 이유로 군대를 풀어 습관적으로 시민을 죽이게 했던 책임은 어쩌고 말이지. 하렘의 풍경 같은 흥미로운 장면을 재미있게 읽다가, 결론에 와서 그만 빡치고 말았다. 술탄이 술탄 다우려면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절대왕정 시대의 임금의 책임과 자격을 먼저 봐야할 것 아닌가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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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2-19 08: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절판된 책이어서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술탄, 하렘, 이스탄불...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네요.
가끔은 그런 술탄도 있지 않았을까요?^^

Falstaff 2024-02-19 08:31   좋아요 1 | URL
하렘을 총괄하는 환관장 이야기라서 흥미롭기도 하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오스만 제국의 재미난 이야기이기도 해서 그렇구나, 그렇구나, 하며 읽어나갔다가 결말에 가 푸르륵, 김이 새버리고 말았답니다. ㅎㅎㅎ 그 동네 역사에 무식해서 그랬겠지요.
그런 술탄도 있고 중국 황제도 있고 우리나라 왕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왕정을 하면 안 된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북조선이 심하게 걱정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