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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노 외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46
구니키다 돗포 지음, 김영식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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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모양인데 처음 듣는 이름이다. 독후감을 쓰려고 작가 연표를 봤더니, 세상에나, “1922년 치바 현 초시에서 출생”이란다. 윽. 근데 이광수가 이이의 작품을 읽고 소세키와 견줄 만하다고 했다? 혹시 이 이광수가 춘원 이광수도 아니고 “런닝맨”에 출연하는 영화배우 이광수를 말하는 건가? 그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누구야? 에휴, 그랬다가 다음 줄 보니까 “1874년 3세”라고 한다. 1922년 출생은 1871년 출생의 오식이다. 을유문화사 왜 이래, 모양 빠지게.
무사(武士) 구니키다 센하치는 배 타고 어디를 가다가 초시 앞바다에서 좌초되어, 물에 빠진 김에 쉬어간다고 초시의 한 여관에 짐을 풀었다가 ‘만’이라는 이름의 여관의 하녀를 통해 아들 돗포를 낳는다. 고향에는 본처와 아들 셋이 있었음에도. 돗포의 엄마 만이 미녀였는지 아빠는 엄마와 돗포를 불러 같이 살다가 조강지처와 이혼을 하고 만을 정실 부인의 자리로 올렸다. 돗포는 엄연히 사생아였기 때문에 양자로 입양하는 방식을 택해 호적에 이름을 올린다. 1884년 열다섯 살에 적자로 올렸다는 걸 봐서, 아빠 구니키다 센하치는 전처 사이에 낳은 아들 삼형제를 호적에서 파버렸던 거 같다. 세상에나….
이후로는 일반적인 작가들의 연표와 별로 다르지 않다. 무슨 무슨 학교를 다녔으며 어떤 잡지에 무슨 글을 기고했고 데뷔도 하고, 혼인도 하고 뭐 그런 것들. 특징을 보면 단편소설 전문 작가인 거하고, 폐결핵을 2년 앓다가 1908년 서른일곱 살의 젊은 나이에 숟가락 놨다는 거. 아, 그래서 생소했구나. 단편 위주에 짧게 살다 갔으니. 하여간 이름을 남기고 싶으면 무조건 좀 길게 사는 게 유리하다. 그러니 평소에 밥 잘 먹고 운동 열심히 하고, 배변활동도 쾌활하게 해야 한다.
단편소설 열다섯 작품을 실은 소설집. 위에서 연표를 몇 번 인용했다. 이이의 연표 가운데 아주 특징적인 인물이 등장한다. 구니키다 돗포는 1894년 청일전쟁이 터지자 종군기자로 승선해 기사를 발표했다고 하는데, 조선에 상륙을 했었는지는 밝히지 않은 반면에 다음 해인 1895년 6월에 도쿄의 한 병원 원장 사사키 혼시와 기독교부인교풍회 서기 도요주 부부가 종군기자 초대 만찬을 열었고, 여기서 구니키타가 이들의 맏딸 노부코信子를 알게 되었다. 참 이상한 사람이다. 구니키타는 노부코에게 사사키 집안과 절연을 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고 이해 11월에 결혼을 한다. 1895년에 구니키타는 홋카이도를 개척하겠다는 야심찬 꿈을 가지고 현지 조사를 하고 있었으나 겨우 겨울을 나고 이듬해 1896년 3월에 도쿄로 돌아온다. 그리고 곧바로 4월에 갑자기 아내 노부코가 실종되는 일이 벌어진다. 결혼을 해서 겨우 백일 남짓 같이 살다가 자신의 배 안에 딸이 자라기 시작했음에도 노부코는 자신의 행복, 사랑, 꿈의 질곡을 뒤집어 쓴 채 과감하게 뛰쳐나간 거였다. 삿포로로 간 노부코는 딸을 출산해 다른 집안에 입양을 시키고, 친척 회의를 통해 미국에 있는 일본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미국행을 결정했지만, 미국행 배 안에서 유부남 사무장과 염문을 일으킨다. 이 일 때문에 노부코는 미국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다시 일본으로 귀국해야 했고 이 사건은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다. 노부코는 이후 선박회사에서 해고당한 사무장과 살림을 차려 다시 딸을 하나 낳고 잘 사는 듯했으나 1921년에 사무장이 죽은 후엔 여동생에게 가서 일요학교를 열고 성서와 찬송가를 가르치며 살았다고 한다.
이 노부코를 모델로 아리시마 다케오는 훗날 문학과지성사에서 번역 출간할 장편소설 <어떤 여자>를 썼고(지금은 품절), 첫 남편인 구니키다 돗포의 단편 여기저기에선 중요한 등장인물로 선을 보인다. 상, 중, 하로 구성되어 있는 단편 <가마쿠라 부인>에서 나오는 ‘하이칼라 독부’가 딱 자신의 첫번째 아내인 노부코를 연상시킨다. 미국행 배의 승선원하고 눈이 맞은 것까지 모두.
열네 작품과 마지막에 실은 자신의 일기 <거짓없는 기록> 전부, 깔끔하고 전형적인 단편소설이다. 딱 단편의 규격에 맞게 짜인 작품들. 해설을 읽어보면 모파상에게 영향을 받았고, 조선의 소설가 김동인한테 영향을 주는 등 당시의 동양인 시각에서는 매우 탁월한 심미안을 가졌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그건 그때 이야기이다. 지금 보면 딱 그만큼 세월의 녹이 슨 작품이라는 말도 되리라. 일본에서 새롭게 소설문학이 터전을 잡을 당시를 개척한 작가와 작품. 그리하여 우리나라를 포함해 동아시아에서 가장 세련된 작업이었다는 건 충분히 인정할 만큼 단편소설의 틀이 잡혀 있다. 소설을 공부하고 쓰려 하는 사람에겐 좋은 교과서가 될 수 있겠다. 그러나 나처럼 즐기기 위해 소설을 읽는 독자에게 소위 ‘강추’하기는 좀 애매하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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