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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과 나 ㅣ 연극과인간 중국현대희곡총서 26
톈샤오웨이.주주 지음, 김우석 옮김 / 연극과인간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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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작가, 연출가, 배우인 텐샤오웨이田曉威가 중앙연극아카데미를 다닐 때 윌리엄 셰익스피어는 학창 시절에 굉장히 중요한 작업이었다고 한다.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중국 연극계에 발을 들인 이들은 뜻을 모아 친구 왕펭페이는 프로듀서로, 텐샤오웨이는 연출자로 어린이 연극 교육을 위해 애를 썼다. 2020년 펜데믹이 들이닥쳐 작업을 그만 두어야 했을 때, 텐샤오웨이는 전통적인 희곡 작업을 써보고자 했으며, 원래 고전적 연극 스타일인 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생애를 다루는 희곡을 썼다. 무려 세 시간 이상의 공연 시간을 필요로 하는 대작이지만 단 네 명의 배우가 수많은 등장인물 역할을 해야 하는 (공연을 보지는 못했지만) 역작을 만든다. 2022년 7월에 텐샤오웨이와 그의 아내 주주朱珠와 협업으로 작품을 개작해 베이징과 선전에서 공연을 해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호평을 받는다. 이때 텐샤오웨이가 극작, 연출, 배우로 워낙 큰 비중을 맡아 <윌리엄과 나>에 관련한 인터뷰는 이이가 전담한다고 역자 해설에 쓰여 있다.
텐샤오웨이는 1981년생으로 검색을 해보면 시나리오 작가로 더 유명한 듯하다. 연극뿐 아니라 영화에 주연으로 출연해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미모를 자랑하지만 실물로 본 거 아니니까 믿지는 마시라. 하여간 무대, 은막, TV를 막론하고 전성기를 달리는 인물인 듯하다. 텐샤오웨이가 공연/연기 전반에 걸쳐 가리는 것 없이 활약을 하니, 그의 극작품이 다분히 고전적 틀을 지니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중국현대희곡총서 시리즈에서 소개하는 작품들 가운데도 포스트모던에 가까운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지만 <윌리엄과 나>는 세계적인 문호 셰익스피어의 삶을 다분히 대중적으로 친숙하면서도 세 시간이 넘는 공연이 별로 지루하지 않을 친숙한 방식으로 썼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세 시간이 넘는 공연시간, 복잡다단한 삶을 산 셰익스피어의 일생을 그린 작품을 단 네 명의 배우가 어떻게 이야기가 섞이지 않게 관객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수 있다. 텐샤오웨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로 그리스 극의 코러스 비슷한 장치를 가져왔다. 한 배우가 여러 배역을 맡는다고 해도 잠깐 쉴 참이 있다. 이 때를 이용하든지 아니면 한 배역을 맡아 대사를 하기 전에 짤막하게 지금 처한 상황이든지 맡은 배역이 왜 이런 장면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그게 아니더라도 극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배경 같은 것을 설명한다. 아예 배우나 성우 한 명을 더 출연시켜 코러스 역할을 통째로 맡기고 무대에 실제로 등장하는 네 명은 연기에 전념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스 극에 코러스가 없었으면 1박2일로도 끝내기가 쉽지 않았을 걸? <윌리엄과 나>도 그랬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등장인물 가운데 몇 명은 자신들만 쓰는 독특한 어구가 있다. 극장 소유주이자 여관 몇 개, 윤락가 몇 개를 가지고 있는 런던의 부자 사업가 필립 헨슬로는 말 끝마다 “끓는 물에 데인 것 같이”라는 부사구를 가져다 붙인다. 잉글랜드 수석 대주교 존 휘트기프트는 말 시작할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주님께서 말씀하시길”이라 시작하면서 뇌물이면 뇌물, 향응이면 향응, 여인이면 여인를 주는 대로 꿀꺽 삼켜버리는 놀라운 식욕을 자랑한다. 셰익스피어의 중요한 후원자인 사우샘프턴 백작 3세 헨리 라이어슬리는 자기 주변의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하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금화 한 잎 내기를 해 언제나 이긴다. 사우샘프턴 백작의 친구이자 나중에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반란을 도모했다가 황천길로 접어드는 에식스 백작 2세 로버트 데버루는 엘리자베스의 젊은 애인이었다가 여왕의 은밀한 비밀을 술집에서 취중에 떠들어 미움을 사고(여왕의 치마 속은 완벽하게 왁싱이 된 상태야!) 아일랜드 내전에서 형편없이 깨졌음에도 텐샤오웨이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고 사소한 오류를 범했지만 그건 조금도 중요한 내용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자. 데버루 이야기는 영국 역사상 몇 개 없는 재미난 일이라서 소개했다.
그러면, 그리스 극의 코러스 비슷한 역할을 하는 배우들의 관객을 향한 짧은 설명과, 등장인물의 특징적인 말투만 가지고 이렇게 긴 연극이 처음부터 끝까지 재미와 긴장을 가질 수 있느냐고? 에이, 그럴 리가. 내가 발견해서 여기다 쓸 수 있는 것이 두 개이고 만일 하나를 더 보탠다면, 세상에 누구의 삶도 사소한 경우는 없겠지만, 여왕의 치마 속은 말끔하게 왁싱이 되었을지언정 말도 많고 털도 탈도 많던 마지막 튜더 왕조 시대를 살아온 세계의 문호 셰익스피어의 한 생애를 그린 작품에 텐샤오웨이가 그야말로 적절하게 유머러스한 대사를 살짝 뿌려댄 것도 있을 것이다. 이 유머라는 것이 색깔로 치자면 왕실의 색 보라와 비슷해서 흔하게 눈/귀에 띄면 순식간에 천박의 골짜기로 빠져버리는 거라서(아, 5공 시절 수도 서울의 넘치고 넘쳤던 보라색 시내버스의 질주여!) 적절한 순간에 잠깐씩 치명적 조미료를 뿌리듯 살포해야 하는 건데, 이 작품이 그랬다.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극이 엄숙의 도가니로 끌려가지 않고 관객이 여유롭게 즐길 수 있게. 물론 완전 아마추어인 내가 꼽은 것 말고도 더 있겠지만 그건 읽어 보시고 직접 보태 보시기 권한다.

윌리엄을 연기하는 텐샤오웨이
극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다섯 번째 생일인 세인트 조지 데이, 기념일 날의 이름이 좀 그렇기는 하다 조지 데이가 뭐야, 조지 데이가, 윌이 삼촌이 베니스에서 가져온 초콜릿 시럽 과자를 들고 극장 구경을 갔다가 과자를 탐하는 동네 개구쟁이들을 피해 극장의 백스테이지에 숨어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백스테이지에 가 보셨나? 나는 연극은 아니고 1970년대 오케스트라 연주회 백스테이지엔 가봤다. 세상에 그렇게 황량할 수가. 윌이 가본 곳은 황량한 것 더하기 암흑천지였나 보다. 겁이 덜컥 났겠지. 사방을 둘러보니 저 바닥에 불빛이 보여 앞뒤 재지 않고 냅다 뛰어가 불쑥 나와보니까, 에그머니, 글쎄 무대 위였다. 극장엔 제우스와 엔디미온과 달의 여신 셀레네 이야기 각색본을 공연하고 있었다. 셀레네가 엔디미온에게 술수를 써 자신한테 키스하게 만들었고, 이것을 본 제우스가 감히 인간 그것도 목동 주제에 신한테 입을 맞춰? 너 지금 당장 죽을래 아니면 영원히 살되 계속 잠만 잘래? 이렇게 할 참인데 난데없이 꼬맹이 하나가 툭 튀어나온 거다. 그렇다고 당장 극을 망칠 수도 없어서 갑자기 즉흥극으로 변해버린다. 엔디미온과 셀레네가 벌써 일을 벌여 아들을 낳았고 이게 다섯 살이 되어 초코 시럽과 크림까지 소복하게 얹은 과자를 들고 있어서 제우스가 냉큼 한 입 베어 물어 버린다. 엔디미온도 그게 맛있어 보여 제우스 손에서 얼른 빼앗아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리고 어린 윌은 울먹울먹. 그게 재미있어 관객들이 폭소를 터뜨리는 광경이 놀라워 윌은 연극에 깊은 인상을 받는 것으로.
이게 서막이다. 본막으로 들어가면 세월이 흘러 농사도 짓고 피혁일도 하는 집안의 아들 윌한테는 벌써 아이 셋이 있다. 아버지 존 셰익스피어는 귀족 출신 아내 메리 아덴 셰익스피어가 시집 올 때 가져온 마지막 혼수인 은식기를 내다 팔아 자기 빚을 갚았다고 엄살을 떨어 오지게 바가지를 긁힌다. 아내 앤 역시 농사꾼 윌이 하라는 농사도 안 짓고, 필요한 가죽을 얻기 위한 송아지 도살도 하지 않는다고 역시 주둥이가 댓 발 나와 있고. 윌은 돈 안 되는 시를 쓰느라 엄마와 아내가 밥 먹으라고 몇 번을 소리쳐도 꿈쩍 않고 원고지를 잡고 있다가 결국 엄마가 시끈거리더니 원고지를 찢어버리기에 이른다.
아무리 시와 극작이 있는 젊은 윌이라 하더라도 당장 밥값은 해야 하는 법. 시냇가에 가서 송아지 한 마리를 처리하고 손에 잔뜩 묻은 피를 손수건으로 닦고 있는데, 아버지가 와서 아들에게 적지 않은 돈을 건넨다. 엄마의 은식기를 팔아 얻은 것으로 평소 아들의 소원이었던 극작을 해보라고 마련해준 종자돈이다. 많은 돈이 아니어서 이것 가지고 베니스까지는 못 갈 거고 그저 런던에서 시작해보라고 말한다. 나는 이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 사실이었으면 윌의 가슴이 을매나 찢어졌을꼬? 집에 들르지도 않고 그 길로 런던으로 향하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몇 가지를 소리쳐 당부한다.
“아무하고나 깊이 사귀지 마. 사람 속은 모르는 거야. 새 옷을 두 벌 사. 남들이 너를 함부로 보지 못하게 해. 절대로 아무한테나 돈을 빌리지 마라. 아무한테나 빌려줘도 안 되고.”
무엇보다 중요한 바람.
“(자기 가문의) 앰블럼 하나를 가져와! 너한테 준 돈은 투자야.”
그리고 아버지는 아들이 피 묻은 손을 닦은 손수건을 가슴 속에 집어넣는다.
이렇게 재미있는 희곡 <윌리엄과 나>는 시작해 드디어 <리어 왕>을 쓰고 <템페스트>를 끝내지 못하고 윌의 시간은 막을 내리고 만다. 그때까지 극은 놀라운 속도감으로 휘리릭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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