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가진 세계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쿠르초 말라파르테 지음, 이광일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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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는 1898년에 독일에서 이민 온 섬유기술자의 셋째 아들로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 프라토에서 “쿠르트 에리히 주케르트”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 지역 명문 치고니니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후배가 되지만 1914년에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무작정 가출해 알프스를 넘어 프랑스에 도착, 이탈리아 출신 의용군에 합류하여 아르곤 전선에서 독일군하고 대치한다. 이때 전투에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고 귀가했고 1915년에 이탈리아가 정식으로 전쟁에 뛰어들자 다시 이탈리아 정규군에 지원해 알프스 산악부대 보병연대 중위로 입대한다. 낭만적으로 전쟁을 생각한 고등학생이 이제 본격적인 전쟁의 혹독한 맛을 경험하며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 각각 무공훈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1918년 7월 독일군의 독가스 공격을 당해 평생 폐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처절하게 패배한 전투였던 카포레토 전투를 주제로 한 <카포레토 만세!>를 써 이탈리아 사회에 큰 파문을 던지기 시작한다.

  이미 1922년부터 파시스트 당원이었으나, 아무리 나쁘게 봐도 다분히 낭만적인 파시스트였던 거 같다. 1925년에 쿠르트 주케르트는 “쿠르치오 말라파르테”라 개명하면서 계속 글을 쓰지만 어느새 일 두체, 무솔리니를 비판하는 논조로 바뀌어 버렸다. 이탈리아 최대의 신문 『코리에레 델라 세라』가 그를 고용하여 파리 특파원으로 파견하지만 그곳에서 말라파르테는 히틀러를 희화화 한 <쿠데타의 기술>을 출간한다. 이 책의 이탈리아 판은 무솔리니에 의하여 판금조치 되고, 33년에 귀국한 후 곧바로 체포되어 반파시즘 활동을 한 죄목으로 5년 추방형을 선고받아 정치범 수용소에 유배된다. 책에도 등장하는 무솔리니의 미남 사위 갈레아초 치아노 백작이 이를 딱하게 여겨 유명한 토스카나 해양도시인 포르테 데이 마르미고 이송을 시키는데, <망가진 세계>에서는 이 곳을 말라파르테의 고향으로 설정했다. 히틀러 풍자 서적 <쿠데타의 기술>이 이 와중에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는 바람에 유배 도중에도 인세가 꼬박꼬박 쌓여 그곳에서 근사한 별장을 구입하는 엽기행각도 벌인다.

  1940년이 오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함에 따라 대위로 징집된 말라파르테는 병역 대신 『코리에레 델라 세라』의 종군기자로 프랑스,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루마니아를 다니며 몰래 <망가진 세계>의 원고를 쓴다. 히틀러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누비고 다닌 말라파르테는 폴란드에서 <망가진 세계>의 거의 대부분을 완성하고 힘러의 게슈타포가 엄정하고 살벌하게 검문하는 데도 불구하고 원고를 각지에 분산시켜 폴란드를 빠져나와 핀란드로 들어간다. 1943년에 무솔리니가 실각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로마에 도착하고 이틀만에 체포되어 교도소에 들어갔다가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얼마만에 석방되어 카프리 섬으로 들어간다. 섬에 입도하기 전에 열차를 타고 폐허가 된 나폴리의 장면이 이 책의 마지막 장chapter인 “파리fly”에 묘사되어 있다. 카프리 섬에서 원고를 끝낸 것이 아직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인 1943년 9월이었다.

  즉, 이 책은 아직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패배를 전망할 수 있을지언정 확언하지 못하는 불확실한 시절에 쓴 작품이다. 모두 6부로 되어 있고 각 부는 동물 이름으로 타이틀을 달았다. 말, 쥐, 개, 새, 순록, 파리. 이 작품은 르포르타주와 소설이 절반 정도 섞여 있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하나의 큰 이야기 줄기가 있고 여기서 몇 개의 에피소드라는 가지가 장식하고 있는 정식 소설작품으로 보기 힘들다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 나오는 모든 사실(적 이야기)을 종군기자가 쓴 기사, 르로르타주reportage로 보기도 어렵다. 이것들이 합해 있다면 문학으로서 이 작품은 당연히 소설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러나 아무러면 어떤가. 그냥 읽으면 된다. 그동안 전쟁을 묘사하는 많은 책을 읽었으나 이 <망가진 세계>만큼 적나라하게 전쟁의 참상과 비참, 참담, 암담, 허탈을 있는 그대로 쓴 작품은 처음이다. 작가 자신도 이 책을 “대단히 유쾌하면서도 섬뜩한 책”이며 “전쟁동안 눈으로 본 유럽의 대재앙 중 가장 특이한 광경”이라서 독자에게 “섬뜩한 유쾌함”을 선사한다고 서문에 썼으나, 이 책에서 어떤 장면이든지 유쾌함을 느끼는 사람은 변태 아니면 맛이 좀 간 상테라고 봐도 될 것이다.


  첫 장면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의 동생인 오이겐 왕자의 거처 발러 발대마쇼덴이다. 9월이며 벌써 오크힐의 고목들이 붉게 물들기 시작한 가을. 빌라의 맞은편 티볼리 놀이공원의 말들이 구슬프면서도 무언가를 열망하는 듯한 울음소리를 허공에 공명시키는 곳. 이 해의 여름에 말라파르테는 핀란드의 라플란드 페차모 전선에서, 결코 지지 않는 무자비한 태양빛 아래에 피곤과 극도의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지내다 헬싱키의 병원에서 오래 입원한 후 퇴원, 스톡홀름에 도착해 오이겐 왕자를 방문한 터였다.

  이들은 의사 악셀 문테 이야기를 한다. 그가 말하기를 독일인은 병든 민족이라고. 늘 공포에 차 있어서 공포 때문에 죽이고 파괴하는 것이라고. 그러나 독일인들, 여자, 남자, 어린이, 노인 모두 결코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 민족. 대신 살아있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민족. 자신들과 다른 모든 것. 약자, 병자, 여성, 어린이, 노인, 유색인, 집시, 공산주의자, 그리고 유대인. 세상의 모든 소외되고 살아 있는 사람들을 무서워해서 오히려 그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인간들이 바로 독일인, 나치 독일인이라 했다고. 말라파르테의 이런 관점은 책이 끝나는 시점까지 일관되게 펼쳐진다. 하다못해 연어를 잡기 위해 강에 수류탄을 던져 모든 하천 생물체를 말살시키는 독일인을 결국은 연어가 이길 것이고, 그래서 전쟁에서 승리의 영광을 차지하는 건 폭격을 당해 폐허가 된 나폴리, 이미 귀족과 부르주아는 안전하게 피난을 떠나 여성과 노인과 어린이와 병자와 장애인만 남은 나폴리의 가난하고 보잘것없으며 질병에 시달리고 오랜 기근으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와 빈대와 벼룩투성이의 민중이 되리라는 생명주의가 결론이다.

  능멸과 치욕으로 유린당하고 있는 유럽의 한 가운데 떠 있는 행복한 섬 스웨덴. 이 섬에서 말라파르테는 전쟁 후 거의 처음으로 평온한 삶의 감각을, 인간적 위엄의 감각을 되찾은 느낌을 받지만 한편으로 스웨덴 풍경을 말horse 같다는 느낌도 받는다. 전쟁에 대하여 중립을 선포했으며, 독일 민족에 관한 냉소적 입장표명에도 불구하고 오이겐 왕자의 눈과 눈썹에 서린 차가운 잔인함은 나치 친위대장 요제프 디트리히의 굳은 얼굴에 드러난 것과 똑 같은 잔인함이 언뜻 비쳐 보였던 거였다. 말라파르테는 오이겐 왕자에게 스몰렌스크 포로수용소에서 본 소련군 포로들 이야기를 해준다.


  “포로들이 동료 수감자의 시체를 뜯어먹는 동안 독일군들은 그저 무표정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나는 공포와 수치를 느꼈다. 오이겐 왕자에게 그런 끔찍한 얘기를 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오이겐 왕자는 아무 말이 없었다. 회색 외투에 몸을 파묻은 채 마냥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얼굴을 들었는데 마치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그의 눈에서 기분이 상해 날 질책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말라파르테가 동료들의 시체를 뜯어먹는 소련군 포로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나치 친위대장 요제프 디트리히의 굳은 얼굴에 드러났던 것과 똑 같은 잔인함을 이때 본 거였다. 디트리히는 그의 얘기를 듣고 웃음을 터뜨리며 이렇게 얘기한 것만 달랐을 뿐.

  “Hat es ihnen wenigstens geschmeckt? – 그들이 맛있게 먹던가요?”

  독일군 사병들도 어떻게 말릴 방법이 없었다. 그들도 먹을 것이 없었으니. 전쟁은 그런 것이다.


  1941년 4월, 나치 꼭두각시인 크로아티아 자유국가가 탄생하고 초대 총통 안테 파벨리치가 취임한 후 종군기자 말라파르테는 그를 만난다. 크고 넓적하면서도 강인하고 거친 느낌을 주어 마치 옛날 친구라도 만나는 느낌을 주는 친근한 얼굴. 거대하고 우스꽝스럽고 괴기하기까지 하게 큰 귀를 지녀 어딘지 모르게 좀 바보스러움을 가진 듯한 총통은 말라파르테의 감옥살이에 관해 물으며 흡족한 웃음을 흘리는 것까지도. 몇 달 후 다시 총통의 사무실에서 만났을 때, 크로아티아와 소련의 게릴라, 파르티잔이 밤이면 자그레브 근방까지 숨어들어 오던 시기였다. 특이하게도 안테 파벨리치의 책상 위에 버들고리 바구니가 놓여 있었으며 그 속에는 런던 피커딜리 거리의 식료품 백화점에 진열될 만한 홍합과 굴이 가득 들어 있는 것 같았다. 배석한 카제르타노 공사가 말라파르테에게 묻는다.

  “굴 찜 좋아하시죠?”

  “달마티아산 굴인가요?” 그가 총통에게 직접 묻는다.

  총통 안테 파벨리치는 바구니 뚜껑을 벗겨 홍합을 보여준다. 젤리처럼 미끈미끈한 덩어리들. 총통은 선량하면서도 어딘지 바보 같기도 한 피곤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나의 충성스러운 우스타샤 대원들이 선물로 보내온 거랍니다. 사람들의 눈알 이십 킬로그램입니다.”

  생포하거나 죽인 게릴라, 파르티잔들의 눈알. 생굴처럼 보이는.

  이런 것이 전쟁이다. 그러나 결국은 약한 것, 소외된 것, 작은 것들이 이기고 마는 거대한 잔혹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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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4-02-05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이렇게 개처맞고도 반항하는 작가 놈들 글만 보면 저는 사족을 못 씁니다…부럽습니다 먼저 읽으셔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2-05 17:51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런 골통들이 가끔 있어서 그나마 세상이 재미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얼른 읽으셔요!!

coolcat329 2024-02-05 1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파시스트 군인이 쓴 전쟁의 참상이라니...이 책 또 엄청 끌립니다.
작가가 보통 사람같지 않네요. 또 새로운 책, 작가 알게 돼서 넘 기쁩니다.

Falstaff 2024-02-05 17:52   좋아요 1 | URL
조국에 살기 위해서 마음엔 들지 않지만 어쩔 수 없으니 파시스트 군대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겠지요. 참 험한 세상이었습니다. 그때 살지 않은 게 어딥니까.
이게 유명한 작품인 모양이더라고요. 우리나라에선 별로 인기가 없지만....

coolcat329 2024-02-05 18:09   좋아요 1 | URL
맞아요. 정말 끔찍한 시대였습니다.
찾아보니 영어를 번역한 거 같던데 어떠셨나요?
숨겨진 걸작같아요. 땡투 받으시면 저인줄 아시길요~😅😅

Falstaff 2024-02-05 19:23   좋아요 0 | URL
이탈리아어를 번역한 책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든지, 그냥 읽든지 해야 하는 거지요 뭐. 번역서를 읽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비애입니다.
문장은 전혀 어색한 거 없었습니다. 수식 같은 문학성보다 내용이 중요한 작품이라 중역, 직역은 생각보다 영향을 덜 주는 거 같더라고요.
ㅎㅎㅎ 땡투 들어오면 쿨캣님 생각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