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리 가의 빈집 (외) 범우희곡선 11
랜퍼드 윌슨 지음, 이영아 옮김 / 범우사 / 199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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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랜포드 윌슨Lanford Wilson은 우리나라에선 낯설지만 미국에선 상당히 유명한 극작가다. 1937년에 미주리 주 레바논Lebanon에서 출생한 윌슨은 다섯 살 때 부모가 이혼해 어머니 비올레타 테이트를 따라가 스프링필드에서 함께 살았다. 열한 살 때 엄마가 농부 월트 레너드와 결혼해 미주리 주 오작Ozark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졸업했다.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재혼 같은 것으로 어린 마음에 상처 입는 일은 없었거나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등학교 다닐 때 단편소설을 끼적이던 윌슨은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에서 톰 역을 했을 때부터 연극과 극작에 열광했다. 이후 아버지가 이주해 살던 샌디에이고와 시카고를 거쳐 뉴욕의 브로드웨이는 꿈도 꾸지 못하고, 오프-브로드웨이에도 끼지 못해 오프오프-브로드웨이 극장에서 시작해 차근차근 성공의 길에 들어선다. 이후 그는 오프오프에서 오프로, 그리고 드디어 브로드웨이로 진출한 초기 극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린다. 1980년엔 퓰리처 상을, 2004년엔 연극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고 이후 학술예술원 회원의 자리에 앉는 등 연극인으로 (뉴욕에 집이 두 채였으니 돈도 벌었지만) 서부가 시작하는 저 미주리 깡촌 출신이 온갖 명예를 누리다가 2011년 73년의 나이로 차마 감기지 않는 눈을 감았다.


  《탤리가의 빈집 (외)》는 표제작품과 <토분 쌓는 사람들: The Mound Builders>, 두 편의 희곡이 실린 작품집이다. 랜포드 윌슨의 작품집은 범우사에서 출간한 이 책 딱 한 권이며, 1994년 초판본을 아직도 정가 4천원, 할인가 3천6백원에 팔고 있을 정도로,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숨겨진 극작가라서 그의 대표작이 어떤 작품인지 말할 수 없을 정도지만, 눈치껏 보아하니 <토분 쌓는 사람들>은 주요 작품 목록엔 들어가지 않는 거 같다. 당연히 공연 평으로 소개한 것을 보면 “윌슨이 발표한 작품 중 가장 심오하면서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수작”이라거나 “장엄한 아름다움” 또는 “지난 10년 새 나왔던 연극 중 다섯 개 안에 드는 가장 중대하고 뜻깊은 연극”이라 했지만 주례사에 무슨 말을 못할까. 내용은 원주민 유적지를 발굴하는 고고학자와 발굴지를 개발할 꿈을 꾸고 있는 땅 주인과의 갈등이라고 간략하게 말할 수 있지만 당연히 속내는 무지하게 복잡하게 얽혀 있다. 우리나라 독자라면 출연진이 하는 역사 이야기를 그런가보다, 이렇게 짐작하고 넘어가야 할 정도로 다채로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금관, 동관과 부장품, 그리고 이것들의 의의를 설명하기도 한다. 여기에 작품을 비극으로 전환하는 인텔리들의 비윤리성 같은 것이 도드라지며 극은 결말을 향해 치달으며, 마지막으로 에필로그 형식으로 끝맺는다. 나는 <토분 쌓는 사람들>의 주례사에 껌벅 넘어가서 대단한 작품이 나올 것으로 기대했으나 암만해도 표제작인 <탤리 가의 빈집>이 훨씬 좋았다.


  <탤리 가의 빈집>의 주인공은 멧과 샐리. 멧은 마흔두 살, 샐리는 서른한 살. 샐리의 말에 의하면, 열한 살의 나이 차이는 1944년 당시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이들은 일년 전에 연애를 하다가 샐리의 오빠 버디와 아버지가 마땅하게 여기지 않아 헤어졌다. 샐리는 오래 전에 동네의 황금가족으로 꼽던 캠블 가의 외동아들 할리와 약혼을 했었다. 불행하게 샐리가 골반염증으로 1년 동안 고등학교를 휴학하는 동안 콜롬비아 대학에 진학한 할리는 괜찮은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고, 다시 재혼을 했다. 샐리는 간호보조사로 일하면서 연애 한 번 하지 않고 혼자 지내고 있었던 것. 작품 말기에 알려지지만 샐리의 골반염증이 당시 의학발달 미비로 그만 나팔관을 오염시켜 임신과 출산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 것이 이유였다. 요즘이야 일부러도 낳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만 해도 그건 가장 최악의 결혼 조건이었다. 게다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샐리의 말대로 괜찮은 남자는 전부 다 징용당해 유럽이나 태평양에 나가 있었다. 그럼 1944년 현재 서른한 살인 전 약혼자 할리 캠블도 괜찮지 않은 남자였던 셈. 현재의 캠블은 정신적으로는 미련하고, 육체적으로는 초고도비만 상태다.

  멧은 족보가 좀 복잡하다. 아버지는 프러시아 유대인.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서 프러시아 군인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아버지가 스페인계 유대인이라고 잘못 알려진 우크라이나 여성을 만나 혼인을 하고, 딸을 라트비아에서 낳고, 아들 멧은 리투아니아에서 낳는다. 그래서 작품 가운데 샐리가 멧의 정체를 밝히기 요구하자, 프러시아 사람과 우크라이나 사람 사이의 리투아니아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대답한다. 이들은 프러시아에 살다가 세계대전을 앞두고 흉흉해지자 니스로 이주했지만 거기서 프랑스 니스 경찰에 체포당해 엔지니어인 프러시아 사람은 혹독한 고문을 당한다. 가족과 헤어져 리투아니아 사람인 멧만 뤼벡에 사는 삼촌네와 함께 바나나 보트를 타고 노르웨이에 도착한 후, 카라카스를 거쳐 미국에 당도해 오늘에 이른 것. 이러니 멧에게는 국가나 충성심 같은 단어 자체가 대단히 낯설다. 반면에 도시의 두번째 부자집이었다가 대공황 덕에 찌그러지고, 이후에 전쟁 특수를 맞아 기사회생한 탤리 가는 여전히 애국주의적 입장을 견지할 수밖에 없었으니 멧이 좋지는 않았겠지.

  텔리 가의 빈집이 정말 비어 있는 집이냐고? 아니다. 탤리 가문이 잘 나갈 때, 근방에 제일 큰 공장 지분의 25퍼센트를 소유하고 있던 시절, 하도 돈이 많이 벌리는 바람에 남는 돈으로 직공들 보너스 줄 생각은 안 하고 엉뚱하게 가진 땅에 건물을 짓고는 했다. 샐리의 삼촌이 주로 그런 짓을 했다. 집 앞에 근사한 정자를 짓고 싶었지만 탤리 씨가 반대를 하는 바람에 집에서 떨어져 있는 강가에다 보트장, 그러니까 보트 계류장 건물을 멋있게 만들어 놓은 거였다. 이 양반이 여간해 그러지 않았건만 이상하게 이 보트 하우스는 곧바로 슬슬 기울어지기 시작해 지금은 샐리를 제외하고는 귀신 나올까 겁나서 아무도 오지 않는 외딴 곳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샐리는 어려서부터 이곳을 자신의 아지트 삼아 자주 와서 책도 읽고 사색도 하고, 낮잠도 자고, 그랬던 모양이다. 무대는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이 보트 하우스에서 진행한다. 계류장엔 보트 두 척이 있고, 이 가운데 한 척은 수리를 위해 뒤집어져 있으나 그 상태로 족히 5년 이상은 버틴 거 같다.

  자신들의 의사와는 별개로 헤어지게 된 샐리와 멧. 역시 이들은 서로를 연모하고 있지만 안 만나면 멀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라, 조금은 서먹서먹하다. 그리하여 나이 더 많은 남자인 멧이 용감하게 먼저 샐리네 집의 벨을 눌렀고, 샐리의 올케가 문을 열었으나 한 마디도 섞지 않고 남편 버디를 불렀으며, 버디는 곧바로 자기 눈 앞에서 꺼지라고, 사라지라고 소리를 쳤다. 멧도 만만치 않은 사내이거늘 이따위 말에 깨갱할 턱이 없다. 그리하여 버텼더니 집 안에서 사업 이야기를 하고 있던 샐리의 전 약혼자이자 초고도비만증의 할리가 등장해 경찰에 신고해버렸고, 그 사이에 오빠 버디는 벽에 걸려있던 멧돼지 사냥용 엽총을 메고 나타나 총구를 멧의 얼굴을 향해 겨누었던 거였다. 이쯤 되면 아무리 천하의 멧이라 하더라도 앗 뜨거라, 할 수밖에 없어서 작전상 후퇴하여 경찰이 도착하기 전에 1년 전 가본 적이 있던 보트 하우스로 발길을 돌렸으며, 당시에도 자기 편(이라기보다 사랑과 연애 편)을 들었던 숙모 로티 탤리 여사한테 샐리를 이곳으로 보내 달라고 귀띔했던 거였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샐리가 퇴근을 하고, 집에 와서 다시 보트 하우스에 도착한 저녁 또는 늦은 오후 시간에 작품은 시작한다.

  좋다. 화끈하게 스포일러 만들어보자. 유대인이며 라트비아 또는 리투아니아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지독하게 방랑하면서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어본 멧, 그리고 실제로 게이였던 극작가 랜포드 윌슨의 성향이 근본적으로 무생식, 무자식이 상팔자 주의자인 건 이해하시겠지? 그런데 상대방 샐리는 후천적이긴 하지만 나팔관 이상으로 영구 불임인 여성. 이 두 명이 천생연분이 아니면 세상 어느 커플의 궁합이 맞겠느냐고?


  책의 서문에 랜포드 윌슨을 “현대의 체홉”이라 칭했지만, 읽어보니까 체홉은 좀 멀고, 같은 미국인 그작가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유진 오닐하고 작품을 풀어내는 방식이 비슷한 거 같다. 아닐지도 모른다. 오닐과 비슷한 시기에 극작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면면이 다 윌슨에게 일종의 후광이 되었을 것이니. 다만 선배 극작가들과 윌슨의 가장 큰 차이점은 대사가 무지하게 많다는 거. 공연하는 배우 죽어나가는 모습이 눈에 훤하다.

  독자들이여, 아직도 이 책의 가격이 정가 4천원, 10퍼센트 할인가격이 3천6백원인 것을 기억하시면 주저하지 마시라. 이 이상 가성비 갑은 내 남은 생에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진짜로 사 보시고 욕하기는 없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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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1-16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 보라는 건지 말라는건지 헷갈립니다. ㅎㅎ 체홉보다 멀다니 그도 좀 그렇구요. ㅋ
그래도 뭐 책이 싸니까 부담은 없겠습니다. 모처럼 옛 추억에도 빠져 볼만하고. 범우사는 저 학교 때 많이 읽었던 책이 거든요. 삼중당은 판형이 넘 작아 손이 안 가고. 지금도 책이 나오나 싶은데 이렇게 읽는 분이 계셨네요. 지금은 워낙 메이저 출판사들이 꽉 잡고 있는 형국이라 짠합니다요.ㅠ

Falstaff 2024-01-16 15:25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이 시리즈는 더 이상 찍지 않을 거 같습니다. 범우사, 한때 꽤 좋아했던 출판사였는데 요즘은 상황이 좀 안 좋은 거 같더라고요. 그래도 책은 계속 나옵니다. 금속활자 시대하고 비교하면 교정 교열도 좋지 않고 뭐 그래요. 삼중당은 진즉에 망가진 걸로.... 세계문학, 하면 결코 두 번째 자리에 놓을 수 없던 정음사도 사라졌잖습니까. 제가 좋아하는 우리나라 문학전집을 찍은 신구문화사도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네요. 아마 있기는 있을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