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마 블랑카의 회고록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24
테레사 데 라 파라 지음, 엄지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테레사 데 라 파라. 1889~1936. 독일 베를린 주재 베네수엘라 외교관의 딸로 파리에서 태어나 마흔 여섯 살까지 살다가 마드리드에서 죽은 베네수엘라의 대표적 소설가. 1924년 작 <이피게네이아>와 1929년 작 <마마 블랑카의 회고록>을 대표작으로 꼽는다고 한다. 20세기 말까지 세상에서 아름다운 여성이 가장 많이 사는 나라가 베네수엘라라고 했다. 당시에 베네수엘라 지사로 파견을 나간 대학 1년 선배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 이후로는 연락이 끊겨버렸지만. 당연히 지금은 지사도 다 철수해버렸다. 사실상 깡패들이 통치할 만큼 치안이 불안하고 석유 저장량 세계 1위임에도 정작 주요소에 휘발유 구경을 할 수 없는 나라에 지사를 유지할 수 없겠지. 이게 지금의 베네수엘라지만 한 시절엔 세상의 모든 돈이 다 그 나라로 쏠렸던 적이 있다. 미국에서 셰일 석유를 개발한 다음부터 곡소리가 나서 탈이지만.


  이 책은 머리말이 스무 페이지나 된다. 겉으로 주장하는 것은 작가 데 라 파라가 마마 블랑카를 어떻게 알게 됐으며, 그 할매가 어떤 성격이었고 자신과 얼마나 친한 사이였는지, 마마 블랑카가 쓴 회고록을 자신이 넘겨 받은 내력과 아무도 보여주지 말라고 했던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사연 등을 적은 내용이지만, 만원 내기해도 좋다, 이 머리말도 픽션의 일부이다.

  ‘마마 블랑카’의 원래 이름은 놀랍게도 블랑카 니에베스. 우리말로 ‘백설공주’라는 뜻이다. 반대말은 네그라 니에베스. 흑설공주. 아재 개그로 백설공주는 백만명이 설설 기는 공포의 주둥아리를 말한다. 마마 블랑카는 소녀 시절부터 백인임에도 가무잡잡한 피부에 까만 다리, 다리보다 훨씬 새까만 팔뚝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그런고 하면, 햇빛이 작살인 피에드라 아술 농장에서 사방을 둘러봐도 지평선이 까마득한 벌판 한 가운데 자리한 천연의 자연 속에서 하도 뛰놀아 그렇게 됐었다. 원래 이름은 백설공주이건만 맏손자가 할머니를 마마 블랑카라고 부르는 바람에 그게 굳어져 온 동네 사람들이 다 마마 블랑카라고 하기 시작했다. 사람 자체가 이름처럼 흰 머리카락과 너그러운 마음을 가진 넉넉한 인품을 지녀서 아무 부담 없이 그렇게들 불렀을 터. 내가, 여기서 말하는 ‘나’는 작가 테레사 데 라 파라를 말하는데, 열두 살이 채 되기 전에 마마 블랑카를 처음 만났고 그때 할머니는 일흔 살이었다. 60년의 터울에다 1920년대 말, 증조할머니 뻘이었다. 만난 장소는 베네수엘라의 수도 카라카스처럼 보인다.

  이때는 PC도 없고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아이들이란 아이들은 모두 밖에 나가서 놀았다. 물론 ‘모두’는 아니다 극히 소수의 아이들은 집에서 전래동화나 위인전기전집이나 이모가 보다 던진 선데이 서울을 읽었을 테니. 조금 있으면 열두 살이 될 테레사도 동네에서 놀다가 평소엔 눈에 그리 들어오지 않았던 낡고 조용한 집이 있어서 그냥 한 번 들러보고 싶은 마음에 대문을 살짝 밀어봤더니 스르르 열리는 바람에 고개를 빼쭉 들이밀었다. 분수가 약하게 뿜어져 나오는 마당을 지나 열린 창문을 통해 흰 가운을 입은 할머니가 있어서, 초콜릿이 찬 잔에 스펀지케이크를 들고 있는 것을 보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기척을 느낀 할머니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했고 이어서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이렇게.


  “아, 아주 좋아. 잘했어! 허락도 받지 않고 방으로 불쑥 들어오는 고양이나 새처럼 남의 삶을 살펴보다니! 그렇다고 도망가지 말고 이름이 뭔지 말해줘. 예쁘고 호기심 많은 아가씨!”


  물론 정말로 이렇게 길게 말하지는 않았을 거 같다. 그저 웃으면서 이름을 묻고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을 정도 아니었겠나. 하지만 작품을 발표한 시기를 감안하면 이처럼 수식어를 많이 포함한 문장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 어색하지 않을 수 있겠다. 아니면 테레사 데 라 파라의 문장이 그렇거나. 그럴 수 있다. 이런 문장이 책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니 데 라 파라의 독특한 문체라고 봐도 될 듯하다.

  이렇듯 마마 블랑카는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해도 활달함을 잃지 않는 성격이어서 사소하면서도 즐거운 일을 좋아했다. 낡은 피아노를 치는 것도. 나중에 나는 할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는데 할머니가 몰두해서 피아노를 연주할 때는 완전히 집중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를 치고 있었다. 이때 시인이나 생쥐처럼 가난한 할머니에게 오래 갚지 못한 빚을 갚기 위해 채무자가 들른 적이 있다. 하녀가 들어와서 조그만 목소리로 사실을 알렸고 할머니는 째려보며 나 피아노 치면 누구를 막론하고 들여보내지 말라고 했지? 타박을 놨다. 보다 못한 하녀가 다시 한번 들어와 채무자가 돈을 갚으러 왔다고 조금 더 큰소리로 일렀고, 할머니는 “그럼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라고 해.”라고 단칼에 물리쳐버렸다. 채무자는 빚 갚는 걸 포기한 채 그길로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할머니도 그걸 알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나. 하여간 음악에 관한 거 말고는 세상에 좋은 사람이었다.

  집은 오래되어 낡고 초라했지만 청결한 느낌과 향긋한 냄새가 사방에 감돌았으며, 사탕수수 농장, 사탕수수 제분소, 커피 가공회사가 있는 곳에서 낳고 자라 야생 동식물에 관해 통달을 한 수준이었다. 나와의 우정을 향해 인용한 것도 바이올렛, 데이지, 아네모네 등의 현란한 꽃에 관한 수식이었다. 당연히 데 라 파라의 화려한 수식이 짧지 않게 첨부되어 있다.

  원래는 있는 집 따님으로 있는 집 아들과 결혼해 남부럽지 않게 살았다. 남편과 사별 후 증권투자를 했다가 완전히 가산을 탕진해서 속세를 떠난 사람처럼 혼자 가난하고 외롭게 살고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고 그래도 하녀는 한 명 있다. 뭐 그런 것이지. 시인이나 생쥐처럼 가난해도 하녀는 한 명 있어야 하는 거. 하여튼 가산을 말아 자신 다음엔 복권을 사기 시작했고, 함께 살자는 아들들의 권유를 모두 거절했다. 아들들은 모른다. 잘 배운 부르주아 가문 출신의 며느리들이 별로 배운 것 없고 가진 것도 없는 시어머니를 내심 수치스럽게 여긴다는 것을. 그러나 마마 블랑카는 여전히 이웃에게 친절하고 활발하고 명랑하게, 화려한 말 솜씨를 구사하며 즐거운 남은 생을 소비하고 있었다.

  어느 날. 드디어 마마 블랑카의 부고가 도착했다. 나는 얼른 상가에 도착해 할머니가 직접 쓴 회고록을 손에 넣는다. 할머니가 자식, 손주들을 위해 쓴 자서전이라 그들에게 넘기려 했으나 암만 생각해도 자손들은 한 번 휙휙 넘겨보고는 그만일 거 같아서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고 내게 준 것이다. 원고는 자기 기억의 초상화라고, 자신의 기억과 함께 오래 간직해달라는 부탁과 더불어.

  그러나 데 라 파라는 할머니의 당부와 달리 마마 블랑카가 쓴 회고록을 자신의 수정과 문법적 보완을 거쳐 출간하려 한다. 그것이 인생이지. 죽은 자는 아무런 권한이 없는 거다. 아예 남기지 말았어야지, 마마 블랑카.


  이렇게 회고록은 시작한다. 광활한 벌판 위의 피에드라 아술 농장. 아버지와 어머니와 7개월부터 일곱 살까지 한 번도 농장의 울타리를 넘어가본 적이 없는 여섯 자매. 아이들의 화려한 이름들. 아우로라, 비올레타, 블랑카 니에베스, 에스트레야, 로살린다, 아우라 플로르. 트리니다드에서 자매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러 온 잉글랜드 계 물라토 여인 에벌린과 세 명의 보모. 식사시중 담당 하녀 알타그라시아와 아이들 잠자리를 맡은 하녀 헤수시타. 주방을 책임지는 요리사 칸델라리아.

  아버지는 끊임없이 아들을 갖기 원하고 아들이 태어나면 자신의 이름인 후안 마누엘라라는 이름을 주기로 했건만, 15~16개월에 한 번씩 세 달에 달하는 여행을 떠나 딸 하나를 품에 안고 돌아온 아내는 결코 아들을 생산하지 않은 가정. 이 야생의 벌판에서 야생으로 살던 여섯 자매들의 유소년 시절. 그리고 자매들의 교육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도시 카라카스로 옮긴 이야기까지. 일흔을 훨씬 넘긴 노인 마마 블랑카가 기억하는 저 어린 시절의 벌판과 자연과 농장과 짐승들과 사람들 이야기. 그 회고.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4-01-02 1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혹시 전생에 사람이 아닌
도서관과 책이라는 건물과 사물?
매번 감탄하며
힘에 벅차지만 열심히 따라 가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Falstaff 2024-01-02 16:14   좋아요 1 | URL
그냥 할 거는 책 읽는 거밖에 없는 백수라니까요. ㅎㅎㅎㅎ
페넬로페 님도 올해..... 아, 저는 추상명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복 대신에 말입죠, 그저 연초에 로또 한 방 콱, 맞으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