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서운 아이들 서문문고 124
장 콕토 지음 / 서문당 / 198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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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부터 장 콕토는 안 읽기로 했었다. 그러다가 도서관에서 그가 쓴 희곡 <지옥의 기계>를 빌려 읽고 난 후, 그간 생각했던 것이 잘못이었구나, 깨닫고 구입한 책이 콕토의 소설 대표작 <무서운 아이들>이다. 나도 소싯적에 Enfants Terribles, 하면 괜히 멋있는 거 같으면서, 폼도 좀 나고 그랬던 적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누구나 다 그런 시절을 겪고 사는 거다. 쪽팔려 하지 말자. 우리나라에서 흔히 말하는 앙팡 테리블 역시 이 작품의 제목에서 시작한 거다. 

  1889년생인 장 콕토는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자살해버렸으나 집안이 워낙 유복하여 좋은 교육받고 잘 성장했다. 아무리 똑똑해도 자기가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게 정상이라서 콕토는 바칼로레아에 연속 세 번 미역국을 마시는 바람에 자의반타의반 대학 진학을 포기, 하고 싶었던 글쓰기에 매진한다. 서른 살 때 <육체의 악마>를 쓴 레몽 라디게와 연애를 시작하지만 4년 후인 1923년 라디게의 죽음으로 허탈상태에 빠진 콕토는 아편에 탐닉한다. 몇 년 간 모르핀 의존상태로 살다가 대오각성,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업에 집중하고자 오진 마음을 먹고 불과 17일만에 작품 하나를 썼으니 오늘 소개하는 <무서운 아이들>이다. ‘무서운 아이들’이라고 하면 심하게 말썽을 부리거나 조숙한 청소년을 일컫는다. 작품에서는 주인공 폴과 제라르, 그리고 중요한 조연인 다르즐로가 열네 살, 콕토의 의견을 그래도 옮기면 “무서운 개고기들”이었을 때 시작해서 제라르가 장가들고 얼마 안 되어 끝나니까 하이틴 시절을 그렸다고 해도 틀리지 않다. 1920년대엔 결혼을 빨리 했고, 제라르는 하나 있는 삼촌이 오늘 낼 하는 바람에 숨 넘어가기 전에 후딱 결혼을 해치워버렸으니까.


  전에 장 콕토를 안 읽겠다고 했던 것은 그의 짧은 희곡작품 몇 개, 그것도 원본이 아니라 극화하기 위해 대본화 한 것 몇 편을 읽고 난 후, 아니올시다, 허투루 결론 냈던 거였다. <무서운 아이들>의 역자 고 오현우는 책의 서문 격인 ‘해설’에서 “그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시(詩)이며, 항상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한 젊은 넋을 가진 시인이었다. 그는 자기의 시를 여러가지 양식으로 표현하려고 했으므로 그가 손대지 않은 예술 양식이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콕토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소설시, 평론시, 연극시, 영화시, 데상시라고” 했단다. ‘데상시’에서 데상은 dessin, drawing, 소묘를 말하는 것으로 콕토가 전문가는 아니었을지언정 아마추어로는 상당한 수준의 대상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그렸다….는데 나 같으면 명함에서 이 항목은 지우고 살겠네.

  희곡에서 대사를 시, 즉 운문이나 운문의 기분이 들게 쓰는 것은 하루, 이틀, 한두 번 보는 게 아니지만 ‘소설시’라면 그거 참, <예브게니 오네긴>, <휘페리온>, <푸른 꽃> 같은 걸 읽어봤지만 하나 같이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래서 해설을 읽는 동안 <무서운 아이들> 이후에 또다시 콕토하고 멀어지는 건 아닌지 조금 걱정하기도 했다. 그래도 역자가 우리말에 맞게 의도적으로 작가의 시적 표현을 산문으로 바꾸었는지 오히려 콕토의 제 맛을 알려면 소설을 읽어보는 게 좋지 않겠느냐, 하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다.

  다만 한 가지 주의할 것은, 이 책의 초판 발행일이 1974년 7월 5일. 역자 고 오현우가 51세 때였다. 이후 개정판이 나온 것이 2000년이고, 우리나라 관습상 특히 번역서의 경우 개정판은 책값 올리기 위해 편의상 판을 내는 것이므로 이 책에서도 우리말의 단어 선택이나 표현법이 나 중학교 다닐 때하고 거의 비슷해서, 좋았을 거 같지? 그렇지는 않고 어느새 낯설기까지 했다. 역자가 1923년생으로 2009년에 향년 86세로 세상 하직했다. 비록 이 책의 인터넷 구입가가 4천5백원밖에 안 하지만, 웬만하면 두 배의 책갑(이래봤자 판매가 9천원)을 내고 창비세계문학전집 48번 <앙팡 떼리블>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그렇다고 지금 이 책과 번역이 나쁘다는 뜻은 1도 없다. “콕토의 제 맛을 알려면 소설을 읽어보는” 운운했을 정도로 (프랑스어 원문은 전혀 모르지만 어쨌든) 우리말 문장은 좋다. 다만 우리나라 작품도 그렇지만 특히 번역작품은 세대가 바뀌면 판도 바뀌어야 한다는 전제로 말했을 뿐이다. 예스러운 번역을 견딜 수 있다면 당연히 서문문고 124번인 이 책도 좋은 선택일 것이다. 무엇보다, 한 푼이라도 싸다.

  나는 보기 드문 작품이 서문문고에서 간혹 볼 수 있어 문고를 통째로 검색하다가 사르트르,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와 더불어 눈에 띄어 골랐었다.


  콩도르셰 고급 중학교 옆의 암스테르담 거리 72의 2호, 시테 몽티에에서 작품은 시작한다. 시테cite는 집단주택지를 뜻한다. 그러니까 우리식으로 하자면 몽티에 단지 정도. 시테의 주인공들은 단연 콩도르셰의 2학년 개고기들이었다. 한반도에서도 중2 무서워서 김정은이 남침을 못 한다잖은가. 3학년으로 진급하면 암스테르담 교사校舍를 떠나 고마르텡 거리의 3학년 교사로 옮겨가고, 암스테르담 아이들을 우습게 아는 오만을 떨겠지만 눈이 펄펄 내리는 시테 몽티에의 오후 네시 15분, 그레브 광장을 내려다보는 조금 높은 계단에는 곱슬머리에 상처입은 무르팍, 호주머니 속에 아홉 날 달린 나이프가 든 학교 짱 다르즐로가 내려보는 가운데 대대적으로 눈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장 콕토가 동성애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같은 중2 개고기 가운데 폴이라는 아이가 있어, 다르즐로를 향해 막연하면서도 강렬하고 고칠 길 없는 괴로움과 성sex도 목적도 따르지 않는 순결한 욕망에 차, 언제나 그를 동경해 마지 않았다. 폴도 다르즐로를 위하여 망토를 휘날리며 영웅같이 눈싸움의 한 복판으로 쳐들어갔으나, 아뿔싸,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맹렬한 속도로 날아온 큼지막한 눈덩이를 주둥이에 맞아 앞니가 얼얼해지고 입술이 터져 피가 낭자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얼굴 부분에 미세혈관이 워낙 촘촘하게 배열해 있어서 상처의 깊이보다 훨씬 많이 피가 흐르기는 한다. 하지만 문제는 피를 보더니 중2의 제왕인 다르즐로가 흥분을 했나, 갑자기 폴을 향해 돌진, 단단하게 뭉친 주먹 만한 눈덩이를 던져 가슴팍에 퍽, 명중을 시켜, 불쌍한 폴은 그대로 까무러치고 말았다.

  이들 가운데 제라르라는 개고기도 있어서 폴이 다르즐로를 동경하는 바로 그 이유로 폴을 동경했던 터라, 폴을 보살펴주고, 파수를 보아주고, 보호하고 다르즐로의 눈초리에 몸을 태우지 않도록 막아주고자 스스로 노예가 될 정도였다. 제라르는 까무러친 폴과 이 무도한 무리들을 혼자 힘으로는 어쩔 수 없어 냅다 학교로 뛰어가 훈육주임 선생과 수위를 대동해 치열한 눈싸움을 단박에 그만두게 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 5수밖에 없음에도 폴을 택시에 태워 아픈 엄마와 열여섯 살 먹은 누이 엘리자베스가 사는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그리고는 속으론 상냥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못말리는 표독스런 말씨를 거침없이 구사하는 엘리자베스한테 택시비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고 만다.

  폴네 집으로 말하자면, 남매가 어렸을 때 아빠가 집안에 있는 거의 모든 현금과 현금대체 가능 자산을 몽땅 싸들고 나가서 이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엄마보다 조금, 겨우 조금 더 예쁜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한 3년 정도 간혹 얼굴만 내밀며 살다가 간경화가 생기자 아빠의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빠를 내버렸으며, 세상에 갈 곳 하나 없는 아빠는 집으로 기어 들어와 엄마 곁에서 죽어버렸고, 덕분에 엄마도 피폐해져 중병을 앓기 시작했다. 남매는 엄마한테 파리한 얼굴을, 아빠로부터는 무절제와 멋과 지독한 변덕을 물려받았으니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근데 이해가 안 가는 건, 부모와 남매의 주치의가 이 가족들을 넘칠 만큼은 아니더라도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점. 하여간 엄마는 좀 있다가 죽고, 남매는 엄마 죽기 전부터 둘이서 한 방을 쓰며 아주 방종하게 살고 있다. 오현우 번역에서는 그렇다고 근친상간 코드는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이 텍스트를 거론할 때 많은 이들이 빠뜨리지 않는 포인트가 남매간의 관계이기는 하다. 하여간 그렇다.

  엄마가 죽고 남매와 제라르가 합세해 비슷한 생활을 계속하면서 얼마간 시간이 흘러 엘리자베스가 마네킹 걸로 취직을 한다. 여기서 만난 아가트라는 아가씨도 이들과 합류한다. 그리고 한 명 더.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는 미국계 유대인 미카엘. 엘리자베스와 미카엘은 결혼을 하고, 스포츠카를 몰고 다닌다는 얘기를 읽었을 때부터 딱 들었던 예상과 조금도 어김없이 미카엘은 결혼 며칠만에 크게 교통사고를 내 현장에서 즉사하고, 혼인신고서 한 장 덕분에 엘리자베스는 한 방에 큰 부자가 되어 버린다.

  아무리 무서운 아이들이라도 엄연히 계급이 존재하는 법. 여태까지는 다 그냥 그런 젊은이들끼리 잘 살았지만 한 방에 엘리자베스가 최고, 다음이 폴, 그리고 조금 부자 삼촌을 둔 제라르, 제일 하층 계급은 아가트. 이렇게 구분이 지어진다. 물론 내놓고는 아니고, 제일 높은 계급인 엘리자베스 마음 속에. 유일하게 같은 팀원들을 구별하고 차별할 수 있는 인물이 엘리자베스니까. 다른 말로 하면 이제 조용했던 수면에 퐁당, 파류상이 생긴 것. 이때 또다시 등장한 악령 같은 인물 한 명. 그게 누구인지, 왜 악마 같은 지 등등은 직접 읽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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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3-12-21 08: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독자를 책으로 확 끌어들이게 하는 문장들! 이미 읽어서 다행이다_ 생각했습니다요.

Falstaff 2023-12-21 15:31   좋아요 0 | URL
아, 읽으셨군요. 책의 내용이 우리가 늘 알고 있던 앙팡 테리블과는 다른 것에 좀 놀랐습니다. ㅎㅎ

stella.K 2023-12-21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장 콕토 옛날 프랑스 배운 줄 알고 있는데 말입죠.
희곡시, 영화시는 뭔지 모르겠습니다요. 그냥 배우들이 일상어가 아닌 시처럼 대사를 읊조리는 걸까요? 소설시도 그렇고.
암튼 함 읽어보고 싶네요. 친절한 설명과 안내도 감사함다.^^

Falstaff 2023-12-21 15:3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영화에 깊이 관여를 했습니다. 워낙 여러 방면의 예술행위에 걸쳐 있다보니까... 출연도 했는지 그건 모르겠네요.
희곡시, 영화시, 소설시... 저도 스텔라 님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마시고 그저 싼맛에 읽어보시면 괜찮을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