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진 항아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지음, 아돌프 멘첼 그림, 진일상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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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폰 클라이스트는 창비세계문학시리즈 14번, <미하엘 콜하스>를 처음 읽은 18세기 태생의 19세기 작가로 알고 있다. 16세기 독일 작센 지방의 말장수인 미하엘 콜하스가 작센 지역의 지주 귀족계급인 융커로부터 착취와 폭력을 당해 소송을 하지만 오히려 파국으로 치닫아 봉기를 일으키는 인물이다. 민중봉기 이야기는 우리나라에도 홍명희나 황석영 등 좋은 작가들이 있어 상대적으로 분량이 적은 노벨라 급의 <미하엘 콜하스>를 읽은 나는, 한 마디로 “내 취향하고 맞지 않다.” 평가절하해버리고 만 적이 있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미하엘 콜하스, 하면 민중봉기의 대표적, 상징적 인물이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는 1777년 폴란드 국경에 인접한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에서 태어났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나 차범근이 활약한 축구단을 보유한 유럽 항공운항의 허브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하고 다른 도시다. 성姓 앞에 폰von이 붙어 있으니 귀족 끄트머리는 되는데, 공, 후, 백, 자, 남작 같은 건 모르겠고 하여간 아들이 태어나면 거의 의무적으로 군인으로 복무했었나보다. 유럽 귀족 자제의 군입대는 그냥 하는 게 아니라 15세 또는 더 어린 나이에 사관학교에 입학해 장교의 자질을 키우면서 시작한다. 폰 클라이스트도 1792년 15세에 포트담 근위대에 들어가 프랑스 혁명의 자유와 평등, 인권 같은 불온한 사상의 동북진을 막기 위해 전선에 선다. 이후 1799년까지 7년 복무하고 예비역 대위 신분으로 제대한 후 꼴값을 떨기 시작한다.

  1800년에 프랑크푸르트 대학에 입학하고, 빌헬미네 폰 쳉게라는 아가씨와 약혼을 하는데, 편지를 통해, 정작 자신은 결국 프랑스혁명 정신인 인간의 회복을 위해 제대를 했건만, 남성과 여성, 국가의 시민과 아내의 역할 같은 고리타분한 주제로 약혼녀를 교육시키려 든다. 거참 신기한 귀족일세. 쳉게 아가씨도 나름대로 집에서 잘 교육받았건만 이런 수모를 고스란히 받고 있을까, 설마. 그리하여 약혼 2년 만에 아가씨는 약혼을 파투 놓았고,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공직이나 교수 자리를 마다한 폰 클라이스트 선생께서는 곧장 실업자라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 꼴 좋다.

  이후 그는 드라마 작가, 단편소설 작가, 저널리스트로 활약하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대에는 하나도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 이런 실패와 좌절은 결국 그토록 애타게 찾던 우라질 “인생의 목표”를 손에서 놓게 만들어 1811년 폰 클라이스트 나리께서는 베를린 근교 반제 호수에서 불치병을 앓던 유부녀 헨리에테 포겔 여사와 손잡고 퐁당 빠져 한 많은 서른네 살의 젊은 나이에 숟가락을 놓고 만다. 근데 알고 보니까, 이 동반자살이 불륜을 감당하지 못한 염문이(라도 됐으면 좋겠는데 그것도) 아니라, 삶의 희망을 놓은 거의 생면부지의 유부녀를 죽인 것 비슷한 정황이어서, 죽은 다음에도 한동안 욕을 바가지로 먹은 거 같다. 역자 해설을 보면 그렇다. 어떻게 보면 참 세기말적인 짧은 삶을 살다 간 귀한 집 철딱서니 없는 도련님 같기도 하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삶과 중편소설 <미하엘 콜하스>를 알면, 이 희곡 <깨어진 항아리>가 거의 슬랩스틱 수준의 코미디라는 것에 놀랄 것이다. 이 작품을 1811년에 발표했으니 벌써 2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하여 <깨어진 항아리>를 시작하자마자 21세기의 발랑 까진 독자는 누가 항아리 또는 주전자나 손잡이가 달린 단지der Klug를 깼는지 단박에 알면서 느긋하게 즐길 수 있지만, 사실 2백년 전의 독자/관객도 그건 마찬가지 아니었을까, 하는 게 솔직한 생각이다.

  큰 줄거리는 이미 말을 한 거다. 항아리가 깨졌고, 극은 항아리를 깬 작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스토리라는 것을. 18010년대에 항아리가 서민 재산에서 어떤 정도의 가치를 지녔는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속 항아리의 주인 마르테 룰 부인은 깬 작자가 자기 딸의 약혼자 루프레히트일지라도 기어이 누군지 밝혀 배상을 받고자 마을 판사에게 소송을 했다. 근데 한 밤중에 루프레히트가 과부 마르테 룰 여사의 외동딸 이브와 데이트를 하긴 했으나, 지극히 건전한 데이트였고, 당시 미풍양속으로도 충분히 납득이 갈 이른 밤에 헤어졌음에도, 하여간 루프레히트인지 레브레이트인지 둘 가운데 한 명이 범인임이 틀림없으니 판사 아담 선생께서 쇤네의 억울함을 밝혀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내용이 그렇다는 것이고, 막이 올라가면 마을 판사 아담이 다리에 붕대를 친친 감고 앉아 있는데 머리통과 얼굴이 참 볼만하다. 아담의 말을 전부 믿는다면, 오늘 아침에 잠에서 깨 아침 성가를 웅얼거리며 침대에서 기어 나올 때, 하루를 시작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 발을 어긋나게 했단다. 엇갈린 다리 때문에 급기야 균형을 잃고 물에 빠진 듯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엊저녁에 젖은 걸 말리려고 화덕 받침목에 널어놓은 바지를 붙잡았지만 당연히 휙 미끄러져 화덕 모서리에 새긴 숫염소 장식에 걸려 찢어지고, 자신도 이마를 화덕 위로 향한 채 거꾸로 처박혀 숫염소가 코를 내밀고 있는 모서리에 부딪혔단다. 그리하여 얼굴의 옆댕이가 마치 덩치 큰 놈이 격분해서 휘두른 주먹에 맞은 것처럼 피투성이가 됐다고.

  희극의 초반에 다리에 붕대를 감고 얼굴이 엉망이 된 마을 판사가 등장하면 이건 뭔가가 있는 거다. 게다가 반대편 머리통에도 혹이 불쑥 튀어나왔으며, 당시 서민들은 생각하지도 못할 어마어마한 가격의 가발 역시 난데없이 사라져 버린 거였다. 가발에 대해 물어보니까, 밤새 고양이가 가발 안에다가 새끼를 낳았다나. 뭐 그럴 수 있지. 새벽같이 판사를 찾아온 법원 서기이자 조연인 리히트도 그런 줄 안다. 리히트가 주인공 아담에게 말하기를, 각 고을의 재판을 검열하기 위하여 법률 고문관 발터 선생이 전국을 순회하고 있어서 위트레흐트에서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전한다. 갑자기 난리가 난 거다.

  다리도 아프고, 얼굴도 엉망이 된 데다가 고양이까지 가발에다 새끼를 낳아버려 당연히 하루 이틀, 아니면 적어도 한 주일 동안 마을에서 재판을 열지 않을 것이지만, 하필이면 뇌물 같은 거 모르고, 향응도 모르는 청렴한 발터 고문관이 온다 하니, 어찌 재판을 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하여 법정이 열리고, 위에서 말한 마르테 룰 부인이 깨진 항아리를 들고 법정에 출두하여 자기의 억울함을 토로하면서 항아리를 깬 진짜 범인을 찾아달라고 솔로몬 아담, 말이 그렇다는 건데 솔로몬 같은 지혜를 지닌 판사 아담에게 하소연을 하는 것이렸다.


  사건의 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이브. 마르테 룰 여사의 외동딸이자 항아리를 깬 유력 피의자인 루프레흐트의 약혼녀. 진짜 범인을 실제로 본 유일한 목격자이지만 그가 누구인지 밝히기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증인이다. 이브는 사실 연인과 범인 사이에서 참 난감한 처지에 몰려 있다. 이 난감한 처지가 무엇인지는 독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으나, 난감한 짓이 어디까지 진행한 것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러나 19세기 초에 쓴 작품이다. 괜히 야한 생각 마시라. 다만 하나, 미하엘 콜하스처럼 진실을 밝혀달라고 깡다구 있게 법정에 요청할 용기를 갖지 못한 아가씨라면 범인은 나름대로 사회적인 권세를 등에 업은 인물이리라는 것은 독자들은 쉽게 알 수 있다. 그걸(독자도 알고 있다는 걸) 극작가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모든 독자, 관객, 그리고 고문관 발터와 서기 리히트를 필두로 한 출연진의 초점은 어떻게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느냐, 범인은 어떤 처벌을 받을 것인가, 하는 데 집중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후 희극엔 최고의 악인이 등장한다. 이 작품도 예외가 아니고, 잘 알려진 모든 희극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 귀여운 악당이다. 재미있다. 그러나 책값이 오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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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12-20 09: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값 눌러보고 왔는데, 더 오른 거 같네요?! -_- 전자책을 노려야겠습니다.
그나저나 폴스타프 님, 지만지 책은 알라딘은 할인 1도 안 해주잖아요? 예스24는 5%(전에는 그러더니 이 책 확인해보니 0%네요) 암튼 교보는 10%해주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만지 책 사실 땐 교보로....

Falstaff 2023-12-20 16:31   좋아요 1 | URL
맞아요, 맞아요. 잠자냥님이 전에 콕 얘기하신 거 기억하고 있습니다.
ㅎㅎㅎ 그래도 지만지 드라마는 이젠 절대 내돈내산 안 하는 걸로 결정했습니다.
도서관에 신청하면 한 달 늦지만 팍팍 사주는 걸요.
연금 나올 때까지 무조건 개겨야 합니다.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