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네온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3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수영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어떻게 하다보니 또 오츠의 책을 읽었다. 가히 그로테스크의 여왕. 이 책도 엽기 여왕의 명성에 걸맞게 참 다양한 방면으로 피가 튀는 ‘엽기 넘실’이 만땅이다. 젊어서는 예뻤고 지금은 곱게 늙은 할머니가 어째 이리 입담이 험한 지 하여간 나는 조이스 캐럴 오츠의 책을 즐거운 마음으로 읽은 적이 없다.

  이 책은 아내한테 도서관 희망도서 신청을 좀 해달라고 졸라서 읽을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이면 캐럴 오츠의 책을 읽고 싶었을까? 첫 번째는 출판사 은행나무의 세계문학 에세 시리즈가 읽을 만한 책들을 잘 골라 출간하는 것 같은 믿음이 있어서 시리즈를 싹 읽어보자는 욕심이었으며, 두 번째로 다른 건 몰라도 조이스 캐럴 오츠가 이야기를 꾸밀 때 독자를 한 손아귀에 콱 움켜 쥐는 장악력이 대단하여 읽는 맛이 솔찮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엔 이이의 대표작으로 <좀비>를 치는 모양이지만 그건 모르겠고, 또다른 독자들은 <카시지>를 꼽기도 하는 것 같은데, 하여간 나는 이이의 작품을 그리 많이 읽어보지는 않았다는 전제로 말씀드리자면, <카시지> 이후에 오츠를 더 읽을 이유를 잊어버렸다. 오츠의 세계관이 나의 것하고 너무 차이가 나서. 그럼에도 이이의 작품이 시중에 나오면 한 구석이 자꾸 궁금해지는 거. 하긴, 이게 오츠, 대중문학 거장의 힘이리라. 이이가 장편소설 50편, 단편소설 천 편을 썼다는 거다. 그럼 밥은 언제 먹어? 잠은 언제 자고? 먹지도 못해, 자지도 못해서 빼빼 마른 거 아냐, 이거?


  모두 아홉 편의 중단편을 실은 모음집. 몽땅 엽기다. 가히 그로테스크의 여왕의 손길.

  조이스 캐럴 오츠는 독자를 실망시키지 않고 참으로 다양한 괴물을 등장시킨다. 남자 괴물이 대다수이긴 하지만 여자 괴물도 있기는 있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고, 내 경우에는, 오츠의 책은 읽을 때는 재미있어서 금방 스토리에 함몰해 빠져들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이이가 쓴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상당히 헷갈리다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읽기는 읽었는데 도무지 기억이 안 나는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이이의 작품이 후져서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하필이면 나 같은 무지렁이 독자가 자기와 합이 맞지 않는다고 우두둑 우기는 것을 당신이 믿어준다면 그렇다는 뜻이다. 이이는 재미는 있지만 나하고 합이 맞지 않는다.


  뉴저지 주의 스톤리지 시 교외 시골에서 30년간 살아온 중년의 애비게일은 뭔가 불편한 게 있었다. 그리하여 수 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온 병원에서 모종의 검사를 받고 나름대로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리다가 3월 어느 날 드디어 “음성” 판정이 나와 남편을 위해 촛불과 와인을 곁들인 저녁 식사를 준비할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매일 지나가는 노스리지 도로이건만 오늘은 집을 불과 1킬로미터 정도 남겨두고 “우회하시오!” 라고 쓰인 푯말이 세워져 있었다. 에비게일은 표지를 무시하고 그냥 직진해버릴까, 겨우 1킬로만 가면 되는데, 하고 잠깐 고민하다가 좁은 우회도로로 접어들었고, 3월이지만 미국 뉴저지 날씨로는 여전히 “맹렬한 겨울”이라서 운전해 가던 차의 앞바퀴가 배수로에 박혀버렸고, 앞창이 날아들어 이마를 친 듯 코피가 흘렀다. 차가 기울어 빠져나가기도 힘들었으며 뒷자리에 아무렇게 던져 놓은 핸드백도 바닥 구석으로 밀려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휴대폰 역시 핸드백에 들어 있었다. 억지로 기어나온 에비게일은 시골 좁은 길로 다니는 차량을 한 대도 발견할 수 없어서 할 수 없이 전화 한 통만 빌리고자 한 5백 미터 앞에 보이는 가정집으로 한겨울에 신발 한 짝만 신은 채 걸어서 도착했다.

  벨을 눌러도 집안에서 아무 반응이 없어 부엌문 쪽으로 간 에비게일은 열쇠를 숨겨놓을 만한 곳을 찾아 그쪽으로 집안에 들어간다. 이 장면을 읽는 독자는 누구라도 에비게일한테, 들어가지 마, 들어가지 마, 이렇게 기원하게 되리라. 독자가 무엇을 원하든지 절대 그대로는 하지 않는 주인공답게 에비게일은 집안으로 들어가 세수를 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잠옷으로 갈아 입은 채 부부침실에 들어 침대 속에서 깊은 잠에 빠져버린다. 시간이 지나, 드디어 집의 주인인 것 같은 흰머리의 나이든 남자가 방에 들어와, 마치 남편처럼 오늘 그가 사업상 만난 사람과 일 이야기를 하면서 우울하지만 상냥하게 에비게일을 달래는 거였다. 당장 집안에서 빠져나가겠다는 강박 증세가 생긴 에비게일은 수심에 잠긴 정도를 넘어 절망에 가까운 지경까지 이른 듯이 보이는 남자, 감금자를, 어떻게 했을까? 단편소설은 스토리를 이야기하기가 이렇게 힘들다. 한 마디만 더 하면 내용을 싹 다 말해주는 꼴이라서.


  위의 이야기가 첫 번째로 실린 <우회하시오>라는 단편이다. 이것처럼 책 속의 작품들은 늘 해왔던 일상 속에 도사리고 있는 재앙을 오츠 특유의 방식으로 뽑아내는 데 초점을 둔다.

  제일 괜찮게 읽은 작품은 평범한 여성이 남자를 사랑하거나, 관계를 맺은 과정을 그린 듯하지만 사실 창이나 간판에 네온을 장식한 곳, 즉 술집을 드나드는 버릇이 있는 젊은 여성의 알코올 의존에 더 집중한 중편이자 표제 작품인 <밤, 네온>이었다. 조이스 캐럴 오츠는 내가 읽은 작가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작품을 조금 더 쉽게 쓰려고 그랬는지 하여튼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자를 괴물이거나, 색정광이거나, 변태, 폭력성향을 소지한 위험 인물로 만들었다. 그거야 뭐 작가 마음이니까 독자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근데 너무 자주 써먹는 거 아냐? 꼭 괴물 같은 것(들)이 등장해야 작품을 만들 수 있는 거야?

  이젠 오츠는 그만 읽으려 하지만, 이런 다짐은 언제나 쉽게 깨진다. 경험상 그렇더라고.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3-11-28 06: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또 읽으신다에 1표. ㅋㅋㅋㅋ 저는 이건 넘기려고 했는데….. 으음.

Falstaff 2023-11-28 06:09   좋아요 0 | URL
저도 자신은 없어요. ㅎㅎㅎ

은하수 2023-11-28 0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무서워서 못 읽어요
몇 작품 읽었다 트라우마가... 허거걱...
전 그래서 그런거 쏙뺀 <멀베이니 가족>이 좋더라구요. 오히려 이 작품이 오츠의 작품 아닌듯한..^^

Falstaff 2023-11-28 16:32   좋아요 0 | URL
저도 그거 때문에 이제 오츠 그만 읽으려는 겁니다. 흑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