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나 크리스티
유진 오닐 지음, 이형식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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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유진 오닐. 오닐의 책은, 일부러 검색을 해보지는 않지만 눈에 띄기만 하면 내용과 관계없이 얼른 사고 본다. 이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번엔 사두고 너무 오래 묵혔다가 읽는다. 도서관을 이용하니 사 둔 책은 언제라도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지 얼른 읽게 되지 않았다.


  스웨덴 이민자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영화 <스타 탄생>에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함께 출연한 저음의 가수와 우연히 이름이 같다. 하지만 오닐의 크리스는 뱃사람. 일년에 집에 있는 날이 며칠 안 되는 천생 뱃꾼인 줄 알았는데 사실 바다를 증오한다. 아내가 죽을 때도 바다에 있었고, 바다 일을 버리지 못하여 하나 있는 딸 애나를 보살피지 못한다. 그리하여 미국의 사촌에게 보내 바다와 떨어진 곳에서 땅을 밟고 살고, 농사를 짓는 남자를 만나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랐다. 지금은 뉴욕을 포함한 동부 해안과 오대호를 돌며 석탄 바지선 선장을 하고 있다.

  막이 오르면 뉴욕 부두 근처의 술집 ‘자니 더 프리스트’. 아직 등장하지 않은 크리스한테 술집 주소로 편지가 와 있다. 늘 이곳으로 편지가 오면, 물론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단골 크리스가 뉴욕에 들를 때마다 편지를 전해주고는 했다. 이번엔 여자 글씨의 편지 한 장. 크리스는 오십 줄의 사내. 애나를 친척집에 보낸 것도 십오 년 전. 설마 홀아비가 여태 혼자 살고 있다고 믿지는 않겠지? 바지선은 대개 살림을 살 수 있게 개조한 것이 보통이다. 지금은 나이 들어 퇴물이 된 논다니 마티와 함께 살고 있다. 전작이 있는 크리스가 술집에 들어와 쾌활하게 위스키를 몇 잔 마신 다음 편지를 받는다. 독자들이 예상할 수 있게 딸 애나한테 온 편지다. 곧 뉴욕에 도착한다는. 이어서 동거하고 있는 마티도 등장해 함께 술을 마시다가 잠깐 크리스가 퇴장하는 틈을 타 주인공 애나가 등장한다.

  애나. 친척집에 들어가서 (애나의 말에 의하면) 노예처럼 시키는 일을 죽도록 하다가, 열여섯 살 됐을 때 거구의 힘센 셋째 아들한테 겁탈을 당한 후 도망을 나와 베이비시터로 있었다. 이 보모란 직업이 크리스 크리스토퍼슨 씨가 아는 애나의 마지막 모습. 보모라고 별 다른 것이 없어서 혹독한 대우를 견디지 못한 애나는 다시 집을 나와 매춘업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몇 년. 병이 들어 입원해 치료를 받은 후 완행 열차를 타고 아버지한테 의지하려고 뉴욕에 도착한 것.

  마티는 한 눈에 알아본다. 애나의 지금 처지를. 상황 파악을 잘 하고 천성적으로 마음이 아름다운 마티. 세상에 원수질 일은 없는 것이 좋다는 신조의 마티는 조용히 크리스를 불러 이야기한다.

  “잘 들어! 나는 바지선으로 가서 짐을 싸서 날라 버릴 거야. 저 안에 그녀가 있어. 당신 딸 애나 말이야. 방금 와서 당신을 기다려. 잘 돌봐 줘, 알았지? 아팠대. 자, 안녕! (뒷방으로 가서 애나에게) 잘 있어, 아가씨. 나 가야 돼. 또 봐.”

  마티가 세월과 집구석과 부모를 잘못 만나서 그렇지 이만한 천사가 또 어디 있을까? 천사는 이렇게 1막에 잠깐 나오고 사라진다.


  2막부터 드라마는 시작한다.

  열흘 후 매사추세츠 프로빈스타운 항구에 정박 중인 바지선이다. 마티는 정말로 그날로 짐을 싸서 사라졌고 대신 애나가 아버지와 함께 산다. 이 날은 안개가 자욱해 코 앞의 사물도 식별하기 힘든다. 부녀 사이에 말다툼이 생긴다. 아버지는 딸이 농장에서 건실한 남자를 만나 살기를 바라고, 딸은 남자란 남자는 다 겪어본 베테랑이나 된 것처럼 남자라면 넌더리가 나고 특히 아버지한테 얘기는 하지 않았지만 친척집 셋째 아들에게 당한 능욕의 기억 때문에 농촌은 아예 머리에 떠올리기도 싫다.

  이때 바다에서 들리는 사람의 목소리. 어제의 폭풍우에 난파당한 선원들이 조각배를 타고 탈출해 노를 저어 온 것. 이 가운데 웃통을 벗어 던진 채 더러운 작업복만 걸친 아일랜드 남자 버크. 어깨가 떡 벌어지고 180센티미터가 넘는 건장한 사나이로 얼굴은 강하고, 거칠고, 대담하고 반항적으로 잘 생긴 사내. 잠을 못 자 핏발 선 짙은 색 눈이 애나를 바라보는데 팔뚝의 핏줄이 푸른 실처럼 울퉁불퉁하다.

  화물선의 화부였으며 생긴 모습대로 다혈질이라 거침없이 싸움을 걸고, 진짜로 싸움을 하고, 싸웠다 하면 무슨 수를 쓰든 상대를 때려눕히는 사내. 버크가 등장하는 순간 관객과 독자는 애나와의 연애가 생길 것임을 짐작한다. 둘은, 특히 남자에 학을 뗀 애나는 버크의 사랑에 코웃음 치며, 아버지 크리스 역시 버크가 육지 남자가 아닌 뱃놈인 것을 심하게 마땅히 생각 못한다.

  3막에 들어서면 갈등이 심해져 버크는 애나에게 청혼을 하려 하고, 아버지 크리스는 주머니 속에 칼을 넣고 담판을 지으려 도사리며, 애나는 자신이 정말로 버크를 사랑하는지 아닌지 확정하지 못한다.


  당연히 나는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을 것.

  석탄 바지선에서 벌어지는 치정극 하나가 생각난다. 지아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3부작 가운데 <외투>. <외투>에서는 젊은 아내 죠르제타와 부정을 저지른 청년 루이지를 늙은 남편 미셸이 단매에 때려 죽이지만 <애나 크리스티>에서 딱 벌어지기는 했으나 작은 체구의 크리스 선장이 거구에 단단한 몸을 가진 천하장사 마징가 같은 버크와 좋은 상대가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안심하시라. 유진 오닐 치고 '그나마' 순한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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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23-11-21 0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뽀빠이와 마징가의 대결인가요. 기운 센 천하장사 무쇠로 만든 ~ 주제가 흥얼거리면서 책 사러 가요.

역자 이름이 낯익어서 보니 펭귄 프루스트 역자와 동명이인이군요. (그 역자일 리는 없죠 당연히)

유부만두 2023-11-21 08:44   좋아요 1 | URL
겸사겸사 도밍고의 루이지 이중창 보고왔어요. (20살로 우기는 50이던대요) 외투 언급 감사합니다.

Falstaff 2023-11-21 15:40   좋아요 0 | URL
뽀빠이와 마징가가 대결 직전까지 가는군요. 근데 게임이 안 될 겁니다. 마징가는 무쇠 팔, 무쇠 주먹인데 사람의 팔과 주먹이 무슨 수로 버티겠습니까. ㅎㅎㅎㅎ
옙. 프루스트 이형식 선생이 좀 더 선배일 겁니다. 불어 역자 가운데 제가 좋아하는 1인입니다. ^^

와우, 유튜브 보셨어요? 진짜 드라마틱 오페라입니다. 푸치니 다운 엽기 막장 불륜 치정 드라마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