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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 읽었다. 작년 10월에 시작해서 오늘, 9월 13일에 끝냈다.
20여 년에 걸친 기번 필생의 역작 <로마제국 쇠망사>. 제목 그대로 쇠망, The Decline and Fall, 쇠퇴는 전성기 때부터 시작한다. 그리하여 로마의 쇠망은 5현제,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 시기부터 서로마 제국이 문을 내리고,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이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되는 순간까지의 역사다. 로마는 늑대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 형제가 세웠는데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도 로물루스. 기독교를 공인했으며 동로마제국을 만든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로마 제국의 용맹한 군인 황제답게 전세가 불리해지니 “내 목을 쳐 줄 기독교인 없소!” 외치며 성벽에서 고군분투하다가 난입한 적군 말단 병사의 창에 찔려 죽은 마지막 황제 역시 콘스탄티누스. 동로마제국은 그렇게 끝난다. 해는 져서 어두운데 갈 곳이 없다.
동로마제국은 <로마제국 쇠망사 5>에서 사실상 이미 끝난 상태였다. 이제 다시 중흥의 기회도 없을 만큼 쇠약해진 제국. 그래도 살 수 있으면 어떻게 해서라도 살아내야 하는 것이라, 비잔티움은 로마의 교황에게 인공호흡을 부탁한다. 비티니아에서 나라를 일으킨 투르크 족이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십 년이 지나니 이제 비잔티움의 턱 아래인 아나톨리아 반도 서쪽 끝까지 바짝 올라와, 아직 정식으로 적대적 행위를 한 적은 없지만 상당한 위협으로 등장했다. 막강한 투르크 군대가 마음먹고 짓쳐 들어오면 한 해도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노플은 막을 내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당시의 황제 알렉시우스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런 위기의식이 궁내에 퍼져 있을 때, 프랑스 아미앵 출신의 은자 페트루스가 예루살렘의 성묘 순례에 나섰다가 무슬림에게 탄압받는 기독교와 기독교도들의 모습을 보고 도무지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이 양반이 자기가 무슨 예수라고 저 황야에 앉아 40일 동안 옴마니밧메훔, 도만 닦은 줄 알았더니, 예루살렘이 이교도의 손에 망가지는 걸 보고 비잔티움에서 군사를 보내 어떻게 해달라고 동방교회의 총대주교에게 하소연을 했다. 총대주교는 동로마제국 황제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나약한지 오히려 은자에게 오히려 넋두리를 하는지라, 은자 페트루스가, “좋소! 그렇다면 내가 대의를 받들어 유럽에서 군대를 일으켜 데리고 오겠나이다.” 큰소리 뻥뻥 치고 그 길로 정말 유럽으로 발길을 돌렸다.
은자 페트루스는 왜소한 체구에 못생긴 얼굴, 꾀죄죄한 입성을 했으나 눈빛이 형형하고 무시무시한 웅변술을 장착했다고 하는데, 이런 사람이 어떻게 황야에서 은둔해가며 도만 닦았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이는 유럽을 떠돌며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무슬림들의 무도한 행위에 관해 침을 튀기 시작했는데, 이 이야기가 교황의 귀에도 들어가, 솔깃해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이 광신자를 예언자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확실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에 기가 산 광신도 페트루스는 주로 북 이탈리아와 인접한 프랑스, 독일 지역을 다니며 그의 설교에 현혹된 온갖 동네 건달, 양아치, 범죄자들이 먼저 성지 회복을 주장하며 멀고 먼 길을 떠난다.
이 때가 1090년대. 불과 십여 년 전에 그레고리우스 7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여 교황이 기거하던 한 겨울 산골 카노사 수도원까지 맨발로 걸어와 죄를 고백하고 사과했을 정도로 기독교의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물론 결코 수모를 잊지 않은 하인리히 4세가 나중에 로마를 점령했고, 위협을 느낀 교황은 (예수의 대행자도 죽는 게 무섭긴 한가 보다) 남부 이탈리아로 도망하다가 비참하게 죽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기독교의 전성기였다는 말씀. 우르바누스 2세는 1095년 공의회를 열고, 성 베드로의 깃발 아래 뭉친 수만 명의 군사를 최고 지휘자인 툴루즈의 백작 레이몽이 이끌고 1096년 8월 15일에 출병하기로 결정한다.
<로마제국 쇠망사 6>은 이렇게 책을 열자마자 십자군 전쟁으로 시작한다. 1차 십자군은 얘기한대로 8월 15일 성모승천축일에 출발한 정규군을 일컫기도 하지만 페트루스의 입놀림에 홀딱 넘어가 이들보다 먼저 출발한 건달들을 말하기도 해서, 이 건들건들 거리기만 하는 부랑자들이 자기 영토를 관통해 지나가면서 주민들한테, 혹시 알아, 궁전을 향해 무슨 폭력을 구사할 지 몰라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도중의 거의 모든 나라에서 환영받지 못해 말 그대로 거지꼴이 되어 비잔티움에 도착한다. 비잔티움에 도착해도 마찬가지다. 동로마 황제 알렉시우스는 궁리를 하다가 건달들에게 예루살렘으로 곧장 진격하라고 바람을 풍풍 내주면서 지나가는 길에 함께 싹 쓸어버린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거뭐쥔다. 동시에 한 방에 걱정이 없어졌는지라, 여태 로마를 향해 굽신거리면서 도움을 요청했던 태도를 싹 바꾸어 버린다. 이렇게 잘 나가다가 안면을 여러 모습으로 바꾸는가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 황제 시절은 아니더라도 네 번째로 십자군 원정을 온 라틴 사람들에게 그만 콘스탄티노플을 함락당한다. 이게 첫 콘스탄티노플 함락. 그래도 황제의 대는 끊기지 않지만 두 번째엔 결코 행운이 찾아오지 않는다.
이어서 등장하는 흥미로운 주제는 칭기즈칸과 몽골군이 중국에서 폴란드까지 세상을 정복해버리는 일. 정말 역사의 거대한 한 페이지다. 여태 알기로 이때 몽골 왕가에서 초상만 안 났다면 신성로마제국이니 프랑스, 에스파냐까지 몽땅 거덜이 났을 거라는 것. 에드워드 기번은 그런 것까지는 이야기하지 않고, 칭기즈칸의 손자 티무르가 사마르칸트의 제위에 등극한 후 곧장 서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짓쳐 나가더니 난데없이 호시탐탐 비잔티움을 한 입에 먹으려 초고추장을 버무리고 있던 오스만 투르크의 귀싸대기를 올려 붙인 재미있는 스토리를 소개한다.
지금의 터키에 터를 잡은 오스만 투르크. 이 사람들은 무슬림을 믿는 회교도지만 아라비아 반도, 그리고 페르시아와 관계없는 인종이다. 책에 의하면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오랜 세월 터를 잡고 살던 타타르 족이 훈족 등에 밀려 조금씩 이동해 정착한 민족이라고 한다. 그동안 투르크 족은 오스만, 오르한, 무라드 1세, 바야지트 1세 등을 거치며 탄탄한 군사강국이자 독실한 회교국을 거듭나 해협 건너 자리 잡은 휘황찬란한 문화의 보고,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가문의 과제로 남겨 놓은 상태였다. 이제 때가 무르익어 숟가락만 대면 저절로 꿀꺽 삼킬 수 있는 모든 조건이 무르익었는데, 난데없이 저 동쪽에서 티무르가 쳐들어온 거였다. 당대 서아시아에서 만난 최고의 영웅이자 호적수. 티무르 대 투르크의 왕 바야지트. 아무리 투르크라 할지라도 역시 칭기즈칸의 손자에겐 부족한 상대여서 싸움에 지고 바야지트도 포로로 잡히고 만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티무르는 바야지트를 극진하게 대우하고, 내가 이긴 건 우연이었을 뿐이오, 거 참, 립서비스도 맛깔나게 해주고 떠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 투르크는 이기지도 못할 전쟁을 치르느라 수많은 병력도 잃었지, 졌으니 전쟁배상금도 함빡 물어줬지, 부심에도 깊게 스크래치 가버렸는데, 원래 이럴 때 죽어라, 죽어라 하는 법이라 바야지트가 죽자마자 아들들끼리 내란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중에 마호메트 1세가 권력을 잡고, 그의 손자 마호메트 2세 세상이 되어야 오스만 투르크는 그때까지 역사상 가장 커다란 대포를 말 마흔 마리가 끌게 한 채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콘스탄티노플 앞마당에 도착할 수 있었다. 티무르 때문에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이 50년 뒤로 미뤄진 것. 에드워드 기번은 말한다. “비록 우발적이지만 이 중대한 공헌이 바로 이 몽골 정복자의 일생과 인격을 소개하는 데 한 장 전체를 할애한 이유다.”
비잔티움이 멸망한 후에는 당연히 그곳에서도 있었을 후손 몇 명에 의한 (언제나 실패하고야 마는) 복귀운동. 그리고 20년 동안 썼으면서도 그래도 하지 못한 이야기. 비잔티움이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내 로마에서 있었던 마지막 호민관 리엔치의 성공과 몰락, 기독교가 아니라 교회, 정확하게 말해서 교회 수장들이라는 “인간”들의 역겨운 권력 투쟁, 더 역겨운 호색 이야기, 그리고 20년 과업을 마치는 짤막한 소감으로 채운다. 어쨌든 이것으로 여섯 권 다 읽었다. 격렬하게 운동하고 난 상쾌함 같은 기분. 그래 이 맛이야. 이 맛 때문에 두꺼운 책을 읽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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