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 아로새겨진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7
다와다 요코 지음, 정수윤 옮김 / 은행나무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일본의 창세 신화에 이자나미 여신과 이자나기 남신이 나온다. 이자나미는 아자나기의 동생이자 아내로 두 신은 하늘에서 창을 바다에 꽂아 휘휘 저어 육지가 솟아올라 일본 열도를 만든다. 지상에 내려온 신은 궁궐을 만들고 혼인, 즉 동침을 해 넓은 국토와 일본에 특별히 많은 여러 신god을 만든다/낳는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불의 신을 낳다가 이자나미는 생식기에 치명적인 화상을 입어 끔찍한 고통 속에서 구토를 하고 방뇨, 방분을 하면서 죽음에 이른다. 창조의 여신이 죽어가며 쏟아냈던 구토와 방분, 방뇨 속에서 진흙, 물, 곡물(토기에 농사지은 곡물을 요리한 것을 의미)의 신이 탄생한다. 이후 죽은 아내이자 누이와의 복잡한 갈등과 대결 같은 것이 있지만 생략하기로 한다. (두산백과 참조했음.)

  다와다 요코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창세신화는 조금 다르다. 여러가지 버전이 있는지, 아니면 소설가의 픽션인지는 모르겠다. 이자나미와 이자나기가 일본 열도를 만들고 궁궐을 지은 다음에 동침해 맏이를 낳은 것이 딸 히루코 여신이다. 그러나 애초에 여신 이자나미가 먼저 이자나기한테 동침하자고 옆구리 쿡쿡 찌른 벌로 히루코蛭子(거머리) 여신은 신들의 기대치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허약체로 태어나 살이 마치 거머리 같은 수준이라서 맏이임에도 불구하고 축복을 받기는커녕 갈대로 만든 배에 실려 바다로 떠내려 보냈다. 다들 금방 죽었을 거라고 짐작하지만, 그걸 누가 알아?

  히루코 여신보다 한참 나이 어린 동생 가운데 스사노오라는 이름의 신이 태어났다. 무시무시하고 거친 청년으로 자라 여기저기서 폭력을 써 누나(거봐라, 바다에서 안 죽었다)를 힘들게 하더니, 말의 가죽을 벗겨 그걸 뒤집어쓴 채 피륙 짜는 젊은 여자를 위협하다가 와중에 베틀의 뾰죽한 부분으로 여자의 음부를 찔러 죽게 했다. 이 히루코와 스사노오는 작품 속에서 Hiruko와 Susanoo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Hiruko는 모르겠고, Susanoo의 나이는 상당해서, 십대 후반 기껏해야 이십대 초반의 에스키모 청년 나누크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식당 주인의 할아버지와 동업을 하다가(할아버지의 비슷한 또래라는 말씀), 한 야성적인 여자 카르멘을 쫓아 남프랑스 아를에 정착했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도 놀랍게도 거의 늙지 않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젊은 모습의 나이든 Susanoo를 이해하기 위하여 일본의 전래 동화 하나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우라시마 타로라는 잘 생기고 가난하고 마음씨 고운 청년이 지나가다 보니까 아이들이 거북 한 마리를 잡아서 몹시 괴롭히고 있었다. 타로는 거북이 너무 불쌍해서 아이들을 혼내 쫓은 다음에 거북을 바다로 돌려보냈다. 며칠 후 바닷가를 거닐던 타로 앞에 거북이가 나타나 내 등에 타시오, 좋은 구경 한 번 해봅시다. 하는지라 그렇게 했더니 용궁에 도착했고, 수염이 허연 용왕 대신 공주가 나타나서 온갖 부귀영화를 다 선물해주었다. 이렇게 며칠을 보내고 이제 이별의 장면. 공주는 보석함을 기념 선물로 주더니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이게 가당한 이야기인가? 집에 돌아온 타로는 당연히 보석함을 열었고, 순간 보석함에서 피어나온 연기가 타로의 기도를 타고 폐로 들어가, 용궁의 열흘은 지상의 칠십 년이라, 단박에 일흔 살을 더 먹어버려 장가도 들지 못한 꼬부랑 할아범이 되고 만다. 용궁의 공주, 원래 이런 족속들이 하는 짓이 다 그렇다. 애초에 안 줬으면 될 거 아니냐는 말이지. 사람의 특징이 호기심인데, 누가 그걸 안 열어보고 배겨?


​  다와다 요코는 1960년생으로 와세다 대학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추억이 워낙 강했던지 1982년에 독일에 정착해 함부르크 대학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이후 취리히 대학에서 독문학 박사를 취득했다. 독일 국적을 취득했다고 들었는데, 이중국적인지 일본 국적을 버리고 독일인으로 살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작가가 모국어를 버리고 언어체계가 완전히 다른 나라에 가서 살며, 이국의 문자로 작가 활동을 시작하고, 상당한 정도의 성취를 얻는 일은, 우리가 밀란 쿤데라나 아고타 크리스토프 같은 몇 몇 특별한 천재들의 이름에 익숙해서 그렇지 이게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다. 위의 두 작가는 그래도 어순이 비슷한 지역에서 서유럽으로 넘어간 경우인 반면, 다와다 요코는 완전히 문장 구조가 다른 동아시아에서 자란 다음에 낯선 문장체계로 진입해 더욱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어로 작품을 발표할 경우에는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사용하는 빈도가 잦았다고 하는데, 이방의 언어로 글을 썼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얼마나 자기 모국어에 대한 향수가 절절했을까? 이 책에서도 Hiruko는 덴마크를 포함한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의 조금씩 다른 언어를 나름대로 편집해서 반도국들의 문장에 합당하지 않지만 이들 모든 나라 사람들과 충분할 정도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나름의 언어를 만들어 사용한다. 그러나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하면 당연히 더욱 적절한 소통이 가능할 터인데 Hiruko에게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책의 후반에 같은 언어를 쓰는 Susanoo와 만나기 전에는.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그러나 듣기만 할 뿐 한 마디도 할 의사가 없는 Susanoo에게 기총소사 같은 대화의 폭포를 쏟아낼 때에 자연스럽게 (이미 잊은 줄 알았던) “인연”같은 단어가 자신도 의도하지 못한 사이에 흘러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Susanoo가 왜 한 마디도 모국어를 하지 않느냐고? 그가 말을 하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옛이야기 가운데 공주가 준 보석함을 여는 행위와 같은 것이라서 그동안 유지한 젊음을 한 순간에 잃어버려 늙어 쪼그라든 노인으로 변할 위험이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런 것들을 합하여, 이 책의 주제는 독일, 유럽에서 자기의 말을 사용하지 못하는 작가의 초상, 모어에 대한 그리움, 그것을 찾아 떠나는 오딧세이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  책은 “Hiruko 삼부작” 가운데 첫 권이다. 2권은 은행나무 에세 시리즈의 12번으로 2023년 8월에 출간했고, 3권의 제목은 <태양제도太陽諸島>인데, 태양제도는 일장기와 섬나라, 즉 일본을 가리키는 거 같으며, 2022년 출간이라 했으니 지금 번역 중이지 않을까 싶다. 즉 1권만 보면 미완성 작품이란 뜻이지만, 여느 삼부작이 거의 그렇듯이 <지구에 아로새겨진> 역시 독립적으로 읽어도 좋다.

  디스토피아 적인 미래. 세상의 원자력 발전소가 차례차례 고장이 나서 물고기 개체수가 절대적으로 줄어들고, 온난화 역시 가속화된 지 오래, 그린란드에 사는 에스키모들도 사냥과 물고기 낚시 대신 빙하가 녹아 드러난 대지 위에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책에서는 계속 ‘이누이트’ 대신 ‘에스키모’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 말은 “눈 신발 끈을 묶는 사람”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란다. 반면에 다와다가 직접 소식을 듣고 심한 충격을 받았듯이, 세계 각지에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차례차례 심각한 고장을 일으켜 다량의 방사능 물질이 바다로 유입되는 바람에 바다 생물 개체수가 극적으로 줄어든 것도 에스키모들이 사냥을 하지 못하게 된 중요한 이유이다.

  세상은 변하는 법이라 그린란드는 오랜 식민지 시대를 마감하고 덴마크에서 독립을 쟁취했으나 여전히 포스트 식민주의라는 관계로 종속되어 있다. 덴마크는 세상이 다 알아주는 정치적 청결성과 비폭결성을 유지하고 있는 작은 나라로 비오는 수도 코펜하겐이 첫 무대다. 집에서 TV “사라진 조국”에 관한 토크 쇼를 보던 중요 등장인물 크누트는 화면에서 전혀 다른 인종의 여자를 발견하고, 그가 신기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에 대단한 흥미를 느낀다. 그도 그럴 것이 크누트기 언어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방송국에 전화를 해서 여자를 만나 조금씩 가까워진다. 이 여자가 주인공 Hiruko. 중국 대륙과 폴리네시아 사이에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진 열도 출신으로, 열도가 침몰하기 전에 유럽으로 공부하러 왔다가 이젠 갈 곳이 없어진 인종이다. 다와다 요코는 열도 침몰을 2011년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빗댔다고 한다.

  Hiruko는 오덴세의 메르헨 센터에서 동화를 구현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역시 언어에 상당한 관심이 있다. 더군다가 자신의 모(국)어, 나라가 없어졌으니 그냥 모어를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도 모르게) 애타고 찾고 있었다. 크누트가 내일 사라진 나라의 언어를 연구할 수 있는 연구 과제로 적당한 마을인 룩셈부르크의 고대 로마 도시 트리어에서 열리는 우마미 페스티벌에 갈 예정이며, 페스티벌의 초점은 Tenzo전좌典座, 불교 선원에서 식사, 의복, 방석, 이부자리를 담당하는 직책을 가리키는 이름을 가진 열도 사람이 일본 음식의 국물을 내는데 중요한 방식인 ‘다시’ 다시마, 가다랑어, 멸치 등을 적절하게 혼합한 첨가물에 관하여 강의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이에 혹한 Hiruko는 자신의 모어를 사용하는 사람과의 자연스러운 대화를 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득히 안고, 기꺼이 크누트와 함께 자신의 언어를 향해 대 항해를 시작한다.

  재미있는 책이다. 이런 작품이 늘 그렇듯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우연이 작가가 사용하는 언어를 국어로 하는 나라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얽히게 구성을 해, 약간 억지스러운 대목이 눈에 띄긴 하지만 이 정도도 이해하지 못할 독자는 없을 것이다. 읽는 내내 작가 다와다 요코가 조금 짠했다. 이국의 땅에서 얼마나 모국어에 대한 향수가 절절했으면 이런 작품을 썼을까? 하긴 작가더러 유럽까지 가서 살라고 옆구리 쿡쿡 쑤신 사람은 없을 것이니 다 작가의 팔자소관이긴 할 텐데.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부만두 2023-09-21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야간열차”를 예전에 읽었는데 그 책에서도 이국의 땅과 언어를 살아가는 쓸쓸함을 읽었어요. 그런데 “지구에”는 설화를 쓴다니 그 향수가 더 진하게 드러나겠군요. 서늘한 아침에 어울리는 리뷰 잘 읽었습니다.

Falstaff 2023-09-21 16:02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저는 이 책 읽으면서 베를린 사는 우리나라 작가 배수아 생각이 나더라고요. 그리고... 오에 겐자부로 소설 보면 오에의 처남이자 영화감독이 쉰 살 때 연애해서 아이까지 출산한 애인이 베를린에서 살았던 것도.... 하나 더, 얼마 전에 본 영화 <타르>에서 베를린 필의 수석지휘자 타르가 사랑하기 시작한 러시아 출신 첼리스트 올가한테 반해 올가 사는 집에 쫓아가다가 사고나는 장면.
세 씬 다 이국의 언어를 쓰면서 베를린 빈집에 사는 예술가(지망생) 이였습니다. 낡고 지저분한 무법의 폐허에 사는 사람들 말입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