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가 맨 앞 문학동네 시인선 52
이문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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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문재. 정말 오랜만에 읽는다. 가장 최근에 읽은 이문재 시집이 25년은 확실하게 지났고 30년까지는 안 됐다. 언제나 가까이 있는 듯해서 눈에 자주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때 마다 조금 있다 읽지, 해서 차일피일, 그게 하세월이 됐던 시인이다. 이 양반이 나와 고향이 같다. 나는 태생이 서울이지만 누가 고향을 물어보면 큰집이 있고, 양친 이주사와 정여사의 뼛가루가 놓인 김포가 고향이라고 얘기한다. 저 넓은 들 너머로 아른하게 보이던, 공 잘 차는 회택이네 집, 공부 잘하는 구택이네 집, 하면 김포 사람이면 누구나 알던 검단면 당하리 큰 들, 거기는 내 고향이고 이문재도 아마 이 근처일 거 같다. 이거 여차하면 같은 집안 사람 아녀? 거기 사람들이 쓰는 경기도 사투리는 이북 말을 닮았다. 이문재의 늙은 아버지도 그 말을 썼을까? 시를 읽다 보면 아버지가 대강 50대 중반에 늦둥이를 둔 거 같던데, 그럼에도 동생도 있는 거 같았는데. 동생이 나중에 이랬다던데.



  문자 메시지


  형, 백만 원 부쳤어.

  내가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야.

  나쁜 데 써도 돼.

  형은 우리나라 최고의 시인이잖아. (전문)



  시인이 쓰는 “시”는 픽션일까, 논픽션일까? 아니면 그딴 거와 관계없는 자연의 모방일까? 여기서 말하는 자연이 꼭 산천초목만 일컫는 게 아니라, 사람, 특히 노래하는 인간의 가슴앓이나 뇌세포의 화학작용도 다 자연이라고 볼 때의 그 자연을 모방하는 것일까? 뭐, 가슴앓이가 심근경색을 말하는 거냐고? 그럴 수도 있다. 그것도 자연활동이라면. 이문재가 1959년 9월생. 이제 딱 예순 하고도 넷. 시 쓰기 좋은 나이네. 그가 십년 만에 낸 시집에서 가장 앞에 내세운 작품을 읽어보자.




  사막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다.

  모래와 모래 사이다.


  사막에는

  모래보다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

  사이가 더 많아서

  모래는 사막에 사는 것이다.


  오래된 일이다. (전문)



  먼저, 무엇보다, 1연과 2연은 중복이다. 같은 말의 중언이다. 근데 시의 독자인 나는 시인더러 두 연 가운데 하나를 지우라고 요구할 수 없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시인도 번하게 알면서 그렇게 썼을 터이니까. 좋다, 나는 시인이 이 두 연을 써 놓고 왜 미소를 짓는지 알고 따라 웃을 수 있는 염화시중이 아니다. 그러나 독자는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뜻과 달리 시를 자기 마음이 가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오해할 권리가 있다. 그리하여 당신한테 묻는 바, 빈틈없이 광활하게 펼져진 모래 사막에, 모래 알갱이보다 더 많은 “모래와 모래 사이”가 뭘 말하는가? 여러가지 답이 있을 것이고 모든 답이 타당하다. “지금 여기가 맨 앞인 이유”라는 제목으로 해설을 쓴 평론가 신형철은, “’사막에 모래보다 더 많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모래와 모래 사이다’라는 것은 이 시가 생산해낸 시적 인식”이라며 “시적 인식은 과학적 인식과 일치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아울러 “도대체가 사막에서는 ‘모래와 모래 사이’라는 표현이 성립될 수 없다.”라고 단언한다.

  아하, 시적 인식이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모래와 모래 사이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그런데 말이지, 이문재가 시를 쓰면서 저 드넓은 사막의 무한대 성 모래알이 그렇게 밀집되었으면서도 서로 어깨를 부딪는 가운데 모래와 모래 사이에는 반드시 유격, 이격, 공간, 거리가 있다, 그리하여 이 모래와 저 모래가 하나가 아니어서 사막에, 사람과 사람이 서로 달리 흙 위에서 그러는 것처럼 살 수 있다고, 오래 전부터, 애초부터 그래왔던 거라고 말한 것이라면?

  신형철의 해설은 이쯤에서 그만 읽었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다시 훑어보니까, 모래와 모래 사이, 할 때, “사이”를 ‘관계’로 해석할 수 있고, 그래서 “’모래보다 / 모래와 모래 사이가 더 많다’라는 말도 개별 개체 그 자체보다는 개체 간 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고 썼다. 흠. 이런 해석이라면 내가 시를 읽고 느낀 것과 그리 틀리지 않군.


  이왕 평론가의 해설을 인용한 바에 하나만 더 해보자. 신형철은 “아포리즘은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대중성의 표지처럼 간주된다. (중략)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포리즘보다는 중언부언과 지리멸렬이 언제나 더 견디기 힘들다”고 단언했다. 이후 아포리즘에 관해서는 시인의 시를 인용해가며 충분하게 설명을 하지만 중언부언과 지리멸렬은 이것으로 끝이다. 이문재를 읽으며 감히 “지리멸렬”은 생각할 수 없다고 쳐도, 중언부언이라면 또 이이가 한 가락한다. 첫번째 시 <사막>에서도 ‘모래’와 ‘사이’를 너무 남발한 느낌이 들지만 이후의 것들 가운데 별 생각 없이 하나 고르면,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고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고독하지만 조금 자유롭게

  그리하여 고독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  ‘자유롭지만 고독하게’는 브람스가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에 붙인 악상기호다.  (전문)




  어떠셔? 도마 위에 통배추 올려놓고 식칼로 난도질하는 난타 공연하는 것처럼 ‘자유’와 ‘고독’이 프레스토 템포로 도돌이표를 돌고 있어서 멀미 날 거 같지 않으신가? 물론 시 자체는 디크레센토로 끝나는 거 같은 여운이 있기는 하다. 이문재의 이 시집에서는 이렇게 단어를 무한 반복하는 시들이 많다. 의도적으로 문장을 “~것이다.”로 끝내는 것도 자주 눈에 띄고. 뭐 시인이 그렇게 쓰겠다는 데야 내가 왈가왈부 할 건 아니지만, 나야말로 시에서 같은 단어나 비슷한 표현이 나오고, 나오고 또 나오고 또다시 나오는 거에 대하여 심한 알레르기 증상이 있어서 읽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시집 《지금 여기가 맨 앞》을 냈을 때 시인의 나이가 55세. 그동안 배고픈 시인의 세월도 다 보내고 경희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회적 책임도 어깨에 짊어질 위치가 되었으나, 여직 시인의 본령은 도시에 있지 않다. 전국 각지의 산골과 바닷가와 냇가 같은 자연 속에, 새롭게 돋는 생명을 보고 경탄하기도 하고, 이젠 다시 경험하지 못하고 오직 추억 속에서만 가능한 여름 천렵을 그리워하기도 하고, 자본주의의 성세와 남북 분단의 현실을 아파하기도 한다. 그래, 세월이 흘렀다. 이문재도 이런 세월을 만난다.

  그의 이런 노래 하나 읽어보고 참혹한 독후감을 끝내기로 한다.




  천둥



  마른 번개가 쳤다.

  12시 방향이었다.


  너는 너의 인생을 읽어보았느냐.

  몇 번이나 소리 내어 읽어보았느냐.  (전문)




  결국 참지 못하고 한 마디 꽝.  뭐라? “연탄재 발로 차지 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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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3-09-19 08: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왠지 더 반가운 골드문트 님의 리뷰입니다^^

Falstaff 2023-09-19 16:23   좋아요 0 | URL
앗, 그렇습니까! ㅎㅎㅎ 고맙습니다.

햇살과함께 2023-09-19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좋네요!!

Falstaff 2023-09-19 16:24   좋아요 0 | URL
마지막 두 연은, 소리내서 ˝천천히˝ 읽으면 음악적 효과도 나는 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