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와카집 - 142수 정선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시선집
기노 쓰라유키 지음, 최충희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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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세기 한 시절 중앙일보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집인 <만엽집>의 한국인 연구가의 글이 연재된 적이 있었다. 그때 학자가 누구였는지(김영회 씨였던가?) 지금 검색해봤지만, 도서관 PC가 하도 꼬져서 두 번 검색하면 먹통이 되는 바람에 포기했다. 하여간 도서관에서 《고금와카집》이 눈에 띄자 <만엽집> 생각이 났고, 내 돈 내고 살 생각은 아예 없지만 이런 기회에 한 번 읽어보는 것도 좋은 일이라, 얼른 골라 읽었다. 일본 소설 속에서 와카를 인용하는 걸 여러 번 볼 수 있었다는 것도 책을 선택한 중요한 계기였다.


  모두 스무 권, 142 수의 와카를 실었다. 이 와카들이 나를 실망시키지는 않았다. 5.7.5.7.7 조로 구성된 시가 와카라고 하는데, 와카 한 편 씩 가끔, 마음에 여유를 두고 감상한다면 그리 나쁘지 않을 터이지만 한 방에 읽으려니 심심하기 그지없다. 주로 동아시아 사람들이 지은 시를 보면 자연에 대한 찬미가 유난히 많다. 이것도 예외가 아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에 관한 찬미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작품. 주로 왕가의 사람들더러 오래 살라고, 바람벽에 똥칠할 세월을 넘어 천년, 팔천년을 더 살라는 노래. 이별의 노래, 여행의 노래, 그리고 사랑의 노래들이 실려 있다.

  그러다가 눈에 확 띄는 한 수. 제목 미상이다.


​  “우리 임금님 천년만년 되도록 장수하소서 자갈이 바위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  이 시가 제7 권, “축하 노래”의 1번으로 실려 있다. 아, 다들 아시겠지만 와카가 다 이런 식이다. 딱 한 줄의 시. 하여간, 나는 이 시를 읽자마자 즉각적으로 우리나라 국가가 떠올랐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우리나라는 많은 것이 다 없어질 때까지인데 이 사람들은 모래알이 태산이 될 때까지로구나. 그잖여?

  그리하여 혹시 하는 마음으로 검색해봤다. “일본 국가 가사” 네이버 지식백과 왈, 노래의 내용은 “천황의 치세는 천대, 팔천대 계속되기를. 작은 돌이 바위가 되고, 다시 거기에 이끼가 낄 때까지 영원하기를.”이라며, “이 가사는 10세기 초에 편찬된 일본의 고전시가집 『고킨와카슈』에 나오는 작자 미상의 고대 시가에서 가져온 것”이란다. 노래의 제목이 기미가요라는데, 그것까지 뭐 알 필요 있어? 그리고, 우리나라 최고의 검색 엔진이라는 네이버에서 천황이 뭐냐, 천황이. 기미가요君が代의 군君은 그냥 책에서처럼 “임금”이라 하면 될 것을.


​  이 책 《고금와카집》을 읽으면 일본인들이 자연을 보고, 느끼는 감각에 혀가 다 쭉, 나온다. 봄이 두 권, 여름이 한 권, 가을이 두 권, 겨울로 한 권, 해서 스무 권 가운데 여섯 권이 사계절에 관한 노래다. 봄엔 입춘과 꽃들, 여름엔 두견새, 가을은 낙엽이요, 겨울이면 눈이라. 하도 나오고 또 나오고 다시 나와서 눈이 다 지물거린다. 일본 사람들이 달을 묘사하는 단어가 7백가지란다. 반면에 프랑스 사람들이 여성의 생식기를 묘사하는 단어가 7백 개 비슷하단다. 자세한 건 어디 가서 내놓고 좋아한다고 얘기하기 쉽지 않은 의사 출신 일본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가 쓴 소설 <샤토 루즈>를 참고하시라. 그가 직접 한 이야기니까. 인용하고 싶어도 인용 못한다. 아이들 보면 교육상 좋지 못하다고 아내가 바가지 득득 긁어서 내다 버린지 벌써 이십 년 넘었다. 이 《고금와카집》 읽으면 그게 농담이 아니겠구나, 짐작할 수 있다.


​  일본인의 자연 사랑이 아무리 지극하다 하지만 역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재미난 건 사랑이다.

  이 책은 905년에 다이고 일왕의 명령에 의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러면 <겐지 이야기>하고 1세기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 당시 사회 발전 속도를 지금 사회로 치면 1세기라야 기껏해봤자 7개월에서 9개월 안짝일 터. 당시엔 귀족이나 왕족 여인들은 남자들 눈에 띄지 않을 구중궁궐 속에서만 있어야 했다. <겐지 이야기>에서 귀에 말뚝이 박히도록 들어서 알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젊은 여성을 우연히 한 번 보는 게 얼마나 근사한 경험이었겠는가. 그리하여 11권 “사랑노래 1”에서 마지막으로 실린 기노 쓰라유키라는 작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  “산벚나무 꽃구름 사이로 살짝 본 것과 같이 그대를 살짝 보곤 그리워 못 참겠소”


​  내가 이걸 노래했다면, “못 참겠소” 대신 “못 살겠소” 해버리겠네. 훨씬 더 목을 메잖여? 그런데 다음 노래는 어디선가 많이 들은 느낌이 나지 않나? 12권 “사랑노래 2”에서 첫 번째로 실린 노래다.


​  “그리워하다 잠이 들어 버려서 임이 보였나 꿈인 줄 알았다면 깨지 않았을 것을”


​  좋다, 좋아. 이제 짤막하지만 솔직한 감상.

  《고금와카집》을 읽으려면 《고금소총》을 읽겠다. 고려가요집이든지.

  뭐라? 다 읽고 지랄이라고? 할 말 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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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6-24 08: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샤토 루즈가 땡기네요.

Falstaff 2023-06-25 06:40   좋아요 0 | URL
도서관엔 있더라고요! 일본식 야한 이야기가 줄창 쏟아지는 명작입니다. 명작?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