켑투케 중단편집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갈리나 켑투케 지음, 김민수 외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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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갈리나 켑투케는 놀랍게도 퉁구스족이다. 혹시 김혜린이 쓰고 그린 <불의 검> 보셨나? 나는 <불의 검>의 배경이 선사시대의 북만주 지역, 한반도 이전 시절이라고 생각했었고, 그러면 이들은 각기 몽고족, 만주족, (우리나라)한韓족으로 나뉘기 이전의 퉁구스족 아닐까 싶었던 적이 있었다. 이들의 조상은 우리 조상과 함께 저 알타이 부근에서 동쪽으로 뻗어 나와 훈족, 말갈(청나라 세운 만주)족, 거란족, 고려족으로 갈라졌고, 서쪽으로 뻗어 지금의 튀르키예에 자리 잡았으니, 이들은 같은 우랄 알타이어족에 속해서 어순이 비슷해 서로 말을 쉽게 배운단다. 켑투케는 한국 독자에게 전하는 서문에서 자신이 퉁구스족, 즉 예벤크(예벤키)족으로 소개하면서 저 먼 고대에 한국인 조상들과 역사 과정이 교차한 적이 있음을 강조한다. 서문을 통해 몽고족의 조상이 거란족이라고 한다. 다른 거 같은데. 송나라가 망할 때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짓쳐 내려왔고, 이어서 여진족의 금나라가 송과 힘을 합해 요나라를 멸했으며, 최종적으로 몽고족이 금과 송을 멸하고 원나라를 세운 것으로 아는데 말씀이지. 하여튼 그가 퉁구스족, 이 책에선 예벤크족, 이라고 하는 거만 가지고도 참 친근한 느낌이 든다. 아마 여러 다큐멘터리를 통해 이 부족들의 삶을 관심있게 보아서 그랬던 모양이다.

  주로 TV 다큐멘터리로 본 예벤크족, 그 넓고 광활하고, 삭막한 눈 덮인 툰드라 지대에서 순록떼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유목생활을 하는 원주민들의 순박한 삶의 모습. 나는 지평선이 보이는 황야지대가 나오면 그만 오금이 풀리고 만다. 그래서 내 평생 로망은 유럽의 고딕 종교건물과 조각품, 회화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사막과 평야와 너른 허허벌판 속 화다다닥 쏟아질 것 같은 별들 아래 하루 밤을 지새우는 거다. 별 아래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멍때리는 것만 가지고. 그러니 동시베리아 툰트라 출신 작가가 있어서 이제 그이의 책 번역본이 나왔다는 데, 이 책을 읽어야겠어, 말아야겠어?


​  꼭 눈을 감지 않아도 좋다. 머리 속에서 정말로 내 평생의 로망, 저 툰드라 또는 시베리아 타이가 지역에서 쏟아지는 별 아래, 그냥 멍하게 누워 있다고 생각해보자. 바람 소리와 흔들리는 나뭇가지 소리 말고는 오직 적요만이 있는 텅 빈 어둠의 공간. 이때 저 멀리 한 샤먼이 있어 11각형의 북을 두드리며 하늘과 땅 속 저승과 땅 위의 모든 영령들을 부르는 높은 음정의 노래 소리가 들려오면, 기분이 어떨까? 이에 맞춰 숲 속에선 늑대나 엘크나 수사슴 같은 밤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우우우 들려오고.

  기분 삼삼하겠지? 그래. 그럴 거다. 어디까지나 생각 속에서의 타이가 숲 속이니까. 정말 로망이 이루어진다고 해도 기껏해야 사나흘 한시적 유희니까 말이지. 세상에 그런 건 없다. 기분 삼삼한 건 없다. 모든 곳에서는 생존을 위해 일 해야 하고, 용감해야 하고, 용감하지 않더라도 일단 무슨 일이든 벌여야 하는 법이며, 척박한 툰드라 또는 타이가 숲 속이면 그게 더욱 고생스러울 수밖에 없다.

  예벤크족도 인간종이니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 모두를 가지고 있을 터. 다만 오랜 세월, 현대문물이라고 부르는 자본주의의 손톱에 할퀴어본 적이 없어서, 그리고 하도 생활 환경이 독해서 특별한 악연이 없는 한 서로 약하고 죽어가는 이들을 아무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도와주고 명을 이어주며 살아온, 투박하지만 정 깊은 사람들이었다. 마치 저 베링 해협 근방의 이누이트족처럼. 이상하지. 살기 힘들수록 자기 것을 더 챙기고 보관하려 할 텐데 그게 아니거든. 저 함경북도 산골에서 한 번 눈이 오면 눈이 녹을 때까지 집에서 옴짝달싹 못하는 곳, 그곳에 어쩌다 손님이 오면, 그게 어떤 사람이던지 따지지 않고 봄이 와 눈이 녹을 때까지 집주인과 똑같이 먹여주고 재워주었다잖은가. 하물며 한참 더 높은 위도에 사는 예벤크족이라면 말해 무엇하나.


​  그러나 예벤크 사람들의 뜻과 상관없이 세월은 흐르고 역사도 같이 흘러 이제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으로 편입이 되고, 하루는 백군, 하루는 적군 치하 시절도 거치고, 스탈린의 소수민족 해체작업도 겪었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백인 또는 슬라브인에 의한 인종차별도 당했는데, 예벤키 입장에서 이것들 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어느새 예벤크족 지역인 타이가에도 작으나마 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작가 갈리나 켑투케는 아마도 타이가 숲속 숨(예벤키의 유목민 천막)에서 태어난 거의 마지막 세대쯤 될지도 모른다. 동시에 이들은 타이가 숲에서 나와 작은 마을에 있는 학교를 다녔던 최초의 세대일 수도 있다. 많은 남자 아이들은 학교를 4학년 또는 7학년이나 10학년까지 마치고 다시 타이가 숲으로 돌아가 사냥꾼이 되었고, 많은 여자 아이들은 절대로 타이가로 돌아가지 않을 생각으로 더 공부를 했으나 대학을 졸업해도 직업을 구할 수도 없고, 또래의 남자들도 없어서, 대학졸업 출신의 청소부가 되거나, 러시아 백인이나 금을 캐러 온 다른 민족 남자들과 결혼을 하거나 그들의 사생아를 출산했다. 그러면서 아직 한참 젊은 나이부터 알코올 의존증에 시달리며 한 세상을 막 살기도 했다. 지금도 그럴지 모른다.

  간혹 갈리나 켑투케 같은 여성도 있어서 레닌그라드, 지금의 페테르부르크까지 유학을 해 그곳에서 러시아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민속학자 또는 문인이 되어 자신의 고향인 시베리아 타이가 마을에 찾아와 예벤크족에서 내려오는 옛 이야기를 채집하기도 했겠지.

  이 책은 작가가 어린 시절에 겪고 들었던 이야기에 픽션을 보탠 297쪽짜리 중편 <제 이름을 가진 젤툴라강>과, 민속학 박사가 된 ‘나’가 예전에 샤먼이었고 누구보다 예벤크족의 언어와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던 체릭테 할아버지를 찾아가 채록한 옛 이야기를 쓴 단편 <체릭테 할아버지의 이야기>, 그리고 일곱 편의 짧은 이야기를 담은 《순록 없는 순록 올가미》로 되어 있다. 본문만 451페이지.

  <제 이름을 가진 젤툴라강>은 재미있는 작품이다. 어린 시절, 열살 전후에 자신의 눈으로 보고, 이야기를 엿듣거나 직접 화자로부터 들은 내용으로, 192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예벤크족의 살림과 전통이 이어나가는 모습을 그리면서, 어떻게 보면 라틴아메리카의 붐문학처럼 환상소설적 묘사도 있지만 그것과 차별을 두는 타이가 문화 속 샤머니즘까지, 물론 열 살 꼬마 아가씨가 보고 들은 것이니까 그렇겠지만, 지난 시절의 곤궁함을 따뜻하게 그려냈다.

  다른 두 편은 기록이랄 수도 있고, 르포 성격도 조금 있는데, 그렇다고 별로라는 말은 아니다. 일단 새로운 내용이라 저 북동쪽 오지 사람들의 삶을 알아가는 흥미도 있으며, 세상 누구들의 삶도 다 그렇겠지만 그들 특유의 삶의 희로애락이 난마처럼 섞인 모습이 장면에 따라 짠하기도 하고, 이 선을 넘어 애처롭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고 그렇다.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는 착한 책이다. 골치 아픈 먹물들의 이야기만 읽다가 이 중단편집을 읽으니 버터를 잔뜩 올린 두툼한 쿠키를 목이 메게 먹은 다음에 나박김치 국물을 한 사발 들이켠 느낌이다. 진짜다.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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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6-15 09: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캄캄한 밤 쏟아지는 별 속에 누워있던 적이 있습니다. 강원도 어디였어요. 정말 어둠과 별 저만 있던 그런 순간이었는데 시베리아 툰드라에서 이런 경험을 한다면! 우와 대단할 거 같아요.
마지막 문장에 역시! ㅋㅋㅋㅋㅋ
진짜 동치미, 나박김치국물은 최고죠!

Falstaff 2023-06-15 14:11   좋아요 0 | URL
요즘에 안 가는데요, 산에서 혼자 텐트 치면 별이 쏟아지지요. ㅎㅎㅎ
아, 툰드라, 고비 사막, 실크 로드. 인생의 로망입니다. 흑흑...
집에 가서 국수 삶아 동치미 국물에 말아 먹어야겠습니다. ^^

persona 2023-06-15 10: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좋은 작가와 책 알고 가요. 일찍 돌아가셨다니 좀 속상하네요. ㅠㅠ
리뷰 잘 읽었어요. 감사드립니다.

Falstaff 2023-06-15 14:12   좋아요 1 | URL
이 책이 그리 재미있지는 않습니다. 마치 고골의 <디칸카 교외 마을의 야회>하고 비슷한 면도 있고요. 도서관 이용하시면 딱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