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를 보세요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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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태까지 보니것은 꽤 읽은 줄 알았다. 근데 오늘 세 보니까 겨우 네 권이고 지금 읽기를 마친 《카메라를 보세요》가 다섯 번째 보니것이었다. 가끔 이런 작가들이 있다. 나름대로는 많이 읽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별로 그렇지 않은 사람들. 또 누가 있나? 토머스 핀천?

  보니것, 이 양반은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작품 속에 경계가 없는, 상상력의 무한 공간에서 살다 간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겁나게 재미나기도 한다. 총 한 번 못 쏴 보고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드레스덴 폭격 속에서 갑자기 트랄팔마도어 행성으로 유괴되어 동물원에서 구경거리가 되기도 하는 미군병사의 이름은 ‘필그림’. 어디서 많이 듣던 명사noun이기도 하다. Pilgrim Fathers? 섭씨 45도만 되면 물을 얼려버릴 수 있는 놀라운 촉매물질 아이스 나인을 개발해 인류 스스로 멸망의 길로 빠지게 만드는 <고양이 요람> 등등 주로 이이의 작품은 시니컬한 니힐리즘이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그가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벌지 전투를 앞둔 상태에서 독일군에 포로로 잡혀 드레스덴의 불꽃놀이를 경험한 내상이 하도 깊어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고 짐작하기도 했다. 어차피 작가의 내상이란 창작의 재료로 꺼지지 않는 불이 되기도 하는 것이니.


​  그런데 《카메라를 보세요》는 달랐다. 모두 열넷의 단편소설을 실은 390페이지짜리 작품집 속엔, 그동안 시니컬하게 니힐한 작품이 거의 없다. 대신 유머를 신랄하게 퍼붓고는 있지만 인간에 대한 믿음을 깔고 그 위에서 온갖 위트를 선보이는 작품들이 많다. 그래서 단편소설이라기보다 콩트로 읽히는 것들도 제법 있다. 콩트로 읽힌다고? 그렇다. 이렇게 말해도 좋겠다. “경쾌한 문장으로 독자가 거침없이 읽을 수 있게 하면서 마지막 만찬으로 준비한 반전反轉의 글쓰기”. 모든 작품이 다 재미있다. 그리고 더없이 미국적이다. 즉, 끝이 나쁜 경우는 없다. 어쨌거나 다 좋게 끝난다.

  예를 들어 워낙 성질이 더럽고 사나운 개 (성격도 참, 개 이름을 ‘사탄’이라고 지을 건 뭐니?)를 키우고 있어서 동네의 모든 사람이 접근하기 싫어하는 얼의 집에, 자전거를 타고 와서 송곳니를 드러내고 맹렬하게 덤비면서 짓는 사탄을 싹 무시해가며 신문배달을 하는 열 살짜리 꼬마 마크에게, 성질 나쁜 얼이 “너네 아빠는 어린 시절부터 겁쟁이 찌질이였다. 내 가방 들고다니던 ‘가방모찌’였지. 나만 보면 도망가고, 울고, 싹싹 빌고 그랬다니까. 하느님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착한 마크는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자전거를 타고 떠났고,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늙은 보안관 찰리가 순찰차를 타고 쫓아가 마크를 불러 세웠더니, 마크는 그게 정말이었느냐고 찰리에게 물어 보안관을 곤란하게 만든다. 사실을 말해줄까,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서 용기를 돋워줄까?

  찰리는 말한다. “모두 사실이야. 너희 아버지는 하느님이 두려운 마음을 갖게 하고 태어났지.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푸른 눈과 갈색 머리카락처럼. 너하고 나는 그런 공포를 갖고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모른단다. 그걸 감당하며 사는 사람들은 엄청 용감한 사람이지. 그러니 네 아버지가 규칙을 어기지 않느라고 네가 아파서 배달을 하지 못했을 때, 다시 얼을 만날지도 모르고 사탄이 덤벼들 걸 뻔히 알면서도 너 대신 배달을 했다는 게 얼마나 용감한 일이었는지 생각해보렴.”

  세상에. <제5 도살장>과 <고양이 요람> 그리고 <갈라파고스>를 쓴 작가가 이런 이야기도 지었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다.


​  더 재미있는 것도 있다. 트랄팔마도어 행성의 동물원에 인간이 갇히기도 하더니, 이번에 또 외계인이 지구에 도착했다. 7월의 덥고 건조한 날, 선량한 로웰이 버스를 기다리다 어디선가 편지 가르는 칼, 페이퍼 나이프가 발 앞에 떨어져 집에 가져왔다. 손잡이 부분에 (인조겠지만 혹시 알아? 진짤지?) 보석이 박힌 나이프가 어디서 날아왔는지 몰라 돌려줄 수 없었으니 상관없었겠지. 집에 와서 무심하게 소파 위에 던져 놓았는데, 글쎄 손잡이에 달린 보석이 사라져 버린 거였다. 찾아보니 그냥 있던 자리에서 떨어진 거였고, 근데 아주 작은 사이즈의 벌레가 꼬물거려, 휴지에 싸서 버릴려고 하다가 뭔가 이상해서 돋보기로 들여다보니까, 5 밀리미터 크기 사람 형태의 외계인이었던 거다. 외계인 하면 뭔가 좀 크고, 선량하거나 악당이거나, 물 또는 사람의 고기 즉 식량을 위해, 그것도 아니면 지구 별을 조사하려 오는 것이 보통인데 이들은 작고 선량하고 용감한 외계인이었던 것. 로웰은 이들한테 빵과 통조림과 물과 맥주 같은 걸 아주 작게 잘라 주면서 먹으라고 대접도 하고 나름대로 즐겁게 보내긴 했지만, 동거하던 마들렌이 집에 와서 자신이 다니는 부동산 회사 사장이 청혼했으며 기꺼이 결혼하겠다고 선언하자, 작은 신사들의 행동이 조금 달라지는 데, 어떻게 달라지는 지는 당연히 안 알려줌.

  이것보다 더 재미난 아이디어도 있다. 러시아, 아니 20세기 소비에트 연방에서 지층에 구멍을 내 지구 역사를 탐구하는 프로젝트에 요세프와 페테르 형제가 동행한다. 이들은 주로 개미의 화석을 연구하는 과학자. 중생대 이전, 그러니까 공룡이 지구를 점령하기 전에 살던 2.5 센티미터 크기의 개미 화석을 발견하는데 성공한다. 놀랍게도 현대 개미 중에서 병정개미들이 가지고 있는 가위 턱이 없는 종을 발견했다. 아, 아주 오래 전엔 개미한테 가위 턱이 없었구나. 이런 결론에 도달한다. 근데 더욱 놀랍게도 이들은 서너 마리 단위로 모여 살았고, 끔찍하게 놀랍게도 분명하게 책book일 수밖에 없는 물건과 함께 묻혀 있었다. 이들을 발견한 바로 위 지층에서야 비로소 가위 턱을 가진 병정개미가 보이고 책 대신 그림이 나타났으며 수십, 수백 마리 단위로 생활하고 있었다. 또 이들 위의 지층, 그러니까 가장 최근의 지층엔 전부 날카로운 가위 턱을 지닌 병정개미들만을 볼 수 있어서 보통 개미들은 멸종했다고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무대가 소비에트라는 것. 아주 오래 전에 어쩌면 사람을 능가했을 지도 모르는 개미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 이 두 가지가 어떻게 해소될까?

  글쎄 재미난 책이니 읽어보시면 안다니까.

  커트 보니것은 천재, 아니면 천재하고 굉장히 비슷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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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3-06-01 06: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올려주신 세 이야기가 다 정말 재미있고 따뜻하네요. 게다가 서비스로 반전까지~~

한 작가 작품 네 권이면 저에겐 진짜 많이 읽은 건데 역시 클라스가 넘사벽이세요.😅

Falstaff 2023-06-01 07:39   좋아요 1 | URL
보니것은 아주 묘하게 매력이 있잖습니까. ㅎㅎㅎ
한 번 읽어보셔요. 재미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