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봄 작가, 겨울 무대 희곡집
구지수 외 지음 / 지만지드라마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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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작가, 겨울 무대>는 신춘문예를 통해 역량을 인정받은 신진 작가들에게 신작 장막 희곡 집필과 무대화 과정을 통해 희곡을 완성할 기회를 제공하는 아르코∙대학로예술극장의 작가 지원 프로젝트입니다.”


​  아르코와 대학로예술극장은 머리말에서 “작가와 희곡이 더 빛나도록”이라는 제목으로 <봄 작가, 겨울 무대> 시리즈(프로젝트)의 기획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요즘은 모르겠고, 전에는 일부 문예지의 등단은 별개로 하고, 많은 작가들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을 했는데, 등단 이후 숱한 작가들이 1월 2일자 잉크 냄새가 가시지도 않은 신문에 실린 자신의 데뷔작이 곧 은퇴 기념 작품이 될 정도로 이후에 글을 쓰던지 말던지, 쓰면 그걸 발표할 장을 마련하든지 말든지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꽤 오래 전부터 신춘문예에 당선한 중단편 소설과 시 등을 단행본으로 출간하고 있는 걸로 안다. <봄 작가, 겨울 무대>는 여기서 한 번 더 진화하여,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한 신예 극작가에게, 당선한 작품이 아니라 새로 장막 희곡을 쓰게 하고, 그것을 그저 발표하는 장을 마련해주는 것을 뛰어넘어, 등단 당시엔 책상 위에서 극작가 홀로 무대를 상상하며 작품을 썼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무대에서 공연을 하며, 비록 낭독극이기는 하더라도, 자신의 희곡이 드라마투르그(또는 드라마터지)의 손을 통과한 새로운 대본으로 바뀌고, 다시 연출가의 해석과 배우의 표현이라는 필터를 어떻게 거쳐 실제 극이 되고, 이 극이 관객과 소통하는 광장으로 나오는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그리하여 신출나기 극작가들이 이 모든 과정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작품을 각 단계별로 수시로, 현장에서 수정하며 진정한 극작의 경험을 갖게 하는 뜻 깊은 행사였을 것이다.

  이런 행사를 아마도 처음 갖은 극작가 신영은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모든 이들과 / 무대를 채워 준 함께해 준 모든 이들과 / 이 ‘기억’을 함께 나눠 줄 여러분, 너무 감사해요. / 언제나 건강하세요.” (p.79)

  신영은은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고 얼마나 고마웠을까? (이것도 뭐 사람 사는 일이라서 다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래도 이 정도면 횡재한 거 맞다.)


​  특히 극단에서 이 비슷한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서울 연극제” 같은 건 빼더라도, 매년 시행하는 “희곡 우체통” 시리즈도 신인 극작가 뿐만 아니라 뜻이 있는 모든 극작가들의 작품을 받아, 이 가운데 좋은 작품을 선정해 직접 무대에 올려주고, 공연이 끝난 후에 희곡작품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나도 몇 년 동안 재미있게 읽은 적 있다. 아무래도 우리나라 문학의 출간을 보면 이런 행사에도 불구하고 시나 소설에 비해 희곡이 상당히 적다. 이것이 역설적으로 나로 하여금 희곡집에 관심을 두게 한 요인이기도 하다. 나라도 자주 읽어 인류가 만든 가장 오래된 예술장르의 하나인 희곡의 저변을 조금이라도 넓힐 수 있으면 그것도 좋은 일이라서.

  이 책에 작품을 수록한 극작가의 이름을 나열해보자.

  구지수, 신영은, 황수아, 김마딘, 조은주, 김미리, 이예찬, 이도경, 김정수.

  작품은 위의 작가 순으로, 과자집에 살아요, 달콤한 기억, 마지막 포에티카, 사라의 행성,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역할 없는 사람들, 유나바머와 거인, 친절한 식구들, 붉은 가을, 이렇게 아홉이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을 나열한 것은 오늘의 독후감에 아홉 작품을 전부 소개할 수 없어, 빠진 것이 생긴다면 혹시나 서운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희곡은 읽기만 죽어라 읽었지, 제법 많이 읽은 거 같은데 내가 보기에도 읽은 만큼 작품을 해석할 내공이 생기지 않는 장르인 거 같다. 그리하여 희곡을 읽고 쓰는 독후감은 시집을 읽고 쓰는 것만큼 난감할 때가 있다. 이 독후감도 마찬가지이니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아무쪼록 이해를 바랄 뿐이다.


​  대부분의 극작가가 20대와 30대 정도로 보였다. 내가 무슨 <친절한 식구들>에서 나오는 엄마처럼 샤먼이라서 척 보면 아는 건 아니고, 작가들이 세상을 보는 방향과 자신들의 망막에 잡힌 상을 해석하는 것이 40대 아래로 보여서 그리 짐작할 뿐이다. 젊은 세대 답게 이들의 관심은 다양한 방면을 향하고 있었으며 특히 두 작품, <과자집에 살아요>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에서 요즘에 관심을 받고 있는 보호종료아동이 비극의 당사자로 등장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보호종료아동은 아동보호소 등의 아동양육시설에서 자라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했고(and) 만 18세가 넘어 정부로부터 현금 5백만원의 정착금을 받아 퇴소한 청년을 일컫는 말이다. 사회에 나오기는 했지만 사회적 학습이 전혀 되지 않은 상태라서 실제로 많은 이들이 속임에 넘어가거나, 피해를 예방하는 방법을 알지 못해 미리 조치를 취하지 않거나 못해 피해를 입거나, 심지어 돈을 관리해본 적이 없어 전 재산 5백만원이 흐지부지 없어지거나 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단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불리한 일을 당해도 물어볼 사람도, 어디가서 고민을 상담해야 하는 지도 모르는 경우도 숱해 좌절하는 경우가 많다고 들은 적 있다. 그럼에도 아홉 명의 작가 중에서 두 명이 이 경우를 작품에 풀어서 사용했으면 대단한 관심이라고 할 수밖에.

  그래도 가장 많은 주제는 의사불통과 객체화, 소외, 삶의 곤고함, 풍요 속의 지독한 가난 등이다. 이런 주제를 다루니 당연히 거의 모든 작품이 대단히 우울할 수밖에 없다. 요즘 우리나라 문학을 뒤덮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지독한 우울의 먹구름은 얼마나 두터운지 질식할 지경이다. 아홉 작품을 읽으면서 한 번도 피식, 겨우 피식, 하고 헛웃음을 날리지도 못했다.

  과자로 지어진 집에 사는 건 거지꼴을 하고 부모한테 버려진 남매와 보호종료아동 출신으로 ‘아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스물한 살 먹은 법적 성인 여성이고, 어려서는 귀한 조미료였던 백설탕을 할머니와 함께 숟가락으로 몰래 퍼먹은 기억이 있는 비정규직 사내는 설탕을 쏟아붓는 사일로(인 듯한) 기계 안에서 질식해 숨져가며, 숱한 사람들이 가산을 팔아 유토피아라고 알려진 삶 저 너머의 장소 포에티카로 가는 열차에 탑승하려 하고, 결국 너와 나는 애초 다른 행성의 인류였다는 것을 지나, 길고양이에게 극약을 먹인 후 쇠꼬챙이로 눈알을 관통시키기도 하고, 이별 후에 다시 좋은 관계를 맺기는 하지만 대신 다른 커플이 갈라져야 하며, 폭탄을 제작해 거인을 제거하려는 미친 천재에, 아버지 최후의 유산을 찾으려 매장 1년밖에 안 된 묘지를 파헤쳐 관을 열고 시신을 뒤지기도 하고, 풍비박산이 난 집으로 다시 돌아간 남매 앞에서 부모는 처참하게 자살해 있는 이야기. 이것 참.


​  기억에 남는 것을 다 쓸 수는 없다. 작품이 좋아서라기보다 인상적인 장면이 <유나바머와 거인>의 마지막 장면, 유나바머가 죽은 후, 지금부터 몇 십 년 후, 그의 뇌를 스캔해 저장해둔 상태. 인류는 시시때때로 이미 죽은 시신과 별개로 스캔한 천재 유나바머의 뇌를 호출하고, 여기에 이미 떠둔 그의 영상, 즉 홀로그램에 입혀 그를 호출한다. 그러나 유나바머의 뇌가 스스로 창조, 개선, 진화할 수 있는 AI가 아니라서 그는 호출한 사람이 세팅한 시점부터 다시 이것이 처음인 양 똑 같은 행위를 계속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인류가 전기를 만들어내는 한 영원히 컴퓨터와 모니터를 감옥 삼아 지내는 형벌을 받는 셈이다. 아오, 며칠 전에 읽은 김희선의 작품 <달을 멈추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뇌를, 슬라이스를 하던 하지 않던, 스캔해서 컴퓨터 메모리 칩에 저장한다는 것이 김희선 혼자만의 아이디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젊은 작가들 특유의 감각은 알겠는데 암만해도 너무 우울하다. 한 두 편이면 모르겠다. 이 책을 읽는 사흘 동안 하필이면 봄비가 내려 가뜩이나 푹 가라앉은 마음에 큼지막한 돌 하나를 올려놓은 군내나는 동치미 무가 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작가들이여, 당신들 때문이 아니었다. 전적으로 내가 군내나는 무여서 그랬을 뿐이니. 앞으로 꽃 길만 밟고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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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5-23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군무 골드문트 ㅋㅋㅋㅋ

Falstaff 2023-05-23 16:02   좋아요 1 | URL
ㅋㅋㅋ 나름대로 어울리지 않습니까!

2023-05-23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3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5-23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