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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벽 안에서 - 페라라의 다섯 이야기 ㅣ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조르조 바사니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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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라라의 다섯 이야기”라는 부제목을 가진 조르조 바사니 선집 1권이다. 조르조 바사니라면, <금테 안경>, 조르조 바사니 선집 2권으로 나온 짧은 장편소설이 워낙 유명해, 나도 당연히 <금테 안경>을 읽고 바사니의 글에 반했었다. 그게 바사니를 기억하게 된 내력이다. 그의 선집을 다 읽어야지, 했다가, 어떻게 까맣게 잊고 세월이 벌써 6년이 넘는다. 시간은 정말 쏜 살이다.
바사니는 1916년 이탈리아의 볼로냐에서 유대인 부르주아 가정의 맏이로 태어나, 유년기부터 1943년까지 27년 동안 페라라시의 치스테르나델폴로 거리의 저택에서 산다. 이곳에서 왕립 고등학교도 다니고 볼로냐에 있는 대학에 입학해 기차 통학을 하며 음악, 미술, 문학 등 부르주아 유대인에게 어울리는 다양한 문화적 탐험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1939년에 이탈리아 검은 셔츠당이 악명 높은 인종법을 통과시켜 바사니는 고난을 겪기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적극적인 반 파시즘 운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읽은 책 《성벽 안에서》의 작품 <클렐리아 트로티의 말년>에 나오는 주인공 부르노는 작가와 마찬가지로 페라라의 유대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고, <마치니 거리의 추모 명판>의 주인공 루제로 요즈처럼 치스테르나델폴로의 저택에 살다가, 부헨발트 같은 곳은 아니지만 이탈리아 파시스트들에게 검거되어 짧게 감방생활을 하고 돌아오니 반파시즘 활동을 하는 파르티잔이 자기가 살던 저택을 점령하고 있는 것 등, 자신의 경험을 반영하는 씬이 많이 들어 있다. 책 속의 몇몇 작품에서, 주인공의 부모는 아들을 적절한 시간에 여권을 받게 해 출국/도피시키려고 하는 반면, 당사자인 늙은 부모는 이 나이에 어디를 방황하라는 얘기니, 라고 페라라에 머물다가 파시스트들에게 체포당해 부헨발트 같은 곳으로 끌려가 가스실의 재로 사라졌다고 한다. 이것도 사실인지 궁금해서 위키피디아나 상세한 연표를 훑어보았는데 결국 알아내지 못했다.
나는 제일 앞에 실린 첫 작품 <리다 만토바니>를 제일 재미있게 읽었다. 놀랍게도 유대인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유대인일 수도 있는 등장인물이 한 명 나오기는 하지만 그가 유대인이건 유대인이 아니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한 명의 선한 남자다. 끈질기기는 황소 힘줄 같은.
리다 만토바니가 출산하는 것이 첫 장면이다. 어려서 죽은 리다의 오빠 이레네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보니 로마 가톨릭을 믿는다. 근데 리다는? 리다의 엄마 마리아 만토바니 역시 20년 전 마사피스칼리아의 공장 직공에게 홀딱 빠져 리다를 낳는다. 이후 불과 이삼 킬로미터 떨어진 들판에 있던 고향집을 영원히 떠나야 했으며, 이후 지금의 이곳에서 나머지 생을 살고 있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딸 리다는 유대인이기는 하지만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부자 가문 가운데 하나인 카마이올리의 아들 다비드가 대학 진학을 앞두고, 아직 채 끝나지 않은 사춘기적 방황의 일환인 것이 분명한데, 스스로 노동자로 살겠다는 치기어린 각오를 한 후, 격에 어울리지 않는, ‘격’의 격차조차 염두에 두지도 못할 하급 시민 중에서도 하급 시민의 딸 리다와 나름대로는 열애에 빠져, 짧은 시간 동안 방을 얻어 같이 살다가, 당연히 임신으로 했는데, 출산일이 다가오니, 사생아의 아버지가 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사춘기 시절을 빠져나가는 한 무책임한 유대인 청년이, 세상을 보는 눈이 번쩍 뜨임으로 해서 그저 주머니 속에 든 몇 백 리라를 건네고는, 허약하지만 결코 일찍 죽을 팔자는 아닌 자기 아들의 얼굴도 한 번 보지 않고 결별을 고한다.
사생아 아들을 낳은 사생아 여인은 뭐 그럴 수도 있지, 별로 고민하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자연스럽게 엄마 마리아의 집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렇게 할머니 마리아, 엄마 리다, 아기 이메네오, 세 식구가 사는 집. 이들에게도 이웃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이웃은 리다보다 한 서른 살 정도 많은 오레스테 베네티 씨. 살린궤라 거리에 자리한, 인쇄소까지는 아니고, 책 제본소의 사장이다. 매사 신중하고 생각이 깊으며 선한 성격까지 가지고 있으니 거 참, 부처님 가운데 토막이라고 할 밖에. 그런데 여자들도 눈이 삐었지, 뭐 잘 생기지는 않았지만 반듯하고 성실한 이 남자가 여태 결혼은커녕 약혼도 한 번 해보지 않은 숫총각, 아니, 아니, 설마 이미 멸종한지 오래라고 하는 숫총각이기야 하겠어, 하여간 노총각이란다. 마리아 만토바니는 한 눈에 척, 알아본다. 베네티는 틀림없이 리다 때문에 오는 거야. 참 생각도 깊지, (폐를 끼칠까봐) 어떻게 저녁식사가 딱 끝났을 때를 골라, 들러서 두 시간 정도 이런저런 세상 사는 이야기도 하고, 1907년의 겨울이 가장 추웠는데 포 강이 꽝꽝 얼어붙었었다는 얘기도 하고, 그러다가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한 마디 툭 던지면서, 리다, 나하고 결혼할래?
마리아는 이 말이 나올지 알고 있었지만, 정말로 나이 많은 베네티 씨의 입에서 결혼하자는 소리가 자신이 아니라 리다를 향해 나오니까 조금 어이도 없고 기도 막히겠어, 아니겠어? 리다는 아버지 뻘인 베네티 씨가 애초에 자신한테 청혼할 수 있다는 걸 짐작할 수준이 아니어서 그저 어리둥절. 하여간 이렇게 어영부영 청혼은 무시되고, 물론 단칼에, 싫어! 하지는 않았지만 안 하는 걸로 확정된 것과 마찬가지로 끝난다. 그러나 위에서 얘기했다시피 착한 성품의 베네티 씨는 또한 쇠심줄이기도 해서, 이후에도 줄기차게 이 쌍과부 집을 드나드는데, 어느 새 쌍과부 집 식구 가운데 유일한 사내인 이메네오가 중학교를 들어가고, 졸업하고, 베네티 씨가 흔쾌하게 이메네오를 자신의 도제로 삼아줄 때 쯤해서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마리아가 폐렴으로 숨이 넘어갈 때, 오레스테 베네티는 마치 자기가 죽은 이의 친 오라비나 되는 것처럼 사제도 불러오고, 동네 여인들도 불러와 경야를 보내게 하기도 하고, 있는 것이 돈 말고는 별로 없으니, 페라라에서 가장 비싼 무덤 자리를 사서 장사지내준 후에 드디어 리다로부터 결혼 승낙을 받아내고 만다. 햐, 내가 리다라도 결혼하고 만다. 좋은 외모는 아니지만 이렇게 성실하고, 돈 많고, 앞으로도 돈을 쌓아놓을 수 있는 제본소도 팽팽 잘 돌아가는 걸로 가지고 있고, 아내 알기를 하늘처럼 아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빨리 죽을 나이라면 말이지.
선한 오레스테 베네티 씨가 유대인이라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돈이 많고, 1935년의 어려운 시절에도 손에서 결혼반지를 빼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을 빌미 삼아, 유대인이랄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근데 이건 작가 바사니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억지로 물 끌어와 내 밭에 대는 일, 아전인수我田引水다. 나머지 작품 속에서는 유대인들이 빠짐없이 등장해 그들이 겪은 고통과 눈치를 묘사하고 있음에야.
유대인 작가들 가운데 내가 조르조 바사니를 특히 좋아하는 이유는, 뭐 무엇보다 문장이 매력적이어서 그렇지만, 유대인 핍박의 궁상맞은 장면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있다. 깔끔하게, 그냥, 울 부모 수용소로 끌려가 거기서 돌아갔다. 이렇게 말 하고 마는 정도다. 반 파시즘 운동을 할 때도 파시즘에 의하여 고통을 받았던 한 부류로만 선을 딱 그어버린다. 사회주의자, 민주주의자, 유대인, 이 정도로. 나는 이걸 어떻게 받아들였느냐 하면,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민주주의자, 소수민족, 유색인들이 파시스트한테 받은 고통과 상처와 같은 수준으로 유대인의 피해의식을 처리했다고 본다. 물론 유대인에게는 조금 더 심했겠지. 그래서 실제로 조르조 바사니가 당시에 반 파시즘 운동에 참여했듯이, 작품 속에서도 유대인 등장인물은 사회주의자나 파르티잔들과 협력을 모색하고 친밀하게 지내며 여러 방향으로 선을 대고 있기도 하다. 요즘 유독 유대인 작가들의 작품을 열라 읽게 되는데, 조르조 바사니 순서가 오니까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그 동안 묵혔던 귓구멍 속 귀지가 다 떨어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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