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푹한
윤해서 지음 / 시간의흐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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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에 윤해서의 《코러스크로노스》를 읽고 쓴 독후감의 한 문장을 따서 2020년에 윤의 장편소설 <0인칭의 자리>에 그대로 옮겨 썼으니 바로 이러했다


​  “내 독서목록에 이 작가를 보탠다는 것이 축복이다.”


​  구라같지? 정말이다. 당시 우리나라 작가들이 쏟아내던 고만고만하고 우중충한 소설들 속에서 윤해서를 발견하고는 번쩍, 이 81년생 부천태생의 작가가 도대체 누구야? 누군데 이렇게 참신한 시각으로 사물과 사람을 조망해 전위적으로 쓸 수 있는 거야? 깜짝 놀랐었다. 그렇다, 번쩍하고 깜짝. 그러나 이런 감격도 잠깐. 두 번째 읽은 윤해서, <0인칭의 자리>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그리하여 이이의 다른 작품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굳이 찾아 읽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코러스크로노스》의 작품들은 스토리도, 시간도, 세계도 사라져버리고 대신 작품 안, 그러니까 문장 속에는 회화와 음악이 틈입하고,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기어이 소나타 형식의 음악을 만들어냈다. 소나타 형식이다. 문학에서 간혹 시도하고 있는 대위법이 아니라. 서사와 시간이 사라진 자리를 대신하는 회화성과 운율이라니, 말 다했지 뭐. 이건 다른 얘기로, 윤해서와 그리 맞지 않는 독자들이 읽으면 경끼하기 딱 좋게 깔맞춤된 소설집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반면에 <0인칭의 자리>에서는 산문과 운문을 상호보완 또는 경계를 파괴하려고 한 것 같은데 아쉽게도 《코러스크로노스》를 읽은 후 갖게 된 기대에 미치지 못했었다. 그리고 2022년. 윤해서가 다시 돌아왔다. 역시 시간과 서사가 마구 엉켜버린 소설 <움푹한>을 가지고.

  제목이 <움푹한>이다. 그러면 “움푹함”이 어떤 함의를 가지고 있을까? 책 속에 비교적 상세한 설명이 나오기는 한다. 물론 독자가 설명 그대로 믿을 필요는 없다. 내가 이해한 움푹함은 일종의 블랙홀이다. 한 방에 확 빨아들여 일단 안에 들어갔다 하면 세상의 모든 것과 단절된 것처럼 감각이 사라지는 현상. 마치 작품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의 아이디어로 만든 도심 속 공원 사일런스 파크 Silence Park의 중심에 지은 완벽한 정적의 건물인 “고요의 집”처럼. 참고로 한 마디 보태자면 “고요의 집”이 장편소설 <움푹한>의 1장 소제목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을 제일 앞에 두고 이후 그것을 설명하다가 마지막에 다시 등장시키면서 작품이 끝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이고, 작품 속에서도 시간대는 순식간에 좌충우돌 변하기 십상이니 독자는 정신 좀 차리고 책을 읽어야 할 듯.

  네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있다. 웬수 같은 언니와 엄마한테 치어 없는 집에서 대학에 가기 위하여 2년간 아르바이트를 했고, 진학 후에도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휴학을 반복했으며, 그것도 모자라 영국 유학의 꿈을 이루기 위해 또다시 일을 했지만 정작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하니 변변한 일자리도 구하지 못했던 조경 전문가 김운. 사실상의 주인공인 주이영과 절친이며 엄마와 언니 대신 1층에 살다가 거북이 한 마리가 담긴 어항을 남겨주고 요양원에 들어간 할머니를 회상하며 가족간 소외를 견뎌가고 있다.

  새벽 다섯 시에 집에서 나와 한강변을 따라 달리기 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주현우는 주이영의 친오빠이며, 이영이보다 나이가 많아 이영이 속이 상할 때면 자주 업어주기도 했던 친구같은 남매이고, 직업은 작곡가다. 윤해서답게 주현우가 작곡하는 음악은 감정을 완전하게 건조시킨 절대음악 쪽이다. 현대 작곡가니까 당연히 들으면 보통의 감상자의 귀에는 소음처럼 들릴 것이라 지레짐작은 하지 마시라. 음악 분수에서 거꾸로, 즉 허공을 향해 물입자를 쏘아 올려 마치 빙산인 것처럼 효과를 낼 때 배경음악으로도 사용하니까 현대음악 치고는 듣기 순한 장르인 것처럼 보인다. 집을 나가 독립해 살다가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이영의 방문에 걸린 작은 칠판에는 하얀 분필로 “곧 돌아오겠음.”이라 쓰여 있지만 이영은 절대로 돌아오지 않는다.

  마태오는 학살이 일어나기 5년 전에 르완다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미국인 부부에게 입양되어 미국인으로 살아간다. 워싱턴에서 사학을 전공하다 경영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주이영과 운명 같은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다. 이들은 르완다로 갈 생각도 있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주이영의 땅인 한국에 와서 동거하기에 이르렀고, 이영이한테 한국어를 배워 이영하고 매우 유사한 언어를 사용한다. 우리나라 사람과 비교하면 큰 키와 딱 벌어진 어깨를 가지고 있지만 미국인과 비교해서는 그렇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작은 키와 작은 몸이 주이영이 마음에 들었지만 그것보다 더 와 닿았던 것은 오빠 현우를 닮은 시선이었다. 물론 현우는 현우대로, 마태오는 마태오대로 그것에 관해서는 이영이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그럼 주이영은? 모른다. 고등학교 동창생인 김운과 함께 졸업 겸, 민물 거북을 바다에 방생하려고 한 겨울에 강릉 바다로 기차를 타고 떠나기도 하고, 워싱턴 공원에서 큰 개 옆에 누워 개의 몸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를 즐기다가 마테오를 만나 사랑을 꽃피우기도 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취직을 하기도 했지만 어느 날 업무 차 상급자와 함께 강릉으로 출장을 갔다가 자신이 운전한 차가 상급자를 태운 채 바다에 빠져 남자 상급자는 익사를 하고 이영이는 행방불명이 되고 만다. 이영은 프리다이빙 자격이 있을 정도로 수영이 능숙해 가족과 친구들은 아직 살아있으리라는 실낱 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작품이 자주 그러하듯, 희망을 가진 사람들은 늘 불행하다.

  문제는 주이영의 실종이다. 세 등장인물은 원래부터 말도 없고, 침잠하고, 늘 생각에 잠겨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참 재수없다, 라고 생각할 정도라고 보이는데, 이젠 정신건강도 매우 심각하게 불량해져 있다. 왜 우리나라의 젊은 작가들은 이 윤해서 언니를 포함해서 작품이 이리도 우울한지, 이것에 관해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 우울해도 정도가 있지, 실종된 주이영을 제외하고 전부 애초 기질이 우울한데다가 절친과 누이와 연인의 갑작스러운 실종 때문에 독자까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다. 하긴 주이영 역시 우울에서 크게 예외는 아니다. 워싱턴의 배터리 캠블 공원에서 이영은 매일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오늘의 움푹함이 필요해.”

  움푹한 곳에서 소리를 지르면 메아리가 돌아올 뿐 소리가 빠져나가지 않듯, 마음이 머물 공간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도 흩어지지 않게.

  주이영은 몇 년 후, 자신의 실종이 나머지 등장인물에게 움푹함, 그것도 심하게 움푹한 움푹함이 되어버린다는 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들의 우울과 상실과 허무가 돌이킬 수 없게 깊어지는 움푹한 구멍. 아, 너무 많이 이야기한 건지 모르겠다.


​  그러나 나는 이 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첫째가 과도한 우울의 습관 때문이다. 아주 우울이 뚝뚝, 철철, 우르릉꽝꽝 떨어진다, 40일 동안 내린 폭우처럼. 둘째가 주이영의 실종 사건이 과하게 작위적이다. 특히 실종 사건, 자동차를 바다에 거꾸로 빠뜨리기 위해서, 반드시 주이영이 강릉 바다에 빠져 실종되어야 하니까 여러 경우를 상정했겠지만, 아쉬워라, 더 오래 고민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이건 내 의견일 뿐, 결정은 작가의 몫이다. 그리하여,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 후하게 점수를 주지 않는 건 독자인 내 마음대로이니, 이것도 이해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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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3-04-25 06: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 느낌 !!!
좋은데요!
뭔가 있을것 같은...
블랙홀, 음푹함..
그렇네요
윤해서 입력합니다!

Falstaff 2023-04-25 08:13   좋아요 1 | URL
넵. 흥미로운 책입니다. 근데 이런 류의 작품을 좋아하셔야 할 텐데요. 완전 독자의 기호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거 같아서 말입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