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예항 / 짐승들의 유희 대산세계문학총서 182
미시마 유키오 지음, 박영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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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대표적인 탐미주의적 작가 미시마 유키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70년대 초반에 집에 있던 <금각사>를 무슨 이야기인지도 모르고 읽어봤고, 쉰 넘어서 <가면의 고백>을 읽었는데 그게 다였다. 무엇 때문에 극우 골통 군국주의자가 쓴 소설을 읽어야 하는지 스스로를 납득시키지 못했던 거다. 미시마 유키오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1960년대 초반, 책의 뒷면에 쓰인 걸 그대로 인용한다면 “작가적 역량이 절정에 오른” 시기에 쓴 작품임에도, 미시마는 적어도 반 세기 정도 발달장애가 있었던 것처럼 여전히 탐미주의적, 예술지상주의적이고 만일 그게 아니라면 청소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차일디시, 좋아 좋아 영어 말고 예스럽게 얘기하자면, 구상유취한 정서를 미시마 특유의 미문으로 그려내고 있다. 만일 조선이었던 시절의 김동인이 자신의 전성기에 이런 작품을 썼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만세삼창이라도 해줄 수 있지만 1960년대, 며칠 뒤면 김승옥이 <생명연습>을 발표할 시점에 이렇게 발랄 엽기적 소설을 쓰는 이유는 도대체 뭐였을까? <오후의 예항>은 발표한 뒤에 곧바로 영역하여 영미권에서 절찬리에 읽혔다고도 한다. 독자들이야 죄 없다. 미시마의 미문은, 내용이 어떻고 주장하는 바가 저떻더라도 문장 하나만 가지고 충분하게 매료시킬 수 있을 터이니. 물론 이 독자들의 범위에서 나는 좀 빼주라.


  “그는 그것(복도에 선명하게 떨어진 햇빛)을 사랑했다. 수줍게, 열렬히. 어째서 저런 창에서 떨어지는 햇빛이 좋았던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은혜롭고 아주 거룩한 느낌이었는데, 칼로 토막 살해당한 유아의 하얀 몸처럼 마디마디 잘려져 있었다.” (<짐승들의 유희> 1장. p.200)


​  “노보루는 있는 힘껏 새끼고양이를 들어 올렸다가 목재 위에 세차게 내리쳤다.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던 따뜻하고 부드러운 것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것은 멋있었다. 그러나 손가락에는 부드러운 털의 감촉은 아직 약하게 남아 있었다. … (중략) … 노보루가 다시 잡아 올린 것, 그것이 이미 고양이가 아니었다. 반짝이는 힘이 그의 손가락 끝까지 꽉 차서, 그는 이번에는 자기의 힘이 그려내는 분명한 궤적을 따라 집어 올려 그것을 목재에 몇 번이고 내려칠 뿐이었다.” (<오후의 예항> 1부. p.65)


​  위에 인용한 문단은 19세기 자연주의 시절이나 20세기 초의 예술지상주의 혹은 세기말주의에서나 볼 수 있고 어울리는 것이지, 60년대에 이게 뭡니까. 평상시에 생각하는 게 이런 따위니까 천황, 뭐 천황? 그냥 왕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 하여간 절대왕권을 위한 쿠데타 비슷하게 시도하다가 마음 먹은 대로 되지 않으니 할복을 해버린 것이지. 할복이나 제대로 했나? 배는 갈랐지만 숨이 넘어가지 않아 할복 도우미, 가이샤쿠가 옆에서 빨리 죽으라고 목을 쳐버렸고, 단번에 잘리지 않아 여러 번의 난도질 끝에 데굴데굴 구르던 미시마의 머리통, 이 가운데 대뇌, 큰골은 아직 완전한 죽음에 이르지 않았을 테고 그러면, 어쩌면, 혹시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눈을 통해 머리통이 잘린 자신의 몸통을 아주 잠깐이라도 구경하고 가지는 않았을까? 아, 나는 “토막 살해당한 유아의 하얀 몸”이라든지 통나무에 새끼 고양이를 패대기쳐서 죽이는 장면 같은 건 아주 질색이다, 질색. 이런 장면을 연상하지 않더라도 세상은 충분하게 살기 힘든 곳이라서.


​  시절에 맞든 맞지 않든 간에 인정할 것은 인정한다. 미시마 유키오의 탐미주의적 뇌 놀림. 이건 정말 대책이 없다. 미시마 흉을 보느라 벌써 지면을 많이 써버려서 <오후의 예항>에 관해서만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여기에 위에서 인용한 ‘구로다 노보루 黑田登’라는 열세 살의 촉법소년이 등장한다. 아버지는 노보루가 여덟 살 때 일찌감치 차마 감지 못할 눈을 감아버리고, 어머니 구로다 후사코는 아버지가 운영하던 일본 최고급의 수입 양품점 ‘렉스’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 만큼의 놀랄 만한 수완으로 더욱 번창시켰다. 이제 막 유행하기 시작한 테니스를 클럽에서 정식으로 배워 탄탄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 서른네 살의 아름다운 여성. 그러나 철저하게 수절하고 있는 과부라서 거의 매일 밤 모든 옷을 벗고 전신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나신을 비춰보는 습관이 있다는 걸, 노부로는 우연히 서랍장에서 서랍을 모두 빼고 안에 들어가 장 때문에 가려져 있던 틈 사이로 훔쳐보면서 알아냈다. 아무리 미시마 유키오라고 해도 아들이 엄마의 사생활을 전부 관찰하게 만들 수는 없어서 틈으로 볼 수 있는 엄마 방의 범위를 한정적으로 할 수밖에 없었으니, 이 돈 많은 미인 과부가 언젠가는 베드 씬을 한 번 벌이지 않겠느냐, 그럼 엄마의 엑스터시를 아들이 A부터 Z까지 생 라이브로 관람을 하게 만들어야겠느냐, 하는 딜레마가 있었을 터이다.

  노부로는 바다와 선박, 그리고 항해에 관한 로망이 있다. 배의 구조와 설치물에 관해서는 상당한 지식까지 가지고 있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조금 천재성까지 있을 거라고 자부심을 느끼는 소년이라서 어머니한테 배 구경을 하고 싶다고 졸랐다. 세계적인 무역항 요코하마에서 일본 최고급 양품점을 하는 유력인사인 어머니는 선박회사 전무에게 부탁을 했고, 전무는 소개장을 써주면서 화물선 라쿠요마루 선장을 찾아가라고 일러주었다. 그리하여 이틀 전, 라쿠요마루 호에 오른 모자는 마침 선장이 외출 중이라 삼십대 단단한 체력과 체격을 갖춘 스카자키 류지 이등항해사의 안내로 배 견학을 한다. 받으면 보답을 해야 하는 게 일본식이라지만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도 친절한 어머니인 후사코 씨는 그랜드호텔 양식당에서 류지에게 다음날 저녁 식사를 대접했고, 비프 스테이크를 대접한 김에 자신의 입술까지 주어버린 건 뭐 한창 때의 과부가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에그머니, 열세 살 먹은 노부로가 바로 옆방에서 자는 자기 집, 자기 방, 자기 침대에까지 끌어들인 거, 이건 어쩔겨? 물론 벌써 배꼽 아래 13cm에 푸른 색 모근으로부터 검정 터럭이 촘촘하게 돋고 있는 사춘기 아들이 서랍장 속에 들어가서, 부얼부얼한 가슴 털이 아래로 쪽 이어진 곳에서 류지의 “무성한 털을 뚫고 나와 자랑스러운 듯 솟아 있는 매끈매끈한 불탑”과 엄마의 맨 다리를 보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을 테지.

  사실 노부로는 밤마다 가택연금 비슷한 “자기만의 방에서의 연금” 중이다. 여섯 명으로 된 학교에서 마리 좋은 아이들의 모임이 있다. 대장이 있고, 1호부터 5호까지 있어, 노부로는 3호로 불린다. 하루는 대장이 꼬여서 한밤중에 몰래 나가 놀다가 엄마한테 제대로 들켜 이후부터 밤마다 엄마는 방문을 밖에서 잠궈버렸다. 덕분에 노부로는 서랍장 속의 비밀을 하게 되긴 했지만. 하여간 이 또래들은 매우 혁명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바, 모든 영웅적인 것을 숭배하고, 지질한 잡것들을 타도해야 할 것으로 구분한 것. 제일 먼저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무리는 바로 아버지란 작자들하고 선생이란 새끼들이었다. 강한 자들에게는 경배하지만 위에 인용한 것처럼 새끼 고양이 같은 약하고 구질구질한 것들은 멸해야 마땅한 거다. 그리하여 새끼 고양이를 산 채로 통나무에다 패대기를 쳐 죽인 다음에 껍데기를 벗기고 배를 갈라 장기를 적출해 붉은 심장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까지 구경하는 내내 조금의 죄의식도 느끼지 못할 수 있었다. 이 여섯 명의 자칭 천재들은 스스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형법 제41조, “14세가 되지 않은 자의 행위는 이를 처벌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제 세상이 자신들은 선한 존재, 귀엽고 아름다운 존재로 알아주는 일은 불과 몇 달밖에 남지 않아 자신들의 특권을 한 번을 써봐야겠다고 진지하게, 아주 진지하게 결심하고 있으니, 이거 진짜 미시마 유키오 맞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나는 당신이 이 책을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거 말고도 읽을 책은 넘치고 넘친다. 그러나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것. 내가 주제넘게 읽어라, 읽지 마라를 권하는 건 아무 의미도 없다. 불행하게도 미시마의 탐미적이고 감각적인 문장은 아름답다. 그러나 그걸 재료로 만들어 이 책에 담은 두 편의 소설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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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08 10: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얼토당토 않은 작가의 정치적
행태와 말로 때문에 도무지 정
이 가지 않는 작가입니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작가가
추구한다는 탐미주의에 대해
서 와 닿지가 않더군요.

Falstaff 2023-04-08 14:58   좋아요 1 | URL
이 책을 낼 때까지는 군국주의를 노골적으로 옹호하지 않았는데 뒤로 갈수록 도라이로 바뀌었지요. 제 생각엔, (어떤 기준인지는 몰라도) 병약했던 청소년기, 폐결핵 진단이 오진인 것을 알면서도 시침 뚝 떼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은 과거, 이런 것들이 점점 커져 완전히 맛이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