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녀들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지음, 김재선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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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벌써 5년 반 전에 대산세계문학총서 시리즈 9번,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의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 / 어느 계단의 이야기》를 정말 흥미롭게 읽고(생각할수록 기막힌 작품이다!) 그의 다른 작품이 번역 출판된 것이 없다는 게 속이 상할 정도로 안타까웠었던 기억이 있다. 이렇게 기다리던 부에로의 다른 책이 2022년 12월 말에 드디어 책가게에 깔려 내 눈에 띄었다. 기다리는 동안, 하, 세월 진짜 빨라, 어느새 은퇴를 한 나는 구입해 내 책장에 꽂아놓는 대신 얼른 동네 도서관에 (아내 이름으로)희망도서 신청을 하고, 책이 들어왔다는 문자 메시지를 받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가 (중간에 배고파 천 원짜리 육개장 맛 컵쌀국수 하나 먹은 거 빼고) 그 자리에서 한 방에 읽은 다음, 지금 개가실에 붙은 PC에 앉아 있다. 참 좋은 세상이다.

  대산총서 독후감에도 썼듯이 1916년 스페인 과달라하라에서 태어난 부에로는 1934년의 내전 때 인민전선에 가담했다가 종전 후 팔랑헤 일당들에게 사형선고를 받았다. 공화파 입장에서도 전쟁 끝났을 때는 나름대로 복수심에 불타 인민전선 쪽 가담자들에게 마구 사형을 선고했겠지만 그 많은 사람들을 진짜로 다 죽이면 스페인 사람들의 국민 단백질, 돼지는 누가 키우고, 걔네들 안 먹는 삼겹살은 누가 한국으로 수출하나 싶어, 집행을 차일피일 미루다가 여덟 달 정도가 지나면 종신형으로 감형, 다시 몇 년 후엔 슬그머니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진짜로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부에로의 아버지와 친형도 이때 총살당해 죽었다.

  그러나 그건 나중 일이고 부에로는 어려서부터 책 읽기와 글쓰기에 남달랐지만 그것보다 그림 그리기에 더 남달랐다고 한다. 가족들 모두 마드리드로 이사를 하고 귀여운 막둥이는 화가가 되기 위해 베야스 아르테스 학교에 들어간 때가 1934년. 마침내 꿈을 이루기 위한 첫 날갯짓을 막 하려던 참에 전쟁의 참화 속으로 끌려들어간 꼴이다. 며칠 전 독후감을 쓴 <열차는 정확했다>의 하인리히 뵐과 대단히 유사한 경우. 내전이 끝나고 근 6년여를 여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감방 안에서도 동료들의 초상, 정식 초상은 아니고 그저 캐리커쳐 수준 아니었을까 싶은데 하여간 그런 것들을 그려주면서 세월을 죽였을 정도였단다. 왜 이 양반의 미술 취향에 관해 말을 길게 하느냐 하면, 지금 읽은 책의 제목 <시녀들>이고, 책 좀 읽는 분께서는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를 휙 떠올릴 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말하는 “시녀들”은 1599년에 나서 1660년에 세상 뜬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로드리게스 다 실바 이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 Las Meninas>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그림을 보시면, 아, 이거로구나, 라고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벨라스케스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내전 동안 연극을 포함해 실력있는 문화 예술 관계자들은 거의 대부분 이베리아 반도를 떠버리는 바람에 스페인은 이후 한동안 문화적 공백기를 맞아야 했단다. 이때 혜성같이 등장한 인물이 바로 오늘의 극작가 안토니오 부에로 바예호. 그는 1947년에 <어느 계단의 이야기>를 발표하고 로페 데 베가 상을 수상함과 동시에 연극으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다. 내가 읽기에는 <타오르는 어둠 속에서>가 미세하게 더 좋았지만 스페인에선 <…계단 …>이 먼저 성공을 하고 이어서 데뷔작인 <…어둠 속에서>가 알려졌단다. 하여간 초기작의 성공 이후에 이름이 나고, 벨라스케스 서거 3백년을 맞아 한때 화가 지망생이기도 했던 바에로가 이를 기념하기 위해, 벨라스케스의 진짜 성격과 행동은 다음으로 하고, 그를 최고의 정의파로 다시 각색한 작품을 만들었으니 이게 <시녀들>이다.


​  역자 김재선이 “학회지에 실린 논문을 일부 요약하고 인용한” 내용에 따르면, 실제의 벨라스케스는 자신의 노예가 그림 기술을 익히려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고용인의 급여를 착복하기도 했고, 권력에 무한하게 아부해가면서 최고의 명예 가운데 하나인 산티아고 기사단 단원이 되고자 안달복달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품에서는 자기 노예에게 그림 기술을 알려주고, 왕을 통하여 자유인이 되게 했으며, 옛날 옛적 자신의 그림 <이솝>의 모델이 되어 준 늙은 페드로를 더할 나위 없이 친절하게 보살피려고 하며, 산티아고 기사단이 되는 것도 왕이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보답해준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럼 이게 뭐야? 이거 허위사실 적시, 즉 범죄행위 아냐? 아니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부에로는 벨라스케스의 사망 3백년을 기념해 창작물에 관한 시각, 아름다움을 보는 미감, 인간 본성의 악함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지 벨라스케스가 진짜로 선하고, 냉정하고, 정의롭고, 속화되지 않은 예술혼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스페인 판 용비어천가를 쓴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2부로 되어 있다. 1부를 이끄는 것은 스페인 궁정의 사치와 위선과 질투를 포함한 음모, 그리고 헛된 짝사랑과 진실한 배우자(벨라스케스)를 향한 쓸데없는 투기 같은 것으로 꽉 메워져 있어 좀 지루할 수 있는데 2부로 넘어가면 진짜 본론이 등장해 흥미진진, 절정과 결말을 향한 행진을 시작한다. 모든 것은, 연극이니까 당연하겠지만, 오직 하나, 아름다움의 분별과 정의와 정직을 위해 복무한다. 그리고 이런 미덕이 밝혀지는 곳은 고깔모자를 쓰고 기둥에 묶인 채 화형에 처해 죽느냐, 스페인 땅에서 추방되느냐, 아니면 서양식 능지처참인 환형에 처해지느냐의 기로에 선, 이름도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종교재판 법정에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이 극작을 법정 드라마라고 해도 별 무리는 없을 터.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역사상 최고의 화가이고 고야가 나오긴 전까지, 물론 고야가 등장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어깨를 견줄 경쟁자가 없을 스페인 미술계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인물이다. 당연히 궁중화가였으며, 궁중화가라도 같은 궁중화가가 아니라 왕을 위한 그림만 그리는 왕의 화가였다. 잘 나가니 좋겠다고? 천만의 말씀. 내 독후감에 수없이 썼다시피 밖에서 보기에 아무리 유복한 인간이라도 한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기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어렵다. 그는 같은 궁정화가이자 자신보다 선배 화가, 즉 벨라스케스가 궁정화가가 됨으로써 최고의 자리에서 밀려버리고 수치스럽게도 자신도 모르는 채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본 ‘부분(색의 사용)’을 모사해 마치 자신의 창작물인 것처럼 스스로도 착각하고 있던 앙헬로 나르디에게 질투를 받으며, 나라가 어떻게 되든 백성을 갈취해 왕과 자신의 부만 쌓으면 그만인 후작은 왕이 일개 화백을 총애해 식부장관의 자리에 오른 벨라스케스를 시기한다. 그가 식부장관에 오르긴 했는데 같은 시기에 식부장관직을 희망했던 사촌 호세 니에토 벨라스케스는 디에고만 사라져주면 장관 자리가 자기한테 올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으며, 공주의 시녀 가운데 한 명인 도냐 마르셀라 데 우요아는 벨라스케스는 전혀, 전혀 관심이 없건만 자기 혼자 열라 짝사랑에 빠졌다가 그게 어긋나버리자 거꾸로 그를 구렁텅이에 빠뜨려 복수하고자 한다. 이런 삶이 행복허겄어? 사는 게 다 그렇지.

  게다가 먼 과거에 자신의 모델이 되어준 페드로 브리오네스는, 그림 속에 담긴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고 있던 천민 출신인데, 하인 생활을 하다가 주인 대신 도둑의 누명을 써 8년 동안 노예선에서 노를 젓는 일을 하기도 하고, 풀려난 후엔 군에 입대해 플랑드르 전쟁에 나갔다가 자기 부하들이 연대장한테 부당한 일을 당하자 격분해 결투를 신청해 상관을 살해해 수십 년 동안 도피생활을 한 반쯤 맹인이기도 하다. 이런 온갖 안 좋은 상황에 처한 벨라스케스라고 읽는 “진정한 예술인”은 자신을 향해 노골적으로 뻗어 오는 폭력적 음모에 맞서 당당하게 쌍권총을 뽑아드니, 기대하시라,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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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3-30 09: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부예로 바예호 새 책이 나왔군요! 이런이런! 사야지! 하고 가격 눌렀다가 깜놀.......
저도 도서관을 이용하겠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

Falstaff 2023-03-30 13:18   좋아요 1 | URL
ㅎㅎ 못보셨는지 알았습니다. 눈에 띄었으면 누구보다도 먼저 읽으셨을 분인데 싶었거든요. ㅋㅋㅋ

잠자냥 2023-04-04 10:52   좋아요 1 | URL
<시녀들>로 땡투 받으셨을걸요. 도서관에 신청하고 기다리기 답답해서 전자책으로 질렀습니다. 전자책은 그나마 좀 싸다능...ㅋㅋㅋㅋ

Falstaff 2023-04-04 13:02   좋아요 1 | URL
ㅎㅎㅎ 고맙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