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자들의 힘
안나 제거스 지음, 장희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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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제거스는 1900년 11월 19일 마인츠에서 네티 라일링이라는 이름으로 부유한 미술품 상인의 딸로 태어난다. 예로부터 미술품을 비롯한 거의 모든 예술품, 보석 세공품, 고악기 등의 감정을 귀신같이 해내는 족속이 있었으니 이들은 일찍이 음악과 고리대금업에 관한 한 타의 근접을 불허한 바, 네티 라일링 역시 이들 유대인의 일원이었다. 그런데 젊은 시절을 보낸 시기를 보시라. 1900년생. 19세기가 점을 찍고 며칠 후 20세기가 열릴 시점에 태어난 네티는 10대 초반, 불타는 사춘기의 정점을 지날 무렵 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인생의 황금기라고 일컫는 20대를 지나자마자 독일 전역을 집권한 나치들에 의한 탄압을 받으며 조금만 더 버티면 좋은 세상이 올 줄 알았는데 천만의 말씀, 동족 수백만 명이 흰 연기로 변해 굴뚝을 통해 천국으로 날아가는 일이 생겨버린다.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을 벗어나 세상 곳곳으로 방황한 이후 몸과 마음이 편했던 적이 별로 없었지만 하필이면 네티 라일링의 시절에 극적인 핍박을 받게 되는데, 네티 라일링, 이제부터 안나 제거스라고 불릴 작가는 원래 그런 성향이 있기도 했고, 1925년에 헝가리 출신의 공산주의자이며 사회학자인 라슬로 러드바니와 결혼하고, 1929년엔 프롤레타리아혁명작가동맹에 가입하면서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만방에 고했다. 불과 몇 년 후에 집권한 나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이라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주리를 틀고 불태워 죽일 만한데 거기다가 공산주의자라고 뭐 잘났다고 커밍아웃까지 해버린 인간을 곱게 살려둘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제거스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것은 독일 탈출. 나치 역시 악마 같기는 하지만 바보는 아니라서 1933년 게슈타포를 보내 제거스를 체포하기에 이른다. 이전까지 출간한 이이의 작품들, 이 가운데엔 체포된 이듬해인 1934년에 소비에트연방에서 영화로도 만든 <성 바르바라 마을 어부들의 봉기>까지 있었지만 나치는 제거스의 모든 작업을 퇴폐문학으로 규정하여 금서 조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광장에서 확 불을 싸질러버리고 만다. 여기서 제거스의 명이 다 했다면 지금처럼 유명세를 누리지 못했을 것. 제거스는 귀신같이 탈출에 성공해 파리로 망명, 반파시즘 잡지에 간여하며 투고와 창작작업에 몰두한다. 그러나 39년에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40년엔 파리가 함락되자 급하게 마르세이유로 옮겨 라틴 아메리카로 대서양을 건너기 위해 숨막히는 기다림을 시작하는데, 이때의 절박한 심정을 그린 소설이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한 <통과비자>, 내가 처음 읽은 안나 제거스다.

우여곡절 끝에 1941년 멕시코에 짐을 푼 안나 제거스는 그곳에서 반 파시즘 단체 하인리히 하이네 클럽을 만들어 의장으로 활동하고 이후에도 갖가지 독일의 반 파시즘 활동을 벌이는 한편 소설쓰기도 게을리하지 않아 공산주의자와 집시들을 가두어 놓은 수용소에서 탈출한 사람들을 그린 역작 <제7의 십자가>를 발표한다. 이 책은 시공사 세계문학의 숲 시리즈로 발간했다. 매우 재미있다. 내 경우엔 <제7의 십자가>를 읽고 난 다음부터 안나 제거스에게 유심한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7년에 멕시코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주하고 1950년엔 당연히 동베를린으로 거처를 옮긴다. 이후 제거스는 동독의 첫 번째 국가 훈장 수훈자라는 명예를 누리다가 1983년 6월, 82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힘들고 어려운 초중년 시절을 보냈으나, 이 정도면 그래도 잘 산 삶이다.

《약자들의 힘》 역시 안나 제거스다운 작품들을 모은 단편집이다. 모두 아홉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일곱 이야기는 반 파시즘, 즉 반 나치는 물론이고 반 프랑코까지를 망라하고 있다. 나머지 여덟 번째와 아홉 번째 이야기는 멀고 먼 시절의 독일 북부지역, 모진 기후와 척박한 땅에 살던 조상들의 삶의 이야기이다.

첫 번째 이야기는 <어머니>. 역자 장희창은 작중 주인공인 어머니 아가테 슈바이게르트를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와 유사하다고 했다. 수긍이 가는 말이기는 하지만 완전하게 그렇다고 동의하기는 좀 어렵다. 우리가 아는 제일 유명한 의식화된 어머니는 아무래도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겠다. 고리끼의 어머니와 이 책의 아가테와 유사한 점은 직접 공산주의 운동과 반 파시즘 운동에 투신한다는 것이고, 다른 점은 고리끼의 경우엔 어떠한 경로를 거쳐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 역시 상당한 수준으로 의식화가 되어 있는 상태인 반면, 아가테는 아들이 반 파시즘을 위해 스페인 내전에 뛰어들었다는 것 하나로 그것이 옳은 일로 판단해 스스로 스페인 국제여단 독일분국으로 찾아가 간호사로 일을 한다는 거다. 아가테는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딱 하나다. 아들이 확신을 갖고 투신했으며, 아들과 신념을 공유하는 아들의 친구와 함께 행동하는 것.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20세기 초에 라인강변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알게스하임 시 변두리에 잡화점을 하는 과부 헬레네 덴회퍼가 딸 아가테와 함께 살았다. 아가테는 학교를 마치면 곧바로 집에 와서 숙제를 마치자마자 정원에 물 주고 잡초도 제거하지만, 과부 엄마를 도와 손님 시중 역시 그렇게 잘 할 수가 없었다. 때마침 시 외곽에 통조림 공장이 생기고 이에 따라 인구도 늘자 매상도 덩달아 늘어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과부 살림에 은이 서말이 넘었다. 그러나 때를 맞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개전 초기엔 군인들이 몰려들고 새로 들어온 조차장을 꽉 메워 잠시 호황을 맞았지만 곧바로 불황이 닥쳤다. 그래도 원래 내핍생활에 이골이 난 터라 속으로는 끄떡도 하지 않았지만, 부인이 차가운 가을비를 맞으며 행상을 나갔다가 그만 덜컥 폐렴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만다. 가냘픈 아가테 혼자 남았으나 사회 전반이 워낙 황황해 사람들은 아가테와 덴회퍼 부인을 헛갈려 하며 그냥 저냥 시간이 흘러갔고, 원래 조차장에서 일하던 슈바이게르트 씨가 전쟁이 끝나고 절름발이 홀아비가 되어 나타나자 그의 아내가 되어, 공부 잘하는 아들 에른스트를 낳았다.

에른스트는 겉으로 보면 불량스럽기 짝이 없는 라인홀트 샨츠와 친하게 지내기 시작했고, 아버지를 어려서 잃은 에른스트는 샨츠의 아버지와 짧지 않은 시간을 보내며 영향을 받았는데 엄마 아가테 눈에는 그게 참 싫었다. 그렇다고 아들의 의견을 모른 척할 수 없어서 내버려두었을 뿐. 엄마의 고민은 시간이 해결해주어 라인홀트는 학교를 그만두고 돈을 벌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가고, 에른스트는 좋은 성적으로 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하여 프랑크푸르트의 대학으로 진학한다. 이 사이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키 작은 아마추어 화가가 나치 당을 만들어 집권을 하고, 가끔 들르는 친절한 아들 에른스트는 집에 와서 즐겁게 지내다가 히틀러 이야기만 나오면 여태 보지 못한 정도의 흥분을 하며 비난을 퍼붓고는 한다. 그러다가 프랑크푸르트 시내에서 벽보와 삐라 사건이 터지고, 에른스트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소위 잠수를 타게 되고, 프랑스로 망명을 떠나 소식이 끊어진다. 2년 후, 전에 프랑스에서 온 편지의 우표 스탬프 주소를 보고 아들을 찾아 무작정 파리를 거쳐 툴루즈의 그라페 도르 호텔로 길을 떠나게 되는 아가테 슈바이게르트. 그러나 그동안 에른스트는 이미 스페인으로 떠난 상태. 어머니는 가진 돈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한 그라페 도르의 사장에게 맡기고 이번에도 홀몸으로 바르셀로나로 향한다. 아들이 부상을 당해 차를 타고 며칠을 가야 하는 야전 병원에 입원해 있어서 고생스럽게 다시 그곳으로 가 드디어 상봉을 한다. 이때까지는 몰랐지. 그게 아들을 마지막으로 보는 것일지.

불행하게도 팔랑헤당이 공화국을 점령했을 때, 제일 마지막까지 병원에서 간호를 하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를 향해 피레네 산맥을 넘은 아가테. 프랑스의 수용소에서 두 번째 만난 아들의 막역한 친구 라인홀트는 아주머니에게 자신들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로 갈 것을 종용하자, 아들의 친구들, 뜻을 같이 했던 이들과의 동행을 기꺼이 승낙한다. “그래, 그래. 너희들과 함께 가야지.” 하면서.

훌륭한 책이라고까지는 하지 않겠다. 그러나 소비에트 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가공의 어머니와 비교해 훨씬 자연스럽다. 전반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다. 안나 제거스하면 떠올릴 수 있는 적당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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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3-02-21 13: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약자들의 힘을 너무 인상깊게 읽었기에, 누구에게든 두루 추천하고 있습니다만...

첫번째 단편의 주인공이 아마도 아가테였던 거 같고 리뷰 쓰신 내용을 보니 기억이 납니다...첫 단편이 저는 이 단편집 중에서 제일 별로 였지만(상대적으로) 나머지 단편들이 모두 좋았습니다! 특히 어떤 학자와 대화하는 단편이 매우 인상깊었고 가장 기억에 남는데, 워낙 읽은지 모래되어서 주인공과 플롯이 기억나지 않습니다만...전 단편들이 고루 좋다는 인상은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제7의 십자가 읽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약자들의 힘이 더 재밌다는 인상입니다..^^

Falstaff 2023-02-21 14:31   좋아요 0 | URL
저는 십자가가 좀 더 재미있는 걸로.... ㅎㅎ
세상 사람들의 감상이 다 같으면 무슨 재미겠습니까. 그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