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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데시 언너
코스톨라니 데죄 지음, 정방규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1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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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코스톨라니 데죄는 1885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헝가리 쪽 영토인 서버드커에서 태어났다. 부계, 모계 공히 훌륭한 전통 가문을 자랑했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김나지움의 수학, 물리학 교사/교장이었고, 어머니는 독일계 약국 집 딸이었다. 서버드커는 현재 지명으로 수보티차, 라고 하며 세르비아 영토에 속한다. 고향에서 사춘기적 비행시절을 겪으며 김나지움까지 다니고 두 학기를 부다페스트, 또 두 학기를 빈에서, 이렇게 2년 동안 대학에서 철학과 독문학을 공부하지만 중도 작파하고 언론인의 길을 걷는다. 기자로서의 특징은 자유주의, 보수주의, 천주교, 마르크스주의를 가리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기고한 점이었다. 이는 작가 스스로가 종교적으로는 가톨릭,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 쪽에 관심이 많았던 결과로 보인다. 정확한 거 아니고 내가 짐작하기에 그렇다. 185cm의 완벽한 키와 근육질 체질로 1차 세계대전에 징집을 당했지만 징집 장소에 밝은 색의 영국 슈트와 노란 넥타이를 매고 서 있다가 대령(연대장쯤 되나 싶다)에게 시와 연극 경력이 담긴 명함을 건네는 바람에 부적격자로 판명되어 최후의 돌격전이자 최초의 장기 참호전에서 총알받이가 되는 팔자를 모면할 수 있었다.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고, 1936년에 쉰한 살의 나이로 천국의 즐거움을 찾아, 갔다.
코스톨라니의 조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차 세계대전의 종식과 함께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각기 다른 나라가 된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당시의 헝가리 정세를 조금 알아두는 것이 좋다. 1914년 8월에 시작한 1차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빼빼로 데이에 콩피에뉴에서 독일제국과 협상국 대표가 모여 종전 협정에 인감도장을 찍으면서 끝난다. 독일제국에서 분리된 헝가리에서는 즉각, 1918년 11월 16일에 헝가리 공화국을 선포한다. 카로이 미하이 대통령이 이끄는 공화국 정권은 반년을 견디지 못하고, 1919년 3월 21일 부다페스트의 실업자들을 주축으로 혁명이 일어나 쿤 벨러가 전권을 쥐고 적군, 붉은 군대를 창설하며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지만, 1919년 7월 31일에 호르티가 정변을 일으켜 헝가리는 다시 로마 가톨릭의 교왕이 수여하는 왕관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어깨에 힘주는 “사도의 왕국”으로 회귀, 역사의 시계를 거꾸로 돌리는 일이 벌어진다. 우습게도 이 사도의 왕국은 2차 세계대전 발발 때까지 유지되기는 하지만 전쟁이 터지자 또다시 독일에 복속했다가 이후 4십여 년 동안 소비에트 연방의 위성국가 노릇을 해야 했다.
쿤 벨러가 집권했던 짧은 시기, 몇 달 동안 공산주의 국가들이 펼쳤던 유감스러운 일들이 당연히 헝가리에서도 발생해서 비밀경찰과 붉은 군대, 종업원 20인 이상의 모든 기업의 국유화, 부르주아의 재산 몰수, 금융과 교육기관 국유화, 토지 개혁 등을 “시도”했고 이 와중에 <에데시 언너>의 무대가 되는 부다페스트 어틸러 거리 238번지 3층 고급 주택의 주인인 비지 코르넬 씨처럼 20년간 공직생활을 하고 현재 국장의 지위에 있던 사람들은 “잠정적”이란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한 순간에 실직을 하고 만다. 대신 헝가리라는 영토와 국가가 생긴 이후 단 한 번도 역사책에 이름을 올려본 적이 없던 하녀 커티처 양은 노골적으로 비지 씨와 비지 부인의 지시와 요청, 심지어 간청을 아랑곳하지 않고 밤이면 밤마다 또는 밤새도록 붉은 군대의 병사나 마도로스 청년들과 연애하기에 날 가는 줄 몰랐고, 심지어 비지 부부는 생각조자 할 수 없었던 것인데, 남자를 데리고 집안에 들어와 새벽에 보내는 일도 잦았다.
커티처 양보다 더 위세를 떨쳤던 인물이 있었던 바, 일찍이 20여년동안 공산당 당원으로 당비를 꼬박꼬박 냈다고 주장하는 어틸러 거리 238번지 건물의 관리인 피초르 씨. 이이의 주장은 분명히 거짓임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손이 모자랐던 공산정권은 이런 이들의 주장을 모르는 척해서 자잘한 일손과 필요한 정보 수집에 유용하게 이용할 수 있었을 것인데, 문제는 그동안 집 주인 혹은 집에 정당하게 세를 들어 사는 사람들이 누리던 권리를, 여태까지 방바닥에서 1.2 미터 정도는 습기가 차 물방울이 맺힌 벽으로 둘러싸인 지하실에 살면서 밟으면 찍소리 하지 않고 밟히는 대로 살던 피초르 씨가, 그들의 권리 따위는 개나 물어가라, 하고 안면 싹 몰수해버렸다는 거다. 그렇다고 불만이나 불평은커녕, 오히려 당원 중에서도 골수당원, 귀족이라고 같은 귀족이 아니라 수백년 전통이 있는 진짜 귀족이라고 자랑이라도 하듯이, 자칭 골수당원의 눈 밖에 나서 그로 하여금 공산당 정권에 가서 쓸데없는 주둥이질이라도 할까봐 전전긍긍해야 했으니 이게 사람 사는 꼴일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지.
부르주아들의 입장에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몇 달 새 벌어져 피곤했던 바가 장난이 아니었는데, 거꾸로 매달아도 시계바늘은 돌아가는 것이라 드디어 1919년 7월 31일이 도래했고, 혁명 정부의 수반 쿤 벨러를 태운 비행기가 소비에트들이 머무는 본부로 사용했던 ‘헝가리’라는 이름의 호텔에서 날아 올라 낮게 비행해 가는 장면으로 소설을 시작하니, 부르주아들의 기쁨이야 말로 해 무엇하겠는가. 그러나 정장 쿤 벨러는 비행기 안에서 언제나의 모습처럼 창백한 안색에 수염도 깎지 않은 얼굴로 나 없이 잘 해보라는 심술이 가득한 것이 분명한 히쭉거리는 웃음으로 조국과 국민들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그의 가방 속에는 마음 여린 귀족 부잣집 사모님들을 은근히 협박해서 억지로 선물로 받은 제르보 빵집의 고급 과자, 액세서리와 보석들, 성당 제단에서 쓰는 고급 촛대 등의 귀중품으로 터질 듯했다는 걸 아는 헝가리 국민들은 별로 없었을 걸?
공산주의 정권이 물러나자마자 기세가 오른 비지 씨. 그는 초인종을 당기는 대신 자기가 낼 수 있는 가장 큰 소리로 하녀 커티처를 부르는데, 그동안 수없이 여러 차례 초인종을 고쳐 달라고 관리인 피초르 씨에게 부탁했지만 귀에 못이라도 박았는지 일체 대꾸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혁명의 소식을 듣지 못한 커티처는 주인의 요구를 잠깐 들어주는 시늉만 하더니 또 금방 데이트하러 날라버리고, 부르지도 않은 피초르 씨는 스스로 찾아와 “인자하신 어르신. 충실한 하인입니다. 존경하는 국장님!” 운운하면서 재까닥 초인종을 고쳐주기에 이른다. 당연하지. 세상이 변했으니. 이러니 어떻겠는가. 비지 씨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마찬가지였겠지만, 비지 부인은 더 이상 ‘상전같은 하녀’ 커티처를 해고하지 않고 참아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건 피초르 씨도 마찬가지. 이를 눈치챈 피초르는 자신의 처조카, 빌러톤 호수 지역에서 온 처녀이자 농부의 딸을 만성 신경성 위궤양에 시달리는 비지 부인에게 데려오겠다고 하면서 점수를 따는데, 당시 부다페스트 지역에서 하녀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초르 씨가 데려오기로 약속을 한 처녀가 바로 언너. 에데시 언너. 그는 1916년에 부다페스트로 와서 창고지기 빌트 씨와, 재무공무원 버르토시 댁에서 각 1년 반을 가정부로 일했는데, 아무런 하자도 없는 가정부를 이제 국장의 자리에 있는 천생 공무원 비지 씨의 댁에서 ‘강탈’ 비슷하게 빼앗아 와야 하는 처지가 됐다. 비지 부인이 열을 받아 자기도 모르게 웬수 같은 커티처에게 해고 통보를 해버렸으니. 이 책이 모두 468 페이지인데,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앞으로 인간이 아닌 하녀라는 물건, 로보트, 일하는 짐승의 처지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대우를 받을, 갸름한 얼굴과 고운 두상, 균형 잡히고 부드러워 보이지만 매우 마른 몸매, 낮고 작은 앞가슴, 그리고 앞으로 여주인의 조카에게 상실할 처녀성을 가진 완벽한 하녀, 우리의 에데시 언너가 98쪽에 이르러서야 부다 지역 어틸러 거리 238번지의 3층 주택에 등장한다.
서보 머그더의 <도어>에서 나오는 독특한 주인공 에메렌츠가 직업이 하녀여서 그런지 헝가리 하녀, 하면 자동적으로 에메렌츠가 떠오르는데, 에데시 언너는 맡은 일을 완벽하게 잘 한다는 것 말고는 에메렌츠와 비슷하지 않다. 한 인간을 하녀라는 이유만으로 불쌍해서 못 볼 정도로 "야비하게" (주의: '야비하게'다, 잔인하거나, 폭력적이거나, 이런 종류는 아니다) 대우하는 상류층. 겉으로 보면 호의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안으로는 무한한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부르주아는 과연 어떤 결과를 초래하게 될지, 이것은 일단 나만 아는 것으로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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