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요제프 로트 지음, 김희근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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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던 갈리치아 지역의 소도시 브로디에서 유대인 나훔 로트의 아들로 태어난 요제프 로트는 유대인이라기보다 차라리, 그가 1932년에 쓴 대표작 <라데츠키 행진곡>에서 잘 묘사한 것처럼 적어도 할아버지-아버지-본인 3대 까지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운명공동체 비슷하게, 오스트리아가 당연히 조국인 ‘오스트리아인’으로 생각했다. 요제프 로트가 빈 대학에서 “정상적으로” 독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1차 세계대전에 황제군으로 참전했던 경험 덕으로, 사회가 유대인으로 요제프 로트 자신을 바라보던 시각과 관계없이, 이런 입장을 고수하게 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는 것. 로트 자신 역시 바이마르 공화국에 반대를 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그랬을 거 같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의 책임을 묻는 과정에 전 유럽적인 반유대주의에서 시작한 유대인 책임론이 유독 독일-오스트리아에서 강력하게 대두되어 유대인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는 단계에 이르러는 피해의식에 싸이게 된다. 급기야 1933년에 오스트리아 군대의 상병 출신 키 작은 아마추어 화가가 놀라운 웅변술을 무기로 권력을 잡기에 이르자,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 프랑스로의 이주를 선택한다. 파리에서 망명생활을 이어가는 동안 로트는 심각한 수준의 알코올 의존증과 가난에 시달리다가 1939년에 파리 공립 자선병원에서 폐렴으로 45세를 일기로 눈을 감는다. 이이의 대표작으로는 위에서 짧게 언급한 <라데츠키 행진곡>과 유대인으로의 삶을 그린 <욥>, 그리고 에세이 <방황하는 유대인>을 꼽는다.

<거미줄>은 위키피디아에서는 “미완성” 데뷔작이라고 했다. 다 읽고 지금 독후감을 쓰는 입장에서 이게 미완성 작품인지, 완결을 맺은 작품인지 헷갈릴 수준으로, 굳이 미완성이라고 주장한다면 다 지어 놓고 뜸만 들이지 않은 돌솥밥 정도로 이해하면 접수하기 쉽겠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제국의 소위 신분으로 참전해 하인리히 왕자가 이끄는 연대에서 복무한 20대 후반의 ‘성실하고 예의바른’ 청년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출세를 위해 온갖 악행을 벌이는 과정을 그렸다.

독일제국 하사관 출신의 철도 세관원인 빌헬름 로제 씨는 순서대로 딸 둘과 외아들 테오도어를 낳고 죽었다. 금발의 테오도어는 성실하고 품행이 방정하여 타의 모범이 되는 소년이었는데, 일찍이 명망있는 사람이 되리라고 꿈꾸었지만 감히 그렇게 되리라고는 마음먹지 않았던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러다 1차 세계대전이 터져 소위 계급으로 참전해 무사히 귀환한 다음이 문제였다. 바이마르 공화국에 의하여 거의 강제로 제대를 하게 된 테오도어는 1918년에 대학에서 법학공부를 하며 동시에 유대인 보석상 에프루시 씨 집안에 들어가 가정교사로 일해야 했다. 어머니와 누이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아들이 전사했더라면 집안의 자부심을 세워줄 수도 있고, 얼마 되지 않지만 연금도 조금 받을 수 있었는데 멀쩡하게 돌아왔다고 그걸 눈치를 주었고, 아버지는 정복을 입은 예비역 소위 아들이 뒤따르는 가운데 나무 상자에 갇혀 땅속에 묻혀버렸다. 테오는 안으로는 자신과 가정 사이에 장벽처럼 드리워진 말없는 적대관계와, 밖으로 사회주의자와 유대인에 대해 심해지는 사회적 적대감 사이에서 자신이 큰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금은 활수한 에프루시 씨가 주는 가정교사 임금으로 살고 있으나, 사실 테오는 학창시절부터 유대인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던 급우, 유대인 글라저.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로 늘 미소를 지으며 자유롭게 돌아다니던 학생. 그렇지만 20분 안에 아무 오류 없이 라틴어 작문을 완성하는 재능을 아예 가지고 태어난 듯해서 테오도어에겐 늘 좌절과 열등의식만 주던 아이. 이제 부르주아 중의 부르주아인 에프루시 씨의 아들인 어린 에프루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실수를 결코 인정하지 않는 작은 에프루시. 오히려 자신의 대답이 왜 정당하 것인지 테오도어에게 설명을 하면 테오 자신이 설득을 당할 위기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여, 틀린 것을 틀렸다고 지적하지 못하는 일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기억 속의 글라저와 에프루시 씨, 에프루시 집안, 그리고 젊고 아름다운 에프루시 부인을 보면서 테오도어는 이건 분명히 뭔가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

유대인들의 모든 것은 단연코 속임수라는 것. 공화국은 유대인의 돈벌이 광장에 불과하고, 이에 대한 증거로, 전쟁 발발시마다 유대인들은 군복무 면제를 받거나, 전투수행 부적합을 사유로 야전병원, 병참기지에서 서기로 근무하면서 총 한 번 쏘지 않고 전쟁 기간을 안전하게 보낸다는 것. 물론 일찍 직업군인을 선택해 하사관으로 근무하는 병력들은 제외하지만. 하여튼 군대가 몰락한 것은 어떤 방면에서든지 적아도 한달에 두어 번 이상 공무원을 매수하려 시도하는 유대인 탓이며, 그들이 사실상 국가를 지배하며, 사회주의를 고안해 애국심을 버리고 적을 사랑하게 유도하고, 동시에 경찰력을 장악해 민족주의 조직을 탄압한다는 거였다. 또한 “시온의정서”에서 보듯이 유대인들은 더 나가서 세계를 지배할 야욕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여, 자신과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 빌헬름 티크만, 쾨테 교수, 강사 바스텔만, 물리학자 로란츠, 인종연구가 만하임 등을 거론한다. 이런 유대인 가운데 가장 부유한 에프루시 씨는 대단한 저택에 온갖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물품을 향유하지만 테오도어가 소유하고 있는 유일한 귀금속은 은으로 만든 화려한 장식의 그릇 하나뿐이다. 프랑스 아미생 성에서 약탈한 것으로 엄격한 상관 크라우제 소령이 도착하기 전에 은닉해 보관해 가져온 거에 불과하다.

이런 테오도어는 특히 에프루시 씨의 두번째 아내 에프루시 부인에게 홀딱 반하면서 세속적으로 출세해야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자신의 가슴 속에 늘 간직해온 꿈은 눈같이 흰 백마를 타고 부대의 선두에서 행진하는 대위의 모습이었다. 수천명의 여자들이 선망하는 존재. 펄럭이는 깃발과 우레 같은 환호 속에서 여자들이 키스세례를 날리는 꿈은 질병처럼 분출해 관절과 신경, 근육 속에서 숨쉬며 혈관을 따라 흐르고 흘러 온 몸을 채우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에프루시 저택을 방문한 유대인 트레비치 박사. 테오는 트레비치 박사를 통해 하인리히 왕자와 연결이 되고, 왕자에게 하루 동안의 몸을 팔아 트레비치 박사가 소속해 있는 뮌헨의 비밀조직, 이름을 알 수 없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쉽게 말해 밀정. 이제 그는 자신에게 아무런 악의가 없는 사회주의자들과 유대인들에게 적절한 누명을 씌워 자신의 영달을 위한 희생으로 삼는다.

이제 본격적으로 흥미진진하기도 하고, 잠깐 지나치게 잔혹하기도 하고, 어차피 인생 다 그게 그건데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사가saga가, 미완성 작품이라니까, 시작되려다가 만다. 배신하면 죽음으로 벌을 받고, 술에 취하는 등 실수로 비밀을 발설하면 제거되는 무시무시한 비밀 공동체 SII. 알파벳 S와 로마숫자 II로만 인식할 수 있는 복마전, 악마(魔)가 엎드려(伏) 있는 전당(殿) 역시 악마와 비슷하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어서, 복마전 속에서는 더 독한 배신과 비밀유출이 벌어진다는 건, 다들 아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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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3-01-05 07: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 지어놓고 뜸만 들이지 않은 돌솥밥 ㅋㅋㅋㅋㅋ

Falstaff 2023-01-05 17:02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재미있어 하시는 거 같아서 좋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