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하인리히 만 지음, 모명숙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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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인리히 만은 자신보다 20세기 중반까지 독일 문학을 대표했던 토마스 만의 친형으로 더욱 유명하다. 엄격하고 철학적인 작품을 썼고 자기도 이와 비슷한 성격/성품을 지닌 토마스 만과 대조적으로 라틴 아메리카 출신의 어머니를 닮아 개방적이고 활달하고 적극적 의사소통을 했던 하인리히 만은 살면서 자주 동생 토마스와 의견충돌을 일으켰고, 그보다는 약간 적은 회수로 의절을 했다가 화해를 반복한다. 그러나 이건 형제들의 일일 뿐, 토마스의 자식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전형적 독일인인 친아버지보다 큰아버지 하인리히를 더 좋아해 더 따랐다 한다. 그들이 성인이 되어 미국으로 건너가 살던 때도. 그는 1920년대 후반에 베를린에서 거주하며 공산주의에 경도되어 정치에까지 참여하는 바, 오스트리아 출신의 콧수염난 아마추어 화가가 독일의 권력을 쥐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프랑스로 망명한다. 망명 프랑스에서 독일인민전선 준비위원회 의장과 사회민주당 명예총재를 역임하면서 대표작이라고 일컫는 <앙리 4세>를 출간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미국으로 거주를 옮긴다. 공산주의자에 가까웠던 하인리히 만은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49년에 동독 정부로부터 예술 및 문학 1급 훈장을 받고 50년에 동독으로 귀국하려 했으나 캘리포니아 산타모니카에서 79세를 보름 앞두고 사망, 11년 후인 1961년에 그의 흰 뼈가 함에 담겨 동베를린 행 비행기에 오른다.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 읽을 수 있는 책은 낭트칙령을 선포하여 종교전쟁을 끝낸 부르봉 왕가의 시조를 다룬 대표작 <앙리 4세>와 오늘 독후감을 쓰고 있는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 딱 두 편이다.


​  <운라트 선생 또는 어느 폭군의 종말>의 주인공인 운라트 선생의 진짜 이름은 라트”Raat”다. 네덜란드 말로 벌집이라는 뜻이 있는 걸로 봐서 조상이 양봉을 했던 건 아닐까 싶다. 라트 박사는 김나지움에서 만25년간 라틴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문학을 가르치고 작품을 시작하는 시점엔 26년째 10학년, 우리나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담임을 맡고 있다. 이이가 젊은 시절에 한 과부를 알고 지냈는데, 과부가 선생이 먼 곳까지 유학 가서 공부를 해 학위를 받을 때까지 모든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었단다. 그래 선생은 급여가 그리 많지 않은 김나지움에 직장을 얻자마자 곧바로 과부에게 청혼해 혼인을 해 아들 하나를 두었다. 지금은 과부가 죽고도 많은 세월이 지났으며, 하나 있는 아들은 선생보다 결코 더 잘 생기지도 않은 데다가 눈 한쪽을 잃어버렸다. 아들이 대학시절에 좋지 못한 사교모임에서 많은 재산을 탕진하고 점잖지 못한 여성들과 노느라고 대학졸업 국가고시에 최하 네 번의 고배를 마신 후에, 더 이상 열을 받으며 노후를 지낼 수 없는 라트 선생은 호적에서 아들 이름을 파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홀아비 신세로 엄한 하녀의 눈치를 보면서 홀로 살고 있다.

  오랜 세월 누구와의 교류도 없이 오직 라틴어와 그리스어, 그리고 고전문학만 연구하면서 홀로 지내다 보니 라트 박사의 삶은 외골수로 치달아 현재 관심이 있는 것은 첫째가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불변화 품사에 관한 논문 작성과, 자기 학급의 문제아 세 명에게 앞으로 남은 인생 전부를 망칠 수 있도록 “포박”하는 일이다. 김나지움 10학년. 이들 가운데 세 명의 문제아를 소개하자면 키젤라크, 폰 에르춤 백작, 그리고 가장 경멸해 마지않는 로만이다. 폰 에르춤은 공부 머리가 아예 없고, 로만은 학업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수업시간과 상관없이 다른 책들만 파는 학생으로 벌써 두 학년을 꿇어 다른 아이들보다 나이가 많아 열일곱 살이다. 두 명은 하여튼 성적이 안 되어 유급을 한 반면에 키젤라크는 축제 때 라트 선생의 별명을 큰 소리로 외치는 바람에 괘씸죄에 걸렸다고 밖에 보이지 않는다. 별명? 그렇다. 사내아이들, 젊은 수컷들의 몸과 뇌에서 자동 지시하는 일들, 욕구를 좇고, 소동을 일으키고, 주먹질을 하고, 다치게 하고, 못된 장난을 치고, 쓸데없는 객기와 남아도는 힘을 헛되게 써버리는 일에 점령된 사춘기 소년들의 정글. 이들은 인생이 허여한 몇 년 안 되는 동안의 특권으로 교사들에게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지어준다. 나도 아직 고교 시절 교사들의 별명을 몇 개 잊지 않고 있다. 개밥그릇, 혼수상태, (어느 학교나 빠지지 않고 있는) 미친개, 멍게 등등. 이들은 라트 선생에게 선생의 이름을 아주 약간 바꾸어 운라트Unrat라는 별호를 지어주었다. 오물rubbish라는 뜻이다.

  그런데 운라트 선생이 자기 별명에 유독 발광을 하는 것은, 25년 동안 자신이 가르쳤던 5만 명의 시민 전부가 자신을 똑같이 오물이라는 뜻의 아름답지 아니한 수준을 넘어 경멸스러운 별명으로 부르는 일이다. 가뜩이나 편협하고 편집광 적이고, 외고집인 선생은 선생이 듣고 있다는 걸 아는지 마는지는 다음으로 하고 학생 누군가가 자신의 가청권 안에서 자신을 ‘운라트’라고 호칭을 하면 뺑, 돌아버린다. 그리하여 누가 선생의 모습으로 보면 겁을 먹었으면서도 복수심에 불타는 눈빛을 한 57세의 노인(1905년 작품으로 당시 57세면 상 할아버지였다)한테, 학생들의 주름진 외투들 속에 혹시라도 단도가 숨겨져 있는 게 아닌지 엿보는 떳떳하지 못한 폭군의 눈빛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 작품의 제목에 나오는 “어느 폭군”이 김나지움 안에서의 운라트 선생을 일컫는다. 폭군이라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 천만의 말씀. 역대의 폭군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 암살이나 테러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 속에서 살았다. 원래 폭군tyrant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었다. 다수의 우둔한 군중에 의한 민주주의가 저지르는 만행을 극복하기 위해 독재정이 출발했던 것과 비슷하다. 독재정의 우두머리에 한 미친 작자가 앉아버리면 그게 폭군이 되는 거고, 민중들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도편추방이란 조금은 어이없는 제도를 또 장만했던 거 아닌가 말이지. 운라트 선생은 그러나 바람직한 폭군이 아니라 로마 시대의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네로, 콤모두스 같아서 적어도 매년 한 명 이상은 자신을 오물이라고 공개적으로 부른 학생을 처단해야 만족하고, 한 해를 보람있게 보냈다, 라는 소감을 남겼다.


​  하여간 작품 속의 해에 걸려든 문제아 세 명 가운데서도 가장 골치 아프고, 그래서 반드시 처단해야 하는 학생으로 선생은 로만을 선택했다. 실러의 시 <오를레앙의 처녀>에 관해,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그게 있을 수 있는지도 상상 못할 문제에 관하여 에세이를 쓰라는 시험을 치루는데, 가장 빨리 시험 노트를 메운 다음 태연하게 다른 책을 보고 있던 로만을 선생은 교실 밖으로 내보낸다. 이후에 작문 노트를 들춰보니 로만이 지은 야릇한 시 <고귀한 여배우 프륄리히 양에게 바치는 경의>가 적혀 있다. 이 가운데 한 귀절.


​  그대는 뼛속까지 타락했소.

  그렇지만 그대는 위대한 예술가요.

  그리고 그대가 일단 산욕産褥에 든다면


​  선생의 문제는, 아이들이 고등학생이라는 걸 간과한다는 거다. 내가 아직도 어처구니없어 하는 담임교사 한 분이 있는데, 초등학교 3학년 시절 음악과목에 열성이던 홍XX 선생으로, 이이가 하루는 가르치다가 뭣 때문에 열을 잔뜩 받았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겨우 열 살 백이 아이들 80명을 앞에 두고 “내가 왜 <사운드 오브 뮤직>을 여섯 번이나 봤는지 알아?”라고 절규하던 장면이다. 틀림없이 선생은 꼬맹이들을 자기 수준으로 올려놓았던지 아니면 자기가 열 살 수준으로 스스로 내려갔던 터이다. 운라트 선생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하나, 가장 위협적인 문제아, 결코 ‘운라트’라고 부르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경멸하고 있음을 내비치는 아이. 예를 들어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 “선생님 더 이상 못 참겠습니다. 여기에 오물(운라트) 냄새가 지독하게 난단 말입니다.” 라고 발언하는 식으로.

  이리하여 선생은 오랜만에 저녁시간에 길거리에 나서 극장에도 가보고, 직업소개소라고 생각했지만 엉뚱하게 ‘선원 알선인’ 사무실에도 들어가 하계공연 입장권도 요구해보고, 카페 센트럴에 몇 년 만에 가보기도 하고, 심지어 저녁 식사중인 제화기능장 린트플라이슈의 집에 방문해 필요하지 않은 장화를 맞추면서 어디 가면 여배우 프륄리히 양을 만날 수 있는지 묻기도 한다. 왜? 프륄리히 양이 누군지 알아야 문제아 로만을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다가 부두 노동자 두 명을 우연히 발견하고 그들을 따라 가게 되는데, 이들은 얼핏 보기엔 가정집 같은 술집 “푸른 천사”로 들어간다. 선생도 이들을 좇아 입구에서 프륄리히 양이 여기에 있는지 물어봤는데, 빙고, 드디어 찾았다. 이곳에서 노래를 부른다는 것. 그리하여 선생은 평소라면 출입할 생각도 하지 않을 하층계층 사람들 전용 술집에 용감하게 입성해 참으로 어여쁘게 생긴 프륄리히 양을 눈으로 보는 순간, 누군가 급하게 출입구 쪽으로 뛰어나가는 것도 발견하니, 바로 자신의 타겟인 문제아 3인방이었다.

  집에 돌아온 운라트 선생. 이젠 호메로스의 작품에 나오는 불변화 품사에 관한 생각을 더 이상 할 수 없다. 두 명 때문에. 로만과 프륄리히. 이후 어떻게 될까? 통 크게 알려드린다. 57세의 운라트 선생, 프륄리히한테 꽂혀버린다. 여배우에게 바칠 최고급 샴페인과 꽃을 위해 처음엔 조금씩 돈을 낭비하다가 당연히 점점 규모가 커져 버린다. 하지만 정작 로만이 사랑했던 여인은 프륄리히가 아니라 도라 브레드포트 여사였던 것이고, 브레드포트 여사가 불과 얼마 전에 출산을 해 산욕 운운하는 시를 썼는데 감히 여신과 같은 도라 브레드포트 여사의 이름을 내놓고 쓰기 힘들어 여배우 프륄리히의 이름을 빌렸을 뿐이었던 거다. 세상이 뭐 다 그렇지. 그러나, 아직 스토리는 반이 넘게 남았다. 운라트 선생이 언제, 어떻게 종말을 맞을지는 당연히 안 알려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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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12-08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 책이 재밌는 거예요, 골드문트님이 재미있게 쓰신 거예요? 별명이 오물이라니 좀 불쌍하기도 ㅎㅎ

Falstaff 2022-12-08 16:5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책이 재미 있겠지요! 저야 곁가지 헛소리만 보태는 걸요.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yamoo 2022-12-08 17: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인리히 만의 작품은 좀 지루하더군요. 몇 권을 읽어봤지만 50페이지를 넘는 게 없었어요. 왤케 재미가 없던지...지금 읽으면 다를려나요??

Falstaff 2022-12-08 19:29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재미가 괜찮은 편에 듭니다. 뭐 그렇다고 명작의 반열까지 이야기하는 건 무리이긴 합니다. 이 책 말고 하인리히 만의 작품은 <앙리 4세>만 번역해 나온 걸로 아는데요, 저도 <앙리 4세>는 참 번거롭게 읽었습니다. 당사자가 들으면 기겁하겠지만 혹시 역자의 우리말 실력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가 지금도 궁금합니다.

yamoo 2022-12-09 16:58   좋아요 0 | URL
엔날 책들에 단편집에 보면 하이리히 만의 단편들이 꽤 실려있었어요. 영문과 수업시간에도 만의 작품을 영어판으로 읽어봤는데 재미와는 영~~

<앙리4세>는 어떤가요?

Falstaff 2022-12-10 06:11   좋아요 0 | URL
<앙리 4세>를 이렇게 얘기하면 열 받는 분 많을 텐데요, 너무 엄격한 번역이 가독성을 좀 떨어트리지 않나 싶었습니다. 헌책방에서 찾아 읽으시면 좋겠는데 굳이 비싸게 사 읽으실 필요까지는 없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