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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바의 폭군 안젤로
빅토르 위고 지음, 곽광자 옮김 / 소명출판 / 2016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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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위고가 극작가로도 당대를 휘어잡은 유명세를 떨쳤다는 건 알고 있어도 정작 그의 희곡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을 무슨 이유였을까? 그의 소설들, <레 미제라블>, <파리 노트르담>, <웃는 남자>, <93년>등이 너무 뛰어나 그걸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설에 비해 희곡이라는 장르에 익숙하지 않아서 였을 수도 있고. 아마 그랬으리라. 얼핏 생각나는 위고의 유명 희곡 작품으로는 <에르나니>, <환락의 왕> 정도가 있다. 둘 다 우연하게도 베르디에 의하여 <에르나니>, <리골레토>라는 제목의 오페라로 만들어져 더 친숙했을 터이기도 하다. 이번에 고른 <파도바의 폭군 안젤로>는 그냥 쇼핑을 하다가 위고의 희곡이 눈에 띄어 별 생각 없이 사서 읽은 책인데, 정작 읽다가 보니 내용의 많은 부분이 아밀카레 폰키엘리가 작곡한 <라 지오콘다>와 상당히 유사해, 안토니노 보토 지휘의 EMI 음반에 포함되어 있는 대본집을 꺼내 확인해봤더니 오페라의 원작이 맞긴 하단다. 다만 본인 스스로가 오페라 <메피스토펠레>의 작곡가이기도 한 대본가 아리고 보이토가 연극을 전제로 쓴 희곡을 오페라 대본으로 다시 만들면서 더욱 드라마틱하게, 베리즈모 오페라 답게, 상당한 부분에 수정을 가해 원작과 많이 다르게 각색했다.
작품의 배경은 16세기 중엽 베네치아의 두번째 수도인 파도바. 14세기에 만들어져 베네치아 공국의 공포정치에 아주 효과적으로 쓰인 십인 위원회의 밀정이 도시에서 암약했던 시절이다. 이들을 굳이 설명하자면 북한 보위부 정도로 생각하면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들의 악명이 얼마나 떠르르 했는지, 베네치아에 이어 공국에서 두번째로 중요한 도시인 파도바의 시장일지언정 십인회 밀정들의 보고서에 이름이 올라갔다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시장 본인이 항상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고 위고는 작품을 통해 설명한다. 그리하여 시장 자신의 속마음과는 달리 베네치아 정부에서 파도바를 통치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치가 하달되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하달된 지시를 이루어야 하고, 그러다보니 독재자 또는 폭군 비슷한 악명을 갖을 수밖에 없었을 정도였다.
1549년 부근의 파도바에서 시장을 맡고 있는 안젤로 말리피에리는, 베네치아의 저수지 물 소유권을 가지고 있어서, 지참금은 지참금대로 별도로 하고 매년 현금 10만 두카토를 벌어들일 수 있는 브라가디니 집안의 아름다운 아가씨 카타리나와 5년째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나, 결코 한 번도 아내를 사랑해본 적이 없는지라 넘치는 리비도는 좋은 말로 하면 배우, 좀 나쁜 말로 하자면 여자 광대패의 일원인 라 티스베를 통해 해결하고 있다. 하지만 사랑을 하느냐, 마느냐와 관계없이 이 안젤로 시장은 불 같은 질투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라서 아내 카타리나가 외갓남자인 로돌포와 육체적으로는 순결하지만 정신적으로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정부인 티스베의 숨겨놓은 애인이 있더라도 만일 눈에 걸렸다 하면 모두 죽은 목숨이라 생각하면 틀린 말이 아니다. 게다가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 16세기, 위고가 작품을 쓴 것이 1835년이니 여성주의나 인권의 시각으로 감상을 하면 좀 신경질 나는 부분이 당연히 있을 터.
문학작품을 보면, 당연히 21세기 막장 드라마를 포함해도 그러한데, 질투가 심한 사람의 배우자한테는 우연히 애인이 있다. 그럼 이게 우연이냐 필연이냐, 이게 궁금해지기도 하지만 하여간 그런 경우가 많은데, 우리의 불쌍한 파도바 시의 시장 안젤로 말리피에리 선생의 아내와 정부, 카타리나와 티스베 한테도 역시 애인이 있었으며, 안젤로 시장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불행하게도 여자 두 명의 애인이 로돌포, 단 한 명이었던 거다. 즉, 안젤로가 좀 더 똑똑해서 아내와 애인 공동의 적수인 로돌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할 수만 있었다면 이런 19세기적 낭만주의 작품은 햇빛을 볼 수 없었을 것이기는 하지만 그럼 극작가는 뭘 먹고 사는가. 안젤로는 작품이 끝날 때까지 자기의 연적이 한 명인지, 연적의 이름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른 채 막이 내려간다. 폰키엘리 오페라에서 안젤로 시장의 역할을 맡은 알비세 공작은 아주 작은 배역, 아내의 바람기를 눈치채고 어서 사약을 들라, 명령만 한 채 무도회에 참석하러 가는 걸로 끝을 내지만, 위고의 작품에서는 아내 카탈리나에게 연인 로돌포가 있는 것도 모자라, 카탈리나를 연모하다가 심각하게 명예를 훼손당했다고 여겨 이를 앙갚음해주겠다는 일념하에 작품을 드라마로 끌고 가는 십인 위원회의 밀정 오모데이도 등장한다. 즉, 오모데이의 협잡에 의하여 아내 카탈리나에게 연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가문의 수치로 여긴 안젤로 시장이 도끼로 아내의 목을 치려다가(서양에선 목을 잘라 죽이는 것이 덜 고통을 느끼게 하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라 주로 귀족들에게 사용했고, 평민과 천민들은 주로 교수형에 처했다), 티스베가 계략을 내 절두형 대신 자기가 가지고 있는 독약을 먹여 죽이자고 꼬이고는 독약 대신 열두 시간 동안 죽은 것처럼 모든 신진대사를 멈추게 하는 비약을 먹이는 것으로 만들었다.
라 티스베에게는 함께 비첸차에서 구걸해 밥을 빌어먹는 어머니와 둘이 살았다. 하루는 어머니가 아무 뜻도 모르면서 노래를 불렀고, 가사의 내용이 베네치아 정부를 모욕하는 것이라 지나는 길에 노래를 듣고 열을 받은 비첸차 시장이 즉각 저 거지 여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을 한 적이 있다. 이때 시장의 어린 딸이 아버지 앞에 무릎을 팍, 꿇고나서 하는 말이, 저 여인이 가여우니 목숨을 살려주십사. 아버지는 딸의 고운 심성이 갸륵해 거지 여인을 살려주었고, 여인은 그게 너무나도 고마워 구리로 만든 십자가를 어린 아가씨에게 선물로 준 적이 있었다. 이후 십 수 년이 흘러 티스베는 배우가 되어 파도바로 흘러들어 왔으며, 어린 아가씨 역시 파도바 최고의 권력자인 시장의 아내가 되어, 이제 둘이 로돌포라고 하는, 2백년 전에 파도바의 지배자였던 가문의 장손을, 파리 다락방에 사는 미미의 애인은 아니지만 하여간 잘 생기기만 한 연인으로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누가? 티스베가. 사실 로돌포 입장에선 티스베가 나중에 자기 입으로 얘기했듯이 심심풀이 땅콩으로, 손이 가요, 손이 가, 자꾸 손이 가는, 새우깡 비슷한 용도로 티스베와 접촉을 했을 뿐, 진정으로 마음을 다해 죽음까지 담보할 수 있는 사랑을 한 대상은 시장의 부인인 카탈리나였던 것.
이러니 티스베 입장에서 카탈리나를 어떻게 하고 싶겠어? 기회만 되면 콱 죽여버리고 싶었겠지. 그러나 아직은 카탈리나가 저 오래 전에 자기 엄마의 목숨을 살려준 마음씨 고운 어린 아가씨였던 걸 모르고 있는 상태. 그러다가 십인 위원회의 밀정 오모데이가 그럴 듯한 상을 차려주어 이제 카탈리나의 목숨을 단칼에 보내버릴 수 있는 찬스가 온 순간, 시장부인의 처소에 걸린 저 먼 옛 시절의 구리 십자가를 보게 되어 지긋지긋한 팔자 타령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는데, 이후는 생략.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지오콘다>에서는 오페라 역사상 최고의 악당 바르바나가 눈썹을 휘날리며 지오콘다의 눈 먼 어머니를 지하 수로에 빠뜨려 죽이고, 어떻게 해서라도 지오콘다를 한 번 자빠뜨려보려고 온갖 악행을 다 하지만, 위고의 <파도바의 폭군 안젤로>에서 바르바나 역을 하는 오모데이는 오직 카탈리나를 향한 복수에 눈이 멀어 2막에서 그냥 싱겁게 로돌포와 대결을 하다가 맥없이 죽어 자빠진다. 그리하여 드라마틱한 만족감을 누리는 측면에서는 당대의 오페라 대본가였던 아리고 보이토가 쓴 <라 지오콘다>가 더 멋있다.
독약은 이렇게 쓰는 것! 아밀카레 폰키엘리, <라 지오콘다> 3막,지오콘다의 아리아 "자살!"
안토니노 보토 지휘, 스칼라극장 오케스트라와 합창단. 그리고 최고 전성기 1952년의 마리아 칼라스. (1952년 녹음. 저작권 소멸. 마음껏 즐기시라!)
다른 예로 티스베가 가지고 있던 몰약은 열두 시간 동안 신진대사를 멈추게 하는 약하고, 진짜 독약하고 두 가지였다. 위고는 진짜 독약을 써보지도 않는데, 이건 반칙이다. 이 법칙은 20세기 들어와, 작품에 일단 총이 등장하면 한 번은 방아쇠가 당겨져야 한다,로 바뀌는데, 강력한 독약임을 자랑했음에도 어째 그건 소리소문 없이 그냥 사라지느냐 말이지. 이 독약의 처리에서도 폰키엘리가 더 강력하다. 그래 이래저래 폰키엘리의 오페라 <라 지오콘다>도 한 번 감상해보시면 훨씬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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