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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희곡우체통 낭독회 희곡집 ㅣ 국립극단 희곡우체통 희곡집
김옥미 외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11월
평점 :
여덟 편의 희곡을 실은 580쪽의 두툼한 책. 게다가 대부분 수준작이다. 함께 읽고 있는 서울 연극제 희곡집과 비교해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어 여러가지를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정말로 무대 공연을 염두에 둔 희곡이 아니라 낭독을 위한 작품이라서 극작가들은 마치 영화의 대본을 쓰는 것처럼 마음껏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절대로 선을 넘지 않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장례식장 사장이 사설 구급차 기사에게 오랜 우정과 불운을 미끼로 119 비상 무전을 도청해서 죽어가는 사람만 골라 수송해오게 만드는 첫째 작품 김옥미 작 <발화>부터 독자의 흥미를 조금씩 고조시키는데, 여자의 몸에 관해 손버릇이 좋지 않은 젊은 산부인과 의사와 간호사가 통정하고, 임신한 간호사가 열차 자살해버렸는데 하필 현장에 있던 3류 기자가 시신에서 신분증을 훔쳐 자살자가 도지사의 가출한 딸이라는 작지 않은 스캔들임을 밝혀 특종을 내지만 권력에 의하여 오보로 알려지게 되는 어단비 작 <오보>에 이르면 이제 다음 작품엔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지적 장애가 있는 젊은 여성의 성 문제와 성적 약탈 그리고 장애인 가족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삶을 이어가는 지를 저격한 배시현의 <별을 위하여>도 사회적 논의를 요구하고 있고, 폭설이 내린 한겨울의 덴버를 배경으로 하는 해외 입양아 문제를 다룬 오예슬의 <클로이>도 독자로 하여금 조금은 불편한 생각 거리를 마련한다.
연극에 출현하는 배우들을 예로 들어서 그렇지만 모든 창작물의 등장인물과 실제 인물들 사이의 간극을 다룬 윤영률의 <조니와 라디오>는 내가 줄곧 관심을 쏟아왔던 책장에 쌓인 책 속의 무수한 인물들, 예를 들어 아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는 오늘 이 순간까지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술에 취해 넋을 놓고 있을 때 책 속에서 나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상상과 연관해서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괴물 아버지에 의한 가정폭력으로 가족이 해체되는 이민규의 <평범한 가족>은 요새 작품집 안에 필수적으로 반드시 한 편 이상 들어야 하는 내용이라 새로운 건 없었으며, 이미 역사에서 사라진 사무기기인 ‘전동 볼 타자기’를 손에 넣기 위해 벌이는 에피소드를 재미있게 그린 기하라의 <삼차원 타자기>는 다분히 교훈적 메시지를 전했다. 마지막 작품 유혜율의 <당신이 밤을 건너올 때>는 여전히 재야에서 가난하게 소외된 자들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주인공 형진을 등장시켜 80년대 민주화 운동 시절 고문당하고 죽어간 동지들과 이제는 변절해 기득권이 되어버린 대부분의 좌파 86세력에게 유감스러운 시선을 던지지만 나는 86 시절 이야기 자체를 듣고 싶지 않아서 흥미를 끌지는 못했다. 그래도 끝까지 읽기는 다 읽었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편이다.
책에 실린 것들은 전부 2019년 1월부터 11월까지 서울시내 몇 군데 극장에서 낭독극 형태로 공연을 한 작품이다. 이번에는 김옥미, 어단비, 오예슬, 윤영률, 이민규 등의 신인 극작가의 작품들이 실렸다. 유혜율도 문인 등단은 몇 년 전에 했더라도 극작가로의 등단으로 치면 첫 ‘연극’ 공연이 2020년이라고 하니 신인 극작가로 봐야 하겠다.
국립극단이 진행하고 있는 희곡우체통 행사는 2018년부터 2020년까지 세 권만 출판됐다. 이것으로 희곡우체통 희곡집은 모두 읽은 셈인데, 흥미진진한 행사가 2021년에는 열리지 않은 것인지, 열리기는 했으나 아직 희곡집을 출간하지 않은 것인지 궁금하다. 이 정도 수준의 우리나라 현대 희곡이라면 내가 아무리 백수 시대를 시작하고 있더라도 기꺼이 지갑을 열 용의가 있다.
좋은 행사를 기획, 진행하고 있는 국립극단의 노고에 갈채를 보내며 곳곳에 숨어 있는 우리나라의 젊은 극작가와 극작가 지망생들의 건필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