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희곡우체통 낭독회 희곡집 국립극단 희곡우체통 희곡집
안정민 외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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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독한 목욕>을 비롯해 모두 일곱 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희곡 우체통은 국립극단에서 숨어 있는 우수 희곡을 발굴해 창작극 레퍼토리로 개발하겠다는 취지로 온라인 상시 투고를 통해 접수, 비록 진짜 연극은 아니지만 배우들이 대학로 연습장, 스튜디오 하나, 소극장 판 등에서 스탠드 낭독회를 열어주는 행사다. 다른 연극제와 달리 작품도 수시 온라인 접수하는 것처럼, 낭독회 역시 연극제처럼 한 시기를 정해 몇 작품을 공연/낭독하는 대신 수시로, 2018년의 경우에는 4월부터 12월까지 장소를 달리해가며 진행을 하고, 2년 후인 2020년에 희곡을 모아 작품집을 만들었다.
  고동율의 <인간부결> 독후감에서 우리나라에서는 연극으로 공연하고 희곡을 기록으로 남기는데 게을렀기 때문에 우리 독자들이 우리 희곡 읽을 기회가 별로 없었다고 말한 것과 연관해서, 내가 우연히 느낀 인식과 비슷한 고민을 한 국립극단이, 공연의 기회가 별로 주어지지 않는 젊은 희곡작가가 희곡집을 출판할 기회가 거의 없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다양한 희곡 작품을 연극 제작자와 독자에게 노출시키기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책 《2018 희곡우체통 낭독회 희곡집》을 시작으로 작년 6월에 읽은 《2020 희곡우체통 낭독회 희곡집》, 그리고 몇 달 뒤에 읽을 《2019 희곡우체통 낭독회 희곡집》까지 현재 세 권의 희곡집을 출간했다. 신춘문예를 비롯해 매년 여러 통로를 통해 신인 극작가들이 등단하고 있으나 그들 역시 자신의 작품을 공연단체나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기회가 거의 없는 것과 비교하면, 이 희곡 우체통 제도야말로 본격적인 극작 활동을 하는데 가장 매력적인 지름길로 보인다.

 

  첫번째 실린 작품이 안정민 작 <고독한 목욕>이다. 막이 오르면 무대에 욕조가 있고, 아들이 욕조 속에 몸을 담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이어서 아들의 아버지 송씨가 등장해 욕조에 걸터앉아 부자간에 서로 좋아하는 것들을 나열한다.
  오래된 책 냄새, 구겨진 책의 끄트머리, 누군가가 남겨둔 메모의 눌린 볼펜 자국, 잔잔한 담배 냄새, 머리에 닿은 손가락 끝의 굳은 살, 목줄기를 덥히는 맑은 술 한 모금, 책을 탁 덮는 소리, 아침에 느끼는 잠의 무게, 밤에 느끼는 깨어 있음의 무게, 살냄새, 여자의 머리카락 냄새 등등.
  그러나 송씨는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고 유령이라고 볼 필요도 없다. 아들이 생각하는 한 시절 아버지에 대한 상상, 이미지 같은 것들로 읽힌다. 이렇게 진도가 나가다가, 진실을 알고 보면 송씨는 1974년의 인민혁명당(인혁당) 사건으로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잡혀가 모진 고문 끝에 긴급조치 4호,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내란선동 등의 죄목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회부되어 1975년 4월 8일에 사형을 확정, 판결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으로 세상을 등진 실제인물 송상진이다.
  여기서 조금 의아했다. 2018년의 신인 극작가가 1974년 인혁당 사건을 모티브로 극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유신정권에 의하여 폭압적, 일방적으로 민간인을 군법회의를 통해 사형에 처한 야만 행위를 서정적 제의로 풀어나가는 실력하며, 1974년까지 시선을 확장한 수용력을 가진 극작가가 신인일 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이의 프로필을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2021년 현재 “창작집단 푸른수염”의 대표이사이며 극작가, 연출가로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는, 중견 연극인(이라고 해도 어색함이 없을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다시 희곡 우체통 소개를 보니까, 단 한 마디도 ‘신인’ 극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행사라고 하지 않았다. 그저 습관적으로 의례히 신인 극작가 발굴작업이겠거니, 했던 것일 뿐. 동시에 우리나라 희곡집 출간이 이것 밖에 안 되는구나, 라는 마음이 들어 씁쓸했다. 중견 연극인, 자신의 극작을 자신이 연출해 자신의 연극집단에서 공연을 할 정도가 되도, “자비출판”을 하지 않으면 희곡집을 내지 못하는 것이 21세기도 20년 이상이 지난, OECD 국가의 일원인 R.O.K의 현실이다.

 

창작집단 푸른수염의 대표이사, 극작가, 연출가.  안정민

사진출처: 『마리 끌레르』https://www.marieclairekorea.com/culture/2021/11/ahn-jeongmin/   

『마리 끌레르』의 동의와 관계없이 그냥 쌔벼왔음.

 

  기껏 인터넷 검색을 했는데, 책의 제일 뒤편을 보니 작가 약력이 따로 두 페이지 있다. 헛심 빠진다.
  두번째 작 <나비꿈_우연히 태어나 필연히 날아가>를 쓴 이선율은 2014년에 <18_우리들의 거리>로 첫 공연을 올린 경험자이고, <괴화나무 아래>의 정영욱은 한술 더 떠 199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을 해 두 권의 희곡집 《남은 집》과 《농담》을 출간해 대산창작기금,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기금을, 물론 둘 다 얼마 되지는 않겠지만, 2018년 당시 20년 경력의 중견 극작가였다.
  <노크 연습>을 쓴 자기소개가 재미있는 극작가 진실은, 그대로 인용하자면, “여수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201호 아가씨로 살고 있”는데, 이이야말로 말 그대로 신인 극작가로, 이 희곡집이 자신의 이름을 달고 처음으로 발표한 희곡이며, 2년 후 《2020 희곡우체통 낭독회 희곡집》에 두번째 희곡 <다용도 접이식 가족>을 발표한다. 고학력 비정규직 교사와 조기 해직의 애환을 담은 <헤어 드라이어>를 쓴 손성연도 이 작품을 데뷔작이라 할 만하다. <봄눈>의 김미정은 200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한 이후 적어도 다섯 작품을 무대에 올렸지만 한 권의 희곡집도 내지 않았으며, 마지막 작품으로 실린 <배종옥, 부득이한>의 김연재 역시 무대에 올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다섯 편의 희곡을 발표했다.

 

  이런 극작가들의 작품들이 응모를 했으며, 국립극단은 이 가운데 괜찮은 작품을 골라 낭송회도 하고 희곡집으로 출간까지 했으니 작품의 품질이 좋을 수밖에. 그러나 《2017 서울연극제 희곡집》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작품 속에 꼭 필요할 것 같지 않는 상스러운 욕설을 많이 사용했는지는 굳이 이해하고 싶지도 않고, 이해해주고 싶지도 않다.
  처음부터 이 극작품들은 실제 무대에서 공연하는 연극이 아니라 낭독회에 초점을 맞춘 것이라서 실제로 공연이 가능할지 여부는 연극에 몰두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아마 연출가의 개입이 상당한 수준 필요하리라고 생각한다. 요즘 연극에는 희곡과 극 사이의 장애랄까 간극이랄까를 좁히는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드라마터지’라는 직업이 있다. 이들은 희곡을 진짜로 공연하기 위해 일종의 각색, 각색은 아니고 행위를 하기 위한 보정작업을 하는데, 책 속의 몇 작품은 드라마터지를 바쁘게 할 소지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일곱 명의 극작가가 쓴 일곱 희곡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나 같은 희곡 초보자들에게는 좋은 기회를 준다.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지만 드라마 작가들도 다들 자신의 독특한 문법을 가지고 있어서 한 권으로 다양한 극작품을 감상하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작품집을 통해 우리의 현대 극작가들을 알고, 현대 희곡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눈치를 채는 것과 동시에 특정 극작가들의 희곡집을 함께 읽어주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런 생각을 해서 이번에 책을 구입할 때, 박근형과 이강백의 희곡집을 한 권 씩 사서 차근차근 읽으려 한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그동안 너무 오래 소설과 시 만을 읽었기 때문에 희곡을 연달아 읽는 것이 쉬운 작업은 아니다. 하지만 뭘 해봐라, 처음부터 쉬운 것이 하나라도 있었는지. 하다못해 당신의 첫 키스도 그랬지 않았는가 말이지. 그래도, 쉽지 않아도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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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2-02-14 1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이런 움직임이 있다는 게 다행이긴 하네요.
메스컴이나 출판계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줘야 읽기도
가능할텐데 여간해선 희곡엔 곁을 내어주지 않으니 아쉽죠.
저라도 누가 희곡을 쓴다고 하면 도시락 싸들고 말릴 것 같아요.
뭐 몇푼이나 받겠다고. 그럴 바엔 조금 더 노력해서 시나오리를 쓰던가
소설을 쓰라고 하겠죠.
그래도 골드문트님 같은 독자가 있다는 건 그들로선 고마운 일일겁니다.^^

Falstaff 2022-02-14 19:01   좋아요 1 | URL
에휴, 고맙습니다.
유독 우리나라가 희곡의 출판에 야박한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