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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희 희곡집 1
이만희 지음 / 월인 / 1998년 10월
평점 :
품절
1954년 말띠 아저씨.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뻤던 영화배우 정윤희와 동갑이다. 세월이 흘러 이젠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대한민국 연극계의 거장이라 불러도 무리는 없을 듯하다. 연극에 관한 책을 전문으로 발행했던 도서출판 월인, 이제는 이름을 ‘연극과 인간’으로 바꾼 회사에서 1998년에 초판을 찍은 책. 내가 읽은 건 2004년 중쇄본이다. 지금은 절판 상태. 대신 아르테arte 출판사에서 네 권으로 된 <이만희 희곡집> 세트가 나와 있다.
이이의 바이오그래피를 보면, 충남 대천에서 태어나, 고교 연극의 명문인 휘문고등학교를 거쳐 1978년에 동국대학 인도철학과를 졸업하고, 1979년에 동아일보 장막희곡공모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미이라속의 시체들>로 입선해 극작가로 등단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만희 희곡집 1》에 <돼지와 오토바이>라고 제목을 바꿔 실려 있다. 1980년에는 전라남도 도청이 있던 광주에서 교사자리를 얻어 내려갔다가 뜻을 같이 하는 친구와 함께 소극장을 꾸릴 궁리를 하다가,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처녀비행>을 쓰지만 1996년에야 무대에 올린다. 등단 1년 만에 자기 작품을 올리기가 쉬운가 어디.
우경 신문이라 일컫는 동아일보가 매년 동아연극제를 개최하는 등, 사실 우리나라 연극계를 가장 많이 지원하고 있는 법인이다. 이만희는 장막희곡공모에 당선하지 못하고 입선으로 등단한 것이 종내 께름칙했는지 서른 살이 되는 1983년에 <풍인>으로 월간문학 신인문학상 희곡부문 수상함으로써 기어이 어깨에 힘을 주고 만다. 이이의 연극관련 수상 경력만 해도 서울연극제 희곡부문, 백상예술상, 영희연극상, 동아연극상, 대산문학상, 한국희곡문학상 등 일일이 거론하기 힘들 지경이고, 여기다 영화관련 수상까지 보태면 지금이 오후 세 시인데, 내일 해뜰 때까지 읊어야 할 듯.
이이의 대표작으로는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와 <피고지고 피고지고> 등을 꼽는다. 도서출판 월인에서 찍은 《이만희 희곡집 1》은 <목탁구멍>만 실었다. <피고지고 피고지고>는 2편에 들어 있으나 역시 절판. 읽어보려면 역시 아르테 책을 선택해야 한다.
<처녀비행>은, 요새 처녀비행, 처녀림, 처녀출판, 같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이 극작품을 쓴 때가 1980년이니 그냥 넘어가더라도, 당시 광주의 모 고등학교 교사로 있었으면 당연히 작가의 말대로 작품에 ‘광주와 연극’을 함께 담아보려 노력을 했어야 할 터이다. 이만희도 그런 의욕과 울분을 작품 속에 삽입해보려 했지만 습작기 때여서 그랬는지 결과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 작품을 1980년에 썼으나 1996년에야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를 솔직하게 말해보자면, 늦게나마 무대에 올릴 수 있었던 것도 이미 연극계의 중견 이상으로 발전한 이만희의 작품이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작가 말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습작이라는 티가 난다. 소위 옵니버스 형식의 작품이라고 주장을 하지만, 표현방식이 80년은 모르겠고, 96년에 공연하기엔 많이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저런 표현방식을 다 시험해본 다음에 끝에 가서 결국 최소한 일곱 명의 등장인물의 홀딱 쇼로 맺는 것도 이제는 그렇게 유치해보일 수가 없다. 실제 90년대 한 시절에 소극장의 홀딱 쇼가 문화적으로 자그마한 문제점으로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던 것도 같고.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그것은 목탁구멍 속의 작은 어둠이었습니다. : 이후 “목탁구멍”>은 분명히 처음 읽는 것임에도 주인공인 중 도법의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시작 장면이 너무 강한 클리셰가 아니었나 싶다. 적어도 서너 번은 본 것 같은 문제제기. 수 명의 강도가 남자를 묶어놓고 그가 보는 앞에서 아내를 여럿이 돌려가며 강간하는 범죄. 문제는 범죄가 끝나고, 사건이 해결됐거나 아니거나와 관계없이, 20세기 남자들(어쩌면 지금도! 많은 남자를 포함해서)의 편협한 도덕이나 정조관념 때문에 분명히 아내가 아무 잘못도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다른 남자의 체액이 내 아내의 몸속에 들어왔고, 피부를 터치했다는 이유로 가정과 아내(또는 연인)와 (만일 있다면)자식과 자기 자신까지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들. 나는 분명히 이런 주제로 쓴 소설을 읽어봤으며, 비단 최불암 아저씨 나오는 <수사반장>은 아니었을망정, 물론 설이나 추석 특집 <수사반장>이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한 편이 아닌 통속극에서 비슷한 내용을 본 것도 같다.
이러니 어떻게 내가 이만희의 대표작 가운데 한 편인 <목탁구멍>을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겠는가. 하물며 이런 생각이 드니까 작품의 내용마저 김동리의 <무녀도>, <등신불>과 김성동의 <만다라>에서 특정 씬을 변용한 것이 아닐까 의심마저 잠깐 품었다니까. 설마 그렇게 했을까. 당연히 아니지만 하여튼 그만큼 중요한 클리셰였을 수도 있다는 뜻이며, 진심으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기를 바란다.
그렇다고 이 책이 별로라는 뜻은 아니다. 바로 어제 미셸 비나베르가 쓴 <어느 여인의 초상>을 읽어서 더욱 즐겁게 읽을 수 있었는데, 이만희의 작품 가운데 <불 좀 꺼주세요>처럼 비나베르와 유사한 다원구조를 가진 작품도 있고, <목탁구멍>이나 <문디>, <돼지와 오토바이> 같은 ‘극중 극’의 형식을 가진 것도 있어서 다양한 방식을 즐길 수 있었다.
현대 우리 연극계의 거장이며 대표적인 극작가라고 일컫는 이만희의 희곡집 한 권은 읽었다. 괜찮은 선택이었고, 즐길 만했다.